템빨 73권 - 8화
“살아생전 덕을 쌓아도 아스가르드에 오르지 못한단 말이 사실입니까?”
도미니언교와 쥬다르교의 교주는 골치를 썩고 있었다.
감히 신을 참칭한 템빨왕.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레베카교를 붕괴시킨 그가 이젠 헛소문까지 퍼뜨린 까닭이다.
천국에 오를 수 있는 건 ‘천사’가 될 자격을 얻은 선택받은 소수에 불과하다니?
해괴망측한 궤변이었다. 지적할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사실은 지옥이야말로 망자들의 쉼터라고 주장하는 태도부터가 놈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증명한다.
교주들은 재차 확신했다.
템빨왕은 악마다.
소문만 무성했던 제2위 대악마 아모락트가 인간으로 위장해 사악한 술수와 무력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게 분명했다.
‘누가 그를 막을까.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검성, 데빌 슬레이어, 최초의 성검에게 선택 받았던 전 교황 등...
영웅이 됐어야 할 인물들이 악마의 앞잡이가 되었다.
참담한 현실이다.
이대로는 희망이 없다...
교주들은 진심으로 걱정했다.
신을 능멸하고 지옥을 옹호하는 악마와 그에 호응하는 무리를 통해서 세상의 멸망을 직감했다.
“이럴 때야말로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하오.”
인마대전 종전 후 수일이 지난 어느 날.
도미니언교와 쥬다르교가 회합을 가졌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 탓에 신을 의심하는 교인이 급격히 늘어났으니 이에 대응할 방법을 논의하고자 만든 자리였다.
“...”
한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의견을 나누는 두 교주를 바라보는 장로들의 눈빛에 연민이 가득했다.
특히 쥬다르교의 장로들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교주들은 눈치 채고 말았다.
‘장로들마저 악마의 농간에 넘어갔구나.’
깨달았을 땐 늦었다.
성기사들의 검이 목덜미에 드리워 있었다.
“반역이라. 그대들 또한 악마에게 현혹당하고 말았구려.”
“반역이 아닙니다. 반역이란 권력을 탐하는 것이니까요. 저희는 단지 진실을 똑바로 마주하고 싶을 뿐입니다.”
“신의를 저버린 시점부터 성직자는 성직자가 아니게 되오. 그대들의 명분은 도적의 투정과 다를 바 없는 셈이지. 애초에 명분부터가 잘못 됐소. 진실? 하잘것없는 소문을 진심으로 믿는 게요? 배워먹지 못한 우민들과 그대들이 다를 게 뭐요? 평생 신학을 연구하고 신께 기도해온 세월이 무색하구려.”
“정녕 하잘것없는 소문입니까? 두 분 교주께서도 교황으로 위장한 천사가 사람들을 해치려 했다는 소식을 접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야기는 당최 몇 번을 더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게요! 그건 템빨국이 퍼뜨린 대표적인 헛소문이라니까!”
“저희도 그리 믿고자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증인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레베카교 교인들이 소문이 진실임을 속속들이 증언하는 중입니다.”
“그건... 그들은 세뇌당한 게요.”
“증거가 있습니까?”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여신의 사자가 함부로 사람을 해칠 리 없잖소.”
“여신께서 인류를 위한다는 증거는요?”
“그대들도 알지 않소? 빛이 존재하는 것도, 세상이 존재하는 것도, 인류가 존재하는 것도 모두 여신의 덕이라는 사실이 증거요.”
“여신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을지언정 그것이 꼭 인간을 위해서라는 보장은 없잖습니까? 실제로 여신께서는 악마들의 침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했습니다.”
“그게 바로 시련이라는 게요. 여신께서 병든 자, 가난한 자를 일일이 돕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요. 우리의 삶이란 시련의 연속이며, 이는 즉 기회의 연속이라는 뜻이오. 시련을 극복한 자만이 아스가르드에 오를 자격을 얻게 되니까.”
“마물과 악마들에게 깃들었던 쥬다르 신의 가호 또한 시련이라는 겁니까?”
“그렇소. 시련이 클수록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 아스가르드에 오를 확률이 커지는 셈이니까. 템빨왕이 우리를 쉽게 돕는 이유가 거기에 있소. 본래 사악한 미혹일수록 달콤한 법. 그자는 우리의 시련을 쉽게 극복시켜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고 아스가르드에 오를 자격을 상실시킬 작정인 게요.”
“그간 천사들이 템빨신을 공격한 이유는 그럼 템빨신의 실체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고요?”
“그렇소. 그게 가장 명확한 증거지.”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온 템빨신이 어째서 악마라는 겁니까?”
“감히 신을 모욕했으니까.”
“...”
교주들의 반복되는 억지 주장이 장로들을 좌절시켰다.
어두운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하는 그들 중엔 플레이어도 소수 포함되어 있었다.
바뀐 시대를 입증하는 광경이다.
이젠 정말로 많은 플레이어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이 템빨단에게 협조적이었다.
그리드가 제시하는 길이 올바르다고 믿었으니까.
지존을 향한 막연한 믿음 따위가 아니다.
무력이나 권력을 의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여태껏 그리드가 밟아온 행보를 근거로 삼았을 뿐이다.
그가 세운 업적은 셀 수 없이 많으며 업적을 토대로 밝혀낸 정보는 하나 같이 신빙성이 높았다.
그 정보들을 이용해 매번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그리드의 행보를 응원하고 신뢰하는 건 당연했다.
“두 분을 구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교주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장로들이 등 뒤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들의 시선을 쫓은 교주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인물을 발견한 탓이다.
보라색 머리카락과 조화를 이루는 원색의 중갑을 무장한 사내.
“화합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전 교황 데미안이었다.
한때 여신을 찬양했던 입으로 새로운 신을 논하는 변절자다.
“마음이 무겁지만 화합을 방해하는 요소는 모조리 제거할 각오입니다. 당신들을 일일이 포용하기엔 지금의 세상이 녹록치 않으니까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당신! 명색이 교황이었던 자가 가짜 신의 앞잡이가 되어 망나니처럼 날뛰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교주들이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데미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크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정의감마저 엿보였다.
그는 당당했다.
변절자는 자신이 아닌 천상의 신들이니까.
아니, 변절자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신들은 처음부터 인간의 편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정황이 진실을 뒷받침한다. 끝까지 외면하는 저들이 비정상적인 거다. 뒤틀려있다. 괴물 같다. 진실을 받아들인 자들을 싸잡아 우민 취급했을 땐 귀를 의심했을 정도다.
“템빨신이야말로 유일한 진짜 신임을, 지옥에서라도 뒤늦게나마 깨닫기 바랍니다.”
데미안이 칼을 뽑았다.
숙청의 신호였다.
매번 중요한 순간마다 템빨국을 훼방 놓았던 삼신교의 주축들.
그들을 뿌리 뽑기 위해서 데미안은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교황시절 쌓아올린 덕망과 인맥을 총동원해 장로들과 꾸준히 접촉을 시도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온갖 견제를 받으며 위험을 겪었다. 대화가 통하질 않는 벽창호들 탓에 좌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끝내 해내고 이 자리에 당도했다.
삼신교 중에서도 가장 꽉 막힌 레베카교에서 교황을 재임했던 인물이 바로 데미안 아닌가.
그의 인내심과 성실함은 그리드와 비견되는 수준이므로 성과를 거둘 자격이 있었다.
최근 천사들과 신들이 연속적인 트롤링을 해주고 그리드가 지옥의 진실을 밝혀낸 덕이 컸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교주들이 참지 못하고 살기를 드러냈다.
빛의 망치를 떨어뜨려 성기사들의 머리를 부수고 데미안을 죽일 듯 노려봤다.
그들의 좌우로 새카만 법복을 무장한 기사들이 나타나 도열했다.
교주들이 평정심을 유지해온 비결이다.
템플기사단.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레베카교 최강의 무력집단이 두 교주를 호위하고 있었다.
사리엘의 복제품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주들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장로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시오. 템빨왕이 가짜 신이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를 저 변절자가 지니고 있으니.”
신성력의 부재.
성직자가 응당 지녀야할 힘이 데미안에겐 없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모든 템빨신교 교인이 그랬다.
삼신교 교인들이 그리드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드가 정녕 신이라면, 그를 섬기는 자들은 어째서 신성력이 없는 걸까.
의문을 새삼 되새긴 일부 장로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데미안! 변절자여! 그대가 교황으로 위명을 떨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여신의 배려 덕분이었음을 상기하라!”
스파아아아앗!!
두 교주의 곁을 맴돌던 빛의 망치가 하나로 합쳐졌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빛이 폭발하며 신전의 내부를 찬란하게 밝혔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현상이다.
장로들의 마음에 불안이 싹텄다. 뒤늦게 신벌을 걱정하며 빛을 외면했다.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데미안은 달랐다. 여전히 올곧은 눈동자로 빛을 마주했다.
“신성의 형태가 꼭 빛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꽈악.
검을 뽑아 쥐는 데미안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꿈틀거린다.
“물리.”
데미안은 떠올린다.
브라함의 위대한 마법으로도 쉽게 쓰러뜨리지 못한 가미긴을 순살시킨 그리드의 파괴력을.
“템빨신의 신성력은 물리력이다.”
궤변이다.
교주들이 콧방귀 뀌었다.
하나 된 그들의 신성은 이미 빛살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그대로 데미안의 가슴을 관통...하지 못하고,
“...!?”
데미안의 검에 베여 허망하게 흩어졌다.
템빨신의 가호이자 신성이다.
그리드가 데미안에게 만들어준 검에 귀속된 옵션이 마법을 베는 권능으로 화한 것이었다. 그 어떤 신성력보다 고절했다.
투웅!
데미안이 연마해온 보폭이 템빨신의 신화를 묘사한다.
그리드가 강화해온 신화가 데미안의 검무에 힘을 싣는다.
“연살극.”
그리드는 몇 차례나 증명해왔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적들을 템빨과 무력으로 베어왔다.
그를 섬기는 데미안에게도 증명할 의무가 있었다.
“크아아악...!”
템플러들을 돌파한 템빨러의 맹공이 교주들에게 치명상을 안겼다.
비명을 지른 교주들이 본인과 서로에게 힐을 연발했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템빨국이 삼신교에 대응할 때 가장 주요하게 작용하는 인물이 바로 데미안이다.
성직자들과 부딪칠 일이 많은 그의 검에 <치유 감소 효과> 옵션이 귀속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이 순간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치유 감소 효과는 정화를 통해 해제가 가능했지만,
서걱!
정화해봤자 다시 베이며 같은 일이 되풀이 될 뿐이다.
격렬한 사투 끝에.
[도미니언교와 쥬다르교의 교주가 사망하였습니다.]
숙청은 성공했다.
데미안의 덕망과 인맥이, 성실함이, 끝으로 템빨과 무력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최선의 결과였다.
장로들은 즉시 새로운 교주 후보를 선출했고 그들은 당연히 데미안과 템빨국에게 우호적인 인물들이었다. 한동안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릴 도미니언교와 쥬다르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줄 것이었다.
“고위 템플러는 단 한 명도 없었어.”
장로들과 여러 협약을 맺고 나온 데미안이 우려를 표했다.
신전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더군요. 이제 와서 레베카교의 부흥을 노리는 것 같진 않고... 수상하네요. 수색할 필요가 있어 보여요.”
템빨국에 귀화한 이후 이사벨은 의욕이 넘쳤다.
어떤 일이든 제 일처럼 나설 정도인데, 레베카의 딸로 활동하던 시절과 크게 달랐다.
데미안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살짝 부푼 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다.
“응, 하지만 이사벨쨩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어.”
데미안의 등 뒤로 긴 행렬이 이어졌다.
템빨신교 교인들이었다. 데미안이 추리고 추린 정예인데도 숫자가 족히 천을 넘었다.
교황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권한과 세력을 거머쥔 데미안의 활약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보름 후.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황제 바사라가 템빨국에 종속될 것을 선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