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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61화 (1,450/1,794)

템빨 73권 - 6화

황족의 피는 불멸한다.

방계에서 방계로, 또 다시 방계로 갈라져 나가 희석 될지언정 적기(赤氣)를 잃지 않는다.

제국의 시조 사하란이 신적 존재로 숭배되는 이유 중 하나다.

천년제국을 건설하고 불변의 혈통을 남긴 그를 제국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기록한다.

바로 건국신화다.

“사하란... 하이젠 사하란?”

라우엘이 두 눈을 의심했다.

예스러운 의복을 입은 장신의 사내.

라우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이 몹시 낯익었다.

그림으로, 동상으로, 또는 구전으로 숱하게 보고 들은 얼굴인 탓이다.

경악하는 라우엘의 뇌리로 황실의 ‘소환의식’이 스쳤다.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주술로, 주술의 발동 권한은 오직 황제만 갖는다.

바사라는 그것이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해줄 최후의 수단이라고 설명했었다.

“감히 짐의 이름을 입에 담는가. 꽤 먼 훗날의 미래라고 하더니 법도가 무너졌구나.”

마지막 의심마저 걷힌다.

공작들이 눈치를 보내기도 전에 라우엘은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위대한 제국의 시조를 뵙습니다.”

“제국의 위대한 시조겠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사하란의 붉은 장발이 흩날렸다.

마치 화염이 너울거리는 듯했다.

강렬한 색채가 세월의 흐름을 실감시켰다.

저 붉은 머리카락은, 작금의 황족이 갖지 못한 색이니까.

“부활...하신 겁니까?”

라우엘은 무척 많은 의문을 느꼈다.

여러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짚었다.

창가로 다가선 사하란이 피식 웃었다.

“짐에게 질문이라. 그대는 벌써 3번의 죄를 범했구나.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이 함께 오지 않아 다행이다. 그대를 즉시 참하겠다며 난동을 부렸을 테니. 이곳이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르단 사실에 그대는 감사해야할 것이다.”

“...”

라우엘의 눈가가 경련했다.

사하란의 발언을 토대로 눈치 챈 것이다.

그가 뱉는 숨결이 환상이 아님을.

“눈치가 빠르구나. 그래, 짐은 부활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아는 역사에서 짐은 이미 죽었다지만 짐에겐 그 역사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이니까.”

소환의식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대들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짐은 과거에서 온 사람이 될 테지.”

사하란의 시선이 창밖에 못 박혔다.

“몰락한 황도와 달리 이곳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구나.”

“폐하...! 타이탄이 그리 된 것은 순전히 전쟁 탓으로...!”

모르이즈 공작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인마대전 전까지만 해도 타이탄은 여전히 대륙 최대의 도시였다.

당신의 후손들은 제국을 잘 번성시켜왔다.

그리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그렌할 공작에 의해서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그렌할은 핑계를 댈 면목이 없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제국은 템빨국과의 합병을 논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몰락했다는 시조의 평가에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황자들의 한심한 모습을 볼 때면 생각하곤 했다. 설령 짐이 대륙을 일통한다 한들 제국이 영원할 수는 없겠노라고. 위대한 것은 짐이지 제국이 아니니까. 하지만 정작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사하란이 상석에 앉았다.

허락도, 양해도 구하지 않는 모습이 몹시 자연스러웠다.

라우엘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하이젠 사하란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다. 공작들이 그런 것처럼, 라우엘 또한 그를 마땅히 존중해주었다.

공손히 선 라우엘에게 사하란이 턱짓했다.

“앉거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당대 황제라는 아이가 말하더구나. 위기에 빠진 제국을 템빨국이라는 나라가 도왔노라고.”

“제국을 비롯한 연합국가 전부가 힘을 합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겸손은 됐다. 전후사정은 모두 파악하고 찾아온 것이니. 짐은 단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제국보다 훌륭한 국가는 어떤 형태일지. 한데... 꽤나 실망이구나.”

사하란의 눈빛이 도발적으로 변했다.

“국가에 중심이 없다.”

“...”

“그대 나라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무척 고강하고, 그대의 눈치가 하늘을 찔러 제법 머리를 잘 쓰겠구나 싶다만 그걸로 끝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여러 영토를 둘러보았으나 나라를 지탱할 정도로 독보적인 실력자가 없다. 저 두 매국노보다 나은 자가 없을 지경인데 당대의 제국은 무엇을 근거로 그대의 국가에 흡수되길 바라는 걸까. 돈인가?”

공작들을 매국노로 지목하는 사하란의 눈매가 날카롭다.

“제국이 영원하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소수의 매국노에 의해 팔려나가는 꼴을 좌시하진 못하겠구나. 짐은 운명마저 느끼는 중이다. 짐이 하필 이 시대에 소환된 것은,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제국을 바로잡아 주길 바라는 후손들의 염원이 모여서 이룬 기적이 아닐까 하고.”

라우엘이 공작들을 바라보았다.

이 양반이 왜 아무 것도 모르는 거냐며 책망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예견할 걸까.

그렌할 공작이 슬그머니 쪽지를 건네 왔다.

사실 저희는 바사라 폐하의 소환의식이 실패한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발동까지 시간차가 존재하더군요.

그걸 모르고 템빨국과 합병을 논의하고 있을 때 시조께서 찾아오신 겁니다.

그때부터 저희를 매국노라고 확신하신지라 저희가 어떤 말을 해도 귀담아 듣지 않으셨습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경위가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제국을 집어삼키고 싶은가? 하면 짐의 폭력을 견뎌라. 만약 견디지 못하면 오늘 이 도시는 멸망할 것이다.”

사하란이 검파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라우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유혈 사태를 피하기 힘들 것 같아서였다.

‘존중해 주고 싶은 상대였는데...’

아무래도 몇 대 맞으셔야겠습니다...

사하란을 바라보는 라우엘의 표정이 씁쓸했다.

***

템빨국의 주력은 현재 갈구노스의 사원, 카오스 산맥, 지옥, 그리고 코크로 섬에 흩어져 있다.

대부분의 인원이 성장에 초점을 맞춘 채 활동했고, 브라함과 지크 같은 초월적 존재들은 헬가오 레이드의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지원을 나간 상태다.

“사하란?”

그리드의 대장간.

급히 달려온 라우엘의 설명이 그리드를 흥분시켰다.

“제국의 시조가 타임머신을 타고 찾아왔단 말이지?”

“대충... 그렇습니다.”

“제국이 템빨국에 흡수되는 걸 원치 않는 거고?”

“네, 자존심의 문제겠죠.”

“이해해. 내가 그였어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

미래의 템빨국을 방문했는데 후손이란 놈들이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흡수되자는 말을 지껄이고 있다면... 그리드라도 분노했을 것이다. 당연히 막고 싶을 터였다.

‘일단 어서 만나보고 싶군.’

그리드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사하란은 서대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무려 최초의 제국을 세운 인물이니.

그를 만남에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싶었다.

하여 진상 받은 의복 중 하나를 골라 입으려고 했는데...

“그대가 대리 검투사인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사하란이 불쑥 찾아왔다.

그리드가 왕이라곤 상상도 못하는 눈치였다.

템빨왕이 대장장이 출신이라는 말도 한 귀로 흘렸다는 의미다.

당연하다.

사하란은 자신과 동행한 공작들을 전혀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우엘이 진즉에 그들을 매수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모의한 걸 테지.

짐이 벌 하리라.

“신격...? 그렇군. 믿는 구석이 있었어.”

그리드를 관찰하던 사하란이 뒤늦게 눈치 채고 말했다.

“인신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나라라. 수준에 비해 강성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사하란은 오래 전 과거에서 왔다.

그가 사는 시대의 대륙엔 훨씬 더 많은 나라와 소수민족이 존재했고 그들 중 일부가 인신을 섬겼다.

효율에 의해서다.

아스가르드에 머무는 신들과 달리 인신은 곁에 실체하므로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의 템빨국처럼 말이다.

“미래가 없는 국가다.”

사하란이 다짜고짜 평가했다.

그렌할과 모르이즈에게 설명하는 말투였다.

“인신은 천상의 신들과 다르다. 물론 인간을 초월하는 요소를 지녔다만 전능하지 못해. 인간에게 위협받을 정도로 나약하며,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한들 언젠간 결국 신벌을 받고 멸망하게 마련이다. 제국이 이 나라에 흡수됐다간 함께 신벌의 대상이 될 테지.”

사하란은 수많은 국가와 소수민족을 정벌하여 제국을 세운 인물이다.

그들의 수호신과 싸우고, 이긴 경험이 숱하게 많다는 의미다.

최초엔 지크프렉터라는 전우의 힘에 크게 의지했지만 어느새 성장하여 혼자서도 인신이 두렵지 않았다.

“오라. 이번 사태의 원흉인 그대를 제거하여 어리석은 후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느니라.”

통보한 사하란이 먼저 공터로 나갔다.

요새처럼 커다란 용광로를 등지고 서서 검을 뽑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사하란의 검.’

지크가 쓰는 것과 같은 무기다.

다만 검에선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치에 맞았다.

하이젠 사하란이 죽음을 불사하고 검에 적기를 주입한 것은 말년에나 생긴 사건이니까.

‘과연 과거에서 온 존재가 맞구나.’

실감하며 사하란을 따라나선 그리드의 몸을 온갖 신물이 휘감는다.

여태껏 그리드가 만들어온 방어구들이다.

유일하게 갑옷만 칸의 작품이었다.

“음...”

그리드의 무장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한 사하란이 침음했다.

솔직히 잠시 위축됐을 정도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현재 템빨국의 평가가 필요 이상으로 높은 이유는 순전히 저 인신 때문이니까.

저놈만 없애면 질서가 바로잡힌다는 뜻이다.

“오라.”

후우, 호흡을 정돈하는 사하란의 몸에서 붉은 기파가 피어올랐다.

적기.

개인의 역량과 성향에 따라서 다른 양상을 보이는 힘이지만 만물과 호응한다는 맥락은 같다.

심지어 미래, 과거와 호응하여 과거의 인물을 미래로 현현시킨 그 절대적인 힘의 ‘근원’이 라인하르트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어쩌면 현재의 사하란은 아스가르드에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드는 생각했다.

사하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죽어선 신화가 된 존재.

적어도 제국신민들은 그를 오랫동안 신적 존재로 숭배해왔다.

아스가르드에 머무는 신 중 하나가 됐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천사가 됐을 확률이 훨씬 더 높지만.’

아스가르드의 신들까지 사하란을 존중했을 거란 보장은 없다.

단순히 천사로 만들어서 부려먹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씁쓸한 일이다.

인간이 존중 받지 못하는 세계... 역시 이 세계는 바로잡아야만 한다.

“대화를 나누려면 일단 칼을 섞어야 할 분위기이니.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리드가 구젤의 도를 뽑았다.

선수를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초를 전개한 후 연의 검무를 췄다.

“...!”

굵은 눈썹을 치켜 올린 사하란이 즉시 대응에 나섰다.

급히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검기의 세례를 요격했다.

그러다가 상처를 무릅쓰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무형의 기파를 느낀 까닭이다.

암중검의 위력이다.

그리드가 공격할 때 30퍼센트 확률로 발생하는 추가 공격.

시야의 사각에서부터 솟구치는 그 사기적인 스킬이 사하란의 움직임을 강제하고 있었다.

“...!?”

그리드와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한 사하란이 반격을 시도하기 직전에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서늘한 예기가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빈손을 휘두르는 그리드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서걱!

은신한 구젤의 도가 사하란의 옷깃을 스친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드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단하십니다.”

구젤의 도의 은신 타이밍은 그리드 본인도 잡지 못한다.

상대하는 입장에선 갑자기 사라지는 셈이 되는데 그걸 반응한 것이다.

암중검을 피한 것도 그렇고, 초월경의 고수라고 봐야 함이 옳았다.

사하란은 과연 대단한 실력자였다.

“...합병하는 편이 좋겠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리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하란이 검을 거뒀다.

패배를 시인하는 태도였다.

그러다 문득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진 게 얼마나 분했으면...?’

라우엘과 공작들이 시조의 승부욕에 당황하는 그때.

“다행... 다행이오. 나의 후손들이 약속을 지켰나보구려.”

사하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육체를 되찾은 지크의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못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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