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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62화 (1,451/1,794)

템빨 73권 - 7화

하이젠 사하란.

멸망한 왕국의 핏줄인 그는 복수의 화신이었다.

대대로 조국을 핍박하고 급기야 멸망시킨 국가들을 징벌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역사상 최초의 제국이 탄생한 배경이다.

제국이란, 하이젠의 복수가 성공했음을 증명하는 상징에 가까웠다.

“만에 하나 내 후손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이 검으로 당신의 자격과 권리를 증명하고 직접 황위에 오르시오. 제국을 장기말로 휘둘러 염원을 이루시오. 반드시... 반드시 육신을 되찾기를 바라오.”

지크는 사하란의 최후를 회상했다.

황제가 된 이후 열정을 잃은 그는 타락이 아닌 소멸을 선택했다.

자신을 상징하는 검에 진원진기를 쏟아 붓고 영면을 맞이했다.

유언은 오직 지크를 위해서만 남겼다.

일생을 바쳐 세운 제국에 미련 따위 없다는 듯 사실상 지크에게 양도했다.

지크는, 사하란을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을 달성한 그가 제국을 버린 거라고 해석했다.

그의 후손들이 약속을 외면하고 잊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수백 년을 인내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지크는 사하란의 후손들을 연민했다

다만 나태의 저주에 찌들어 무뎌진 감정 탓에 실감하지도, 내색하지도 못했을 뿐이다.

그래, 감정이 무뎌졌었다.

그러므로 알아보지 못했다.

사하란의 눈빛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

지크가 코크로 섬에서 급히 귀환한 이유는 사하란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하란의 검에 담긴 적기의 근원이 같은 근원에 호응했으므로 자연히 느껴졌다.

지크는 분노했다.

사하란과의 거래 내용을 떠올렸다.

“나를 황제로 만들어주시오. 대신 나는 그대의 부활을 돕겠소.”

지크는 약속을 지켰다.

반면 사하란은 약속을 후대에 떠맡겼다.

당시 환경에선 약속을 지키는 게 불가능했던 탓이다.

지크는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하란을 순순히 떠나보냈다.

한데 이제 와서.

사하란은 돌아왔다.

나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한 주제에 스스로의 부활을 안배했었단 뜻이 됐다.

“...최근에야 비로소 부활했다. 저주마저 떨쳐냈지.”

서서히 강림하는 지크와 사하란의 눈높이가 나란히 맞춰졌다.

함께 전장을 누볐을 때와 같았다.

지크의 분노는 어느새 눈 녹듯 사라졌다.

사하란의 젊은 모습을 보고 오해를 푼 것이다.

‘부활이 아니다. 적기의 흐름이 기이한 이유를 알겠군.’

눈앞의 사하란은 망령의 재림이 아닌, 과거의 존재였다.

이제 막 제위에 올랐을 무렵으로 추정됐다.

‘이때의 사하란은 이미 내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했었나.’

한데도 나를 곁에 뒀던 건가.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단 말인가.

과거엔 몰랐던 사실들이 보인다...

“무뎌졌던 감정 또한 온전히 되찾았다.”

설명하는 지크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를 느낀 사하란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눈물을 흘린 채, 지크의 부활을 제 일처럼 기뻐했다.

지크는 깨달았다.

사하란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열정을 잃어서가 아니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언제라도 나를 도울 수 있게끔 자신의 힘을 온전히 보존할 방법을 강구했던 것일 뿐이다.

“...그대 또한 나의 벗이었구나.”

지크의 그 말이.

“윽...”

사하란의 말문을 완전히 닫히게 만들었다.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 못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모습이 불꽃처럼 강렬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순수했다.

“고맙다.”

지크는 그저 감사를 건넸다.

그대의 후손들은 약속을 어겼다...

이와 같은 진실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

단순히 사하란을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가 변치 않기를 바라서였다.

만약 진실을 알린다면.

사하란은 절대로 목숨을 끊지 않을 테니까.

직접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백 년의 세월을 인내할 것이 분명하니까.

과거가 크게 변할 거란 의미다.

그에 영향을 받을 현재가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므로 지크는 진실을 덮는다.

쏴아아아...

라인하르트 전역을 적셨던 사하란의 적기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꽃잎이 나부끼는 듯했다.

쏟아지는 꽃잎 속에서, 사하란의 시선은 지크의 검으로 향했다.

자신의 힘을 고스란히 품은 그 검을 토대로 자신의 운명을 눈치 챘다.

‘역시 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는가.’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다.

위대한 정복자.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사하란은 스스로에게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자결해서라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미래의 자신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시대의 내 의지가 나를 밀어내는군. 이만 떠나야할 듯하오.”

“...잘 가라.”

“음.”

고개를 끄덕인 사하란이 지크에게 속삭였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약속을 지킨 내 후손들의 친절을 봐서라도 제국을 지켜줬으면 하오. 저 고강한 인신이 무력으로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눈치인데 나로써도 감당을 못하겠구려.”

“무력으로 취하는 게 아니다.”

“...?”

“제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템빨신께 종속되려는 건 순전히 자유의지다. 강압 따위 없어.”

“허...”

사하란이 귀를 의심했다.

지크는 칠악성의 일익이다.

천상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던 인물 중 하나다.

신을 불신하며 증오하므로, 제국을 건국하며 여신의 축복을 구할 당시 눈치를 봐야했을 정도다.

그렇다.

지크는 태초신 중 하나이자 창조주인 레베카 여신마저 증오했다.

한데 고작 인신에게 호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대가 신을 존중하며 높이 평가하는 일이 있을 줄이야...”

“곡해하지 마라. 나는 감히 저분을 평가하지 못한다.”

“...도대체 뭐지? 저자가 뭐기에 그대가 그렇게까지...?”

“나의 유일한 신이시다.”

“...!”

파직! 파지지직!!

당황하는 사하란의 등 뒤로 마법진이 발생하며 포털이 열렸다.

과거로 연결되는, 기이하게 일그러진 포털이었다.

현재의 시간선이 허용하지 않는 존재. 즉, 사하란을 대상으로 강제력을 행사했다.

포털에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사하란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못 박혔다.

눈빛이 온화하게 변해있었다.

“고맙소.”

사하란은 지크의 태도를 통해서 눈치 챈 것이다.

지크를 부활시킨 존재가 누구인지.

위대한 정복자는 영민했다.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이곳에서 겪은 일들은 모조리 잊게 되겠지만... 잠시나마 기쁠 수 있어서 좋았소. 내 ㅂ...”

내 벗을 잘 부탁하오.

안타깝게도 사하란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확실하게 전달됐다.

그의 의지가 흔적으로 남은 까닭이다.

[칭호 <시조의 인정을 받은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시조의 인정을 받은 자>

제국의 시조 하이젠 사하란이 당신을 인정하고 응원합니다.

★대륙 곳곳에 묻혀있는 사하란 제국의 유산을 손쉽게 발견합니다.

★사하란 제국령에서 광산 등의 자원을 발견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사하란 제국 출신 황족과 귀족들에게 위엄 스탯이 2배로 적용됩니다.

“...”

플레이어가 발전하기 위해선 모험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한 자리에 안주해서는 새로운 만남이나 퀘스트 등을 얻기 힘든 탓이다.

하지만 최근 그리드에겐 새로운 인연과 이야기가 알아서 찾아왔다.

비반, 다크엘프 왕, 반용족 로드, 하이젠 사하란이 대표적인 예다.

권력과 명성의 힘이었다.

이제 많은 이야기가 그리드를 중심으로 흐른다.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노력에 대한 보상이 뒤늦게 밀려오는 셈이었다.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술 한 잔 합시다.”

“영광입니다.”

유일한 신.

지크에게 있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새삼 깨달은 그리드는 무척 기뻤다. 지크에게 고맙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건 지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고 있었다.

‘아니... 잠시 뒤에 헬가오 레이드가 시작될 텐데...’

라우엘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사실이지만, 라우엘이 가장 우선시하는 건 템빨국이 아니라 그리드다. 그가 템빨국을 위해 희생하는 모든 것들은 결과적으로 그리드를 위한 발판이었으니까.

그의 입장에선 그리드의 흥을 깨기 힘든 노릇이었다...

***

코크로 섬 던전이 인파로 가득 찼다.

수용 인원을 한계까지 채웠다.

잠시 후 등장할 헬가오 레이드를 위해 모인 인파다.

만약 신화급 아이템이 떨어져도 푼돈밖에 안 될 수준이다.

템빨국은 헬가오가 드롭하는 아이템을 참가자 전원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이 인원이 한 대씩만 때려도 헬가오 그냥 녹겠는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표정에 긴장감은 없다.

인마대전을 겪고 성장하며 덩달아 자신감도 오른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하이랭커들은 긴장으로 잔뜩 굳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템빨단이 배부한 헬가오 공략을 숙지하는 과정에서 난이도를 가늠한 여파다.

‘뮐러에게 육신을 잃고 봉인 된 놈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한 패턴을 자랑한다. 봉인이 약해지고 있나? 초창기 소문보다 훨씬 더 강해진 느낌인데.’

하이랭커들이 심호흡하며 긴장을 완화시켰다.

그들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피아로, 브라함, 지크를 비롯한 인마대전의 영웅들과 템빨단 상위 전력이 레이드를 돕는다고 했으니까.

그들의 지시를 잘 따르면 적어도 죽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 죽지만 않으면 된다.’

헬가오 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의 첫 번째 목적은 지옥 페널티를 없애는 칭호를 얻는 거다.

레이드 도중에 사망하면 칭호를 얻을 기회를 늦추는 셈이니 치명적이다.

하루라도 빨리 지옥에서 사냥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렇다.

플레이어들은 지옥 출정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 그리고 인마대전의 복수.

의욕을 품을 요소가 워낙 많았다.

“1분 뒤에 시작이다!!”

반트너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헬가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될 공습에 대비해 광역 실드를 전개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졌다.

홀로 수천 개의 실드를 세운 것인데 수호기사의 정점다웠다.

스탯을 전부 근력에 투자했었다는 둥, 반트너를 음해하는 소문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역시 헛소문에 불과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뭐!? 지크가 사라졌다고?”

1분 뒤 시작이라는 반트너의 외침 탓에 술렁임이 잦아들은 상태다.

게다가 반트너의 목청이 워낙 컸다.

동료에게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가 던전 구석구석까지 메아리쳤다.

사람들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지크가 없다는데?”

“지크가 템빨국에서 그리드랑 브라함 다음으로 강하지 않나?”

“브라함보다 세 보이던데...”

“뭐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혼란이 들끓는 그때.

“괜찮아. 당신들을 지키는 건 우리만으로 충분하니까.”

지슈카가 나섰다.

주작의 환영을 등에 업은 채다.

인마대전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랭커 중 하나.

곧 등장한 헬가오의 광역 공격이 반트너의 실드 일부를 꿰뚫었지만 그녀의 화살에 요격당해 소멸한다.

폰이 이끄는 오십의 기마대가 화염의 장벽을 돌파하며 헬가오의 이목을 끌었고 덕분에 레이드 참가자들은 빈틈을 엿봤다. 헬가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브라함과 피아로는 크게 나서지도 않았다.

종종 공격의 여파에 휩쓸릴 것 같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실드나 나무를 세워서 지켜주는 게 고작이었다.

템빨단이 예측한 것 이상으로 상황이 여유로웠다.

헬가오가 약해진 게 아니라 인마대전이 일으킨 변화였다.

전쟁 전과 비교해서 전쟁 후의 템빨단이 몇 배는 강했다.

-여기가 시장 바닥인가 뭔가 하는 거기냐...!!

헬가오의 분노에 찬 음성이 던전을 뒤흔들었다.

이젠 막말로 개나 소나 덤비는 것이다...

동네북이 된 심정이라 원통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뮐러는 희미해졌다.

자신의 육신을 소멸시킨 뮐러보다 자신을 이 지경까지 추락시킨 그리드가 가장 원망스러웠다.

[헬가오 레이드에 성공하였습니다.]

“우와아아아아!!”

수십 분의 사투 끝에 헬가오를 패퇴시킨 레이드 참가자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했다.

사망자는 0.

기적 같은 성과가 각국 커뮤니티에 빠르게 전파됐다.

플레이어의 지옥 침략이 가속화 될 거라는 전망이 잇따랐다.

같은 시각.

바사라는 시조께서 그리드를 인정하고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무척 기뻐하며 귀족들과 다시 합병을 논의했는데 반발이 적었다.

사실상 반발이 나올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이 템빨국과의 합병에 긍정적이었고, 부정적인 소수는 카일에게 협박을 받았으니까.

카일이 협박을 일삼고 다니는 이면엔 그리드에게 잘 보이려는 욕구가 숨어있었다. 출세욕이 아니라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한편...

“더 이상 좌시해선 안 되겠어.”

템빨신교 교주 데미안이 출정을 준비했다.

세상 곳곳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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