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3권 - 4화
그리드가 요즘 저기압이다.
본인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메르세데스는 쉽게 눈치 챘다.
혜안을 쓸 필요도 없이 당연히 알아봤다.
평소 습관들에 조금씩 거친 감정이 묻어났으니까.
‘혹시 내 방을 보신 걸까? 위장 벽지를 잘 덧씌워놨는데... 주군의 통찰력 앞에선 어림도 없구나. 날카로운 안목도 멋져...’
노심초사하던 메르세데스의 의식이 멋대로 범람했다.
물론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괜히 전설의 기사가 아닌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상상한 걸까.
메르세데스의 귓불이 급기야 붉어진 무렵에 그리드는 결심했다.
‘이 정도로 타협하자.’
지난 3일.
그리드는 구젤의 도의 옵션 갱신에 집중했다.
갓 핸드와 소환수를 활용한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서 그나마 망정이지,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3일 내내 옵션 돌리느라 아무것도 못했을 거다.
‘3억을 넘게 태웠네.’
18억을 초과했던 기도 스탯이 15억대로 줄었다.
대가로 얻은 결과는 ‘치명타 피해량 280퍼센트 상승’과 ‘낮은 확률로 무기 은신’ 옵션이다.
구젤의 도는 말 그대로 핵병기였다.
한 대 맞으면 골로 가기 십상인 수준이다.
심지어 확률적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대응이 불가능한 무기라는 의미다.
시간, 자본, 심력을 투자한 보람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못내 아쉬웠다.
2번 옵션 슬롯을 50번도 채 안 돌렸을 때 ‘보통 확률로 무기 은신’ 옵션이 떴던 까닭이다.
쉽게 나오는 옵션인 줄 알고 갱신했는데 이후 수만 번을 돌리는 동안 다시 보지 못했다. 그나마 ‘낮은 확률’로 타협을 봐야만 했다.
속 터질 일이었다.
‘우선 다른 템들에 옵션을 부여하고... 구젤의 도는 나중에 다시 더 좋은 옵션을 노려보자.’
일단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3일 내내 무기 옵션만 들여다보며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죽을 맛이다.
간헐적으로 흐릿하게 사라지는 구젤의 도를 인벤토리에 넣은 그리드가 주위를 살폈다.
카오스 산맥의 심층부가 쑥대밭으로 변해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자랑하는 몬스터들이 리젠 되는 족족 갓 핸드와 랜디, 템빨골들의 협공을 맞고 산화했다.
외곽에서 무리를 이루고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집단 활동 몬스터들은 직계들의 혈마법에 발이 묶여 합류가 늦었다.
현재 최고 난이도로 손꼽히는 사냥터 중 한 곳이 그리드 없이도 수월하게 공략되는 것이다.
‘노에가 점점 더 게을러지네.’
여력이 넘치는 상황을 증명하듯 노에 혼자서 수면을 만끽하고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똥배를 내민 채 작게 코골이 하는 모습이 귀엽긴 한데 다소 괘씸했다.
“지옥을 정벌하면 악마들이 멤피스를 진상하지 않을까 싶은데.”
노에의 귀가 쫑긋 움직인다.
“예쁜 암컷들도 여럿 있겠지... 그 아이들이 배 나온 남자친구를 환영할지 의문이군.”
“배가 나오고 안 나오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메르세데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드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내면서다.
주군은 어떤 모습이라도 멋지다. 무조건 좋다. 너무 좋다. 등등...
입가에 맴도는 말을 꺼내기 위해 용기를 쥐어짰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고백을 받고 수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간 관계의 진척이 전혀 없었으니, 메르세데스는 그리드의 마음이 혹 변한 게 아닐까 두려웠다.
어울리지 않게 소심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음습한 취미가 생긴 걸 수도 있다.
그리드의 시선은 노에에게 못 박혀 있었다.
등 뒤 메르세데스에게 초 치지 말라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러다가 우리 노에 평생 숫총각으로 늙어 죽는 거 아닐지 몰라.”
“그럴 리가 없다옹!”
버럭 소리친 노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호랑이처럼 늠름한 성체로 변신하면서다.
지상에서도 체내에 축적되어 있는 우레석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리드와 함께하며 꾸준히 레벨을 올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옥 최강 마수 중에서도 최강인 이 노에님을 마다할 암컷이 지옥천지 어디에 있단 말이냐흥!!”
“여기선 제일 약하잖아. 상대적으로 비교 될 거다.”
“제, 제일 약하진 않다흥! 쟤네는 이긴다구!!”
노에의 날카로운 발톱이 템빨콘과 직계들을 가리켰다.
그렇다.
대악마가 아낀다는 지옥 최강의 마수조차 그리드의 스탯 일부를 구현하는 갓 핸드와 랜디를 감당하진 못하는 것이다.
그랜드마스터의 능력을 계승한 템빨골1과 공간을 왜곡하는 템빨골2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혀가 길다. 더 이상 살 안 찌도록 부지런해지겠다고 대답하면 끝날 일을.”
“미안하다냥...”
충성심도 충성심이지만, 그리드의 위엄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는 노에였다.
스탯의 힘이었다.
콰득! 콰드드드득!!
노에를 전투에 투입시킨 후.
그리드는 새로운 권능을 시험해보았다.
전장에 방치되어 있는 수백 종의 아이템.
몬스터들이 드롭한 물건들이 한데 뭉쳐 거대한 검으로 빚어졌다.
몇 번 허공을 가른 뒤엔 폭풍으로 변모했다. 강철의 폭풍이었다.
‘활용도가 무궁무진하군.’
템빨신이 만물의 지배자라는 점을 근거로 발생한 권능이다.
<아이템 합체>스킬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아이템 합체와 달리 대상 아이템의 능력치를 계승하진 못하지만 숫자에 제한이 없다.
무량대수의 아이템을 합쳐 물질, 혹은 현상을 빚는다.
위력은 합친 아이템의 총 내구력 수치와 일정량 비례하는데, 그 탓인지 내구력이 무한인 아이템은 대상으로 삼지 못했다.
‘탐욕을 대상으로 못 삼는 점이 큰 단점이지만 괜찮아.’
이미 충분히 사기적인 잠재력을 지녔다.
<무구의 비>와 연계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면 엄청날 거다...
“...?”
평정심을 되찾아가던 그리드가 짐짓 당황했다.
곁에 선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침울했기 때문이다.
무심해 보일 정도로 표정 관리가 철저한 평소 모습과 달랐다.
기사들의 왕이라는 이명이 처음으로 무색하게 느껴졌다.
“저는...”
그리드와 눈이 마주친 메르세데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주군께서 어떤 모습이셔도 좋아요. 너무 좋아요.”
망설임을 끊고 간신히 꺼낸 말이 완성된다.
그리드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너무 기쁜 나머지 입가가 경련했다.
“냐옹.”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노에의 똥배가 가린다.
푸른 머리카락이 그리드의 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끼히이힝...!
템빨콘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달빛을 따라 번졌다.
***
‘플레이어들을 지옥에 우겨넣는다.’
크게 33개로 나뉜 지옥은 본래 서로 경쟁했다.
하지만 인마대전에서 패배하고 레라지에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는 등, 수차례 위기를 겪은 탓인지 최근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경각심을 제대로 품은 눈치다.
그리드가 지옥을 침략하는 순간 엄청난 반발이 발생할 거란 의미였다.
템빨단만으로 그리드를 보좌하는 건 사실상 힘들 정도의 전력 차이로 공세를 펼쳐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라우엘이 떠올린 해결책이 지옥의 상시 개방이다.
사람들이 지옥을 평범한 사냥터처럼 방문하도록 유도하는 거다.
‘마물이 비축되는 걸 방지하는 동시에 세력을 분산시킬 수 있어.’
숫자가 갖는 강점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만약 사람들의 지옥 침략이 일상화되고, 지옥 곳곳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면 악마들의 대응이 강제된다.
그리드의 침략에 대비해서 똘똘 뭉쳤던 군대가 지옥 각지로 흩어질 터였다.
물론 쉽게 나올 그림은 아니다.
플레이어들의 지옥행을 유도하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해야하는 조건이 2개 있다.
우선 지옥에서 발생하는 페널티를 완화시켜야 한다.
지금처럼 페널티가 높아서는 섣불리 지옥에 도전하는 사람이 드물 테니까.
이에 대해선 다행히 해결책이 있었다.
사람들을 헬가오 레이드에 동참시키는 방법이다.
이미 프로젝트는 가동 중이었다.
모든 플레이어가 인마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라고 치켜세운 라우엘은 승전 기념으로 통제 구역 몇 개를 풀었다.
템빨단이 독점해온 레이드 권한을 민간에 양보하고, 보스가 드롭하는 아이템을 참가자 전원 공평하게 나누게끔 중재하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레이드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전력 지원까지 약속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코크로 섬 던전에 관심이 집중됐다.
헬가오.
비록 본체를 잃었다고 하나 명색이 한 자릿수 대악마다.
드롭템 목록이 엄청나게 화려하다는 소문이 진즉부터 무성했다.
레이드에 단 2회 ‘참가만 해도’ 지옥에서 발생하는 페널티가 사라진다는 소문 또한 빠르게 확산됐다.
라우엘이 의도적으로 흘린 소문이었다.
“악마 여러분 기대하십시오. 이제부터 진짜 지옥을 체험하게 될 테니까요. 후후훗...”
각 길드가 굳이 사냥터를 통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유명한 사냥터는 죄다 몬스터의 씨가 말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악마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몬스터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슨 일인가?”
라우엘은 스틱세이를 성으로 불러들였다.
대현자 스틱세이.
인마대전의 일등공신 중 하나다.
그가 만든 워프 게이트 덕분에 병력 배분과 보급이 원활했던 거니까.
한데...
“불가능해.”
그 대단한 인물이 라우엘의 요청에 난색을 표했다.
데빌 슬레이어 유라가 점거 중인 크리스탈 성.
지옥에 위치한 그 난공불락의 요새와 지상을 연결하는 워프 게이트를 만들어달라는 라우엘의 요청이 그만큼 황당무계했다.
“누군가가 또 무저갱을 베어 세계의 경계를 허문다면 모를까... 단절되어 있는 세계를 잇는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네.”
“지옥문의 원리를 활용해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지옥문은 일부 대악마와 데빌 슬레이어의 권능이며 권능은 초자연적인 현상일세. 데빌 슬레이어 본인에게 여쭤보게. 아마 본인도 원리를 모를 걸세.”
불가능하다.
스틱세이가 재차 단언하자 라우엘은 몹시 곤란해졌다.
지옥을 사냥터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선행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지 못하게 생긴 것이다.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때마다 유라님께 의지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그건 유라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는 격이다.
템빨단 최대의 전력을 낭비하는 꼴이 됐으니 배보다 배꼽이 컸다.
라우엘의 표정이 점차 더 어두워지는 그때였다.
“가능할 것 같은데요.”
반가운 사람이 돌아왔다.
그리드다.
왠지 잔뜩 화가 난 템빨콘의 등에서 메르세데스를 조심히 내려주는 모습이 로맨스 영화 속 신사 같았다.
평소 그리드의 이미지와 달랐지만 의외로 잘 어울렸다.
워낙 다양한 배역을 소화 가능한 외모와 분위기를 갖췄으니.
‘라빗 행정관에게 경사 치를 준비하라고 일러야겠군.’
상황을 눈치 챈 라우엘이 흐뭇하게 웃는 반면 스틱세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드는 이쪽 분야에 지식이 전혀 없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가능을 논하는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전투나 정치와는 다릅니다. 공학이란 기세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닌 거죠.”
툭툭.
그리드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기세가 아니라 충분한 지식과 근거를 갖고 하는 말입니다.”
“허허...”
아침부터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그리드를 보면서 스틱세이는 생각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보다.
딱 거기까지다.
지혜로운 거인족이 그리드와 함께하고 있단 사실을, 그는 아직 몰랐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