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60화 (1,449/1,794)

템빨 73권 - 5화

“워프게이트에 쓰이는 ‘델라’는 본래 단위를 뜻합니다. 텔레포트 마법이 가동할 때 발생하는 마나의 운동에너지에 표준 중력값을 더하여 육체 전이율을 역산한 뒤...”

그리드는 장장 10분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새카만 눈동자를 바들바들 떨면서다.

파일볼프가 하는 말을 입에 고스란히 옮겨 뱉는 중인데, 어느 시점부터 알 수 없는 단어와 개념이 속출하기 시작하자 크게 당황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혼란을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멋지십니다. 교수님 같으세요. 안경 빌려드릴까요?

라우엘이 귓속말로 연신 응원한다.

파일볼프의 도움을 받고 있단 사실을 뻔히 알고도 저러는 게 꼭 놀리는 것 같지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꼴을 보아 진심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그리드는 제발 조용하라고 면박주고 싶었다.

파일볼프의 말을 그대로 옮겨 담기도 벅찬 마당에 라우엘의 사운드까지 겹치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15델라의 에너지를 확보하면 워프게이트가 시공을 초월한다는 이론이 완성됩니다.”

난국 속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한 그리드가 간신히 설명을 끝마쳤다.

신화급 아이템을 만들었을 때와 비견되는 보람을 느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고된 일이었다.

단순히 ‘말’을 옮겼을 뿐인데도.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다가 무덤을 판 심정이랄까.

도중에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짝짝짝...!!

쭉 경청하던 스틱세이가 열렬히 박수 쳤다.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델라를 자원으로 대입시킨 시점부터 여러 의문이 풀렸습니다. 대단하군요. 흠 잡을 부분 없이 완벽한 이론입니다. 세계의 진실을 밝혀내신 경험 덕분인지 세계를 이해하는 제반 지식 자체가 다른 느낌이랄까요. 전하야말로 대현자라고 불려야 옳습니다.”

고대에 멸망한 거인족이 살아 돌아온 착각마저 든다...

스틱세이의 총평이었다.

‘살아서 돌아온 건 아니지만...’

아무튼 돌아온 건 맞다.

지혜로운 거인족.

오래 전 소실된 고대의 지식을 섭렵한 그들이 그리드에게 협력하는 중이었다.

둘은 탑에서, 한 명은 곁에서.

돈, 경험, 권력으로는 사지 못할 인맥이다.

순전히 실력으로만 쟁취할 수 있는 인맥이었다.

“앞으로가 난관이군요. 15델라의 에너지를 발생시키기 위해선 마나 손실률 0.17퍼센트 이하의 물질을 최소 9천 7백만 톤 이상 확보한 뒤 그에 상응하는 마나를 주입해야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마나야 대륙 모든 마법사를 소집해서라도 수급한다 해도 재료는 어디서 구해야 할지...”

[파일볼프가 하이엘프의 유전자가 우수하긴 우수하다며 흐뭇해합니다.]

파일볼프가 다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스틱세이가 순식간에 만든 계산식에 첨언하여 실현 가능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전달하려던 그리드가 결국 포기했다.

장난은 여기까지라는 의미다.

“스틱세이, 실은...”

그리드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파일볼프의 존재를 밝혔다.

“다행입니다.”

스틱세이는 실망하지 않고 도리어 안도했다.

“늘 만인을 위해 싸우시는 전하께 학문까지 갈고닦을 여력이 있을까 염려했는데 이제 좀 안심입니다.”

미식룡의 저주에 죽어가면서도 번헨 열도를 수호해야한다는 사명에 얽매였던 스틱세이다.

그를 해방시킨 은인이 바로 그리드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틱세이가 삶의 가치를 실감할수록 그리드의 은혜는 커져만 갔다.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스틱세이...”

호감이 뚝뚝 묻어나는 스틱세이의 태도가 그리드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고,

[대현자 ‘스틱세이’와 유대를 맺습니다.]

시스템이 반응했다.

꼭 함께 전장을 누빌 필요는 없다.

어떤 극적인 사건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히 결속을 맺기도 한다.

그게 친구다.

이런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그리드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칸.’

처음으로 사귄 벗.

요즘 따라 그가 너무 그립고 걱정된다.

당연히 천국에 올라 가족과 재회했을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옥과 천상의 실체를 알게 됐다.

지금쯤 칸은 윤회의 강을 떠돌고 있을 터였다.

이전의 삶을 망각하지 못하고, 새로운 삶으로 전생하지 못한 채.

고통에 떨고 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리드는 지금 당장이라도 지옥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된다.

지옥은 바알의 영토다.

지상에서, 심지어 작은 파편 따위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강을 논했던 놈을 지옥에서 감당할 자신감이 아직은 없었다.

‘시간이 필요해.’

일단 라우엘의 말대로 ‘수순’을 밟아야 한다.

플레이어들이 지옥에서 활개 칠 무렵.

즉, 악마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분산시킨 뒤에야 움직임이 옳았다.

그동안 그리드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계획이다.

새로운 권능 덕분에 전력을 강화할 수단도 생겼으니 시간은 그리드의 편이다.

최대한 공을 들여 만전을 기하는 게 그리드가 우선적으로 할 일이었다.

“스틱세이, 당신께 도움이 될 만한 로봇... 아니,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리드의 머리 위 상공엔 늘 검은 구체가 위성처럼 맴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부피를 키워온 탐욕 덩어리다.

그 일부를, 그리드는 마장기 제작에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변신이 아닌 제작이다.

파일볼프의 육체가 되어줄 것이다.

***

그리드 곁을 맴도는 영혼들의 소망은 각자 달랐다.

우선 쯔단은 자유를 원했다.

더 이상의 고통은 싫다며, 완전한 안식을 원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망자에게 안식이란 망각이다.

윤회의 강이 꼭 필요하단 의미였다.

강이 악마들의 손아귀에 놓인 이상 쯔단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하여 그리드는 제안했다.

당분간 크리스의 곁을 지켜줄 수 없겠느냐고.

의외로 쯔단은 흔쾌히 수락했다.

자신의 후계자에게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

윤회의 강을 해방시키기 위해선 크리스의 힘이 필요하단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했다.

하여 쯔단은 그리드의 곁을 떠났다.

새로운 대검의 에고가 되어 크리스의 품에 들어갔다.

파장은 엄청났다.

크리스의 성장속도가 인마대전 시기와 비슷한 궤도에 올랐을 정도니까.

다만 아직은 소통에 문제가 있는 건지, 간헐적으로 스탭이 꼬이는 부작용을 보여주곤 했다. 혼자서 발이 걸려 넘어지는 수준이라 괴현상에 가까웠다.

그리드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고 보았다.

한편 학센은 학구열에 불탔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탄생한 마법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브라함의 강화 마법에 큰 흥미를 보였다.

가미긴의 노예가 되어서 고통 받은 건 쯔단과 같았지만 안식을 원치 않았다. 브라함과 교류하기를 바랐다.

“지랄하는군.”

브라함의 반응은 냉담했다.

과거의 망령 따위가 자신의 마법을 탐낸다는 사실을 대놓고 불쾌하게 여겼다.

“한낱 귀신 주제에 마법에 집착하는 꼴이 우습다. 써먹지도 못할 것을. 애초에 사람이었다고 해도 너 따위에게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있을 거라고 보는 건가?”

브라함은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리드는 너무 심한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한편으론 브라함의 심정도 이해가 됐다.

수백 년 동안 힘겹게 쌓은 지식을 탐내는 사람(?)을 어찌 좋게 보겠나.

학센 또한 이해하는 부분이었다.

학센은 상처 받지 않았다. 브라함의 폭언을 감내했다.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학센 본인도 잘 안다고 하네요. 브라함 당신의 분노와 경멸을 충분히 이해한대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마법이 너무 훌륭해서 염치불구하고 부탁해볼 수밖에 없었대요. 미안하대요.”

“흥.”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콧방귀 뀌는 브라함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폭언은 하지 않았다.

같은 마법사로써 학센의 학구열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언젠가 두 사람도 교감하게 되지 않을까.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겠느냐며 학센은 희망을 품습니다. 브라함의 생일과 별자리, 신장과 체중, 취향과 취미 등이 궁금한 눈치입니다.]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는 학센을 보면서 그리드는 생각했다.

아무튼.

“멋지군. 금속과의 일체감. 상상해온 것보다 환상적이다. 후욱, 후욱, 후욱...”

전설의 영혼 중 소망을 이룬 건 파일볼프가 유일했다.

마장기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많이 개량되긴 했으나 레이더스로군. 내가 죽을 무렵에 한창 개발 중이던 신형이지. 끝내 타보지 못하고 죽어서 원통했었는데 세월을 초월해 하나가 되어 한을 푸는구나. 후욱, 후욱...”

새카만 판금.

즉 탐욕을 재료로 삼은 본인의 몸체를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는 파일볼프의 모습은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애초에 왜 자꾸 숨을 헐떡이는 걸까.

호흡기관 따위 없는데.

“제가 개량을 하긴 했지만 그거 요즘엔 구형으로 분류됩니다.”

“구형이라. 클래식한 매력은 불변하는 법. 나의 레이더스가 완숙해졌군. 후욱, 후욱... 아니 그보다 자네가 개량한 거라고? 자네는 내 생각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군. 말 그대로 신이랄까. 후욱, 후욱...”

“...”

그리드가 잠자코 등을 돌렸다.

불안한 표정을 짓는 스틱세이에게 엄지를 세워주면서다.

파일볼프와 단 둘이 남게 된 스틱세이는 한동안 고통 받아야만 했다.

본인의 몸을 어루만지며 자꾸만 거친 숨결을 토하는 결전병기의 모습은... 스틱세이가 거인족에게 품어온 환상을 산산조각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

지옥에서 거울 악마 레이드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크라우젤과 페이커가 공통되게 증언하길, 거울 악마는 여태껏 상대해온 적들 중에서 가장 끈질긴 놈이라 하였다.

빛을 반사하는 수정을 거울삼아 숨고, 도망치길 반복하는데 크리스탈 성 내부에서 무려 열흘간의 추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연합군의 주요 인사를 숱하게 암살한 놈다웠다.

기회가 왔을 때 처단에 성공한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희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레라지에가 고비를 넘겼다.

아직 힘은 회복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급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다만 그녀가 인마대전 기간 동안 점령한 지옥들을 모조리 다시 빼앗기고 말았지만 그건 예정 된 수순에 불과했다.

애초에 지키지 못할 영토였다. 당장 필요치도 않았다.

아쉬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크리스탈 성에서 가까운 지역부터 차근차근 점령해나가면 된다.’

플레이어들의 지옥 침략이 일상화되는 시점.

즉, 페널티가 완화되고 워프게이트가 완공되는 시점부터 화두에 올릴 부분이다.

그렇다.

라우엘의 계획들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헬가오 레이드에 참가했고 스틱세이와 파일볼프는 여태껏 없던 초대형 워프게이트의 건설에 착수한 상태였다.

미소 짓는 라우엘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제국에서 사신단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올 것이 왔다.

기쁜 마음으로 사신을 맞이한 라우엘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대가 이 작은 나라의 왕인가? 소문보다 못한데.”

사신단 대표의 얼굴과 태도가 낯설었다.

제국의 공작들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라우엘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함께 온 대표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사하란...?”

사신단 대표의 이름이 라우엘에게 혼란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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