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3권 - 3화
<(속보)지옥의 실체가 밝혀지다>
<지옥은 본래 지옥이 아니었다?>
<망자가 안식을 얻지 못하는 세계... Satisfy의 절망적인 세계관>
<전체연령가 게임이 이래도 되나? 과거부터 Satisfy의 높은 자유도를 비판해온 한국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게임물등급위원회를 질타. ‘우리에겐 폭력성, 선정성, 우울성을 묘사하는 게임으로부터 대한민국 청소년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음을 주지해야’>
<등급 변경 논의 중... 게임물등급위원회, 교육부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맹공에 무릎 꿇나?>
<월권행위에 여론 들썩. 지금이 21세기인가? 언제까지 유교의 나라를 고수할 작정이냐며 비판 잇따라. 해외에선 조롱거리가 되기도>
<‘Satisfy의 세계관은 플레이어에게 영웅의 길을 제안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의견 갈리는 국내외 게임 평론가들>
지난 열흘은 후로이 생애에 최고로 바쁜 나날이었다.
비룡을 타고 대륙을 횡단하며 지옥의 진실을 설파하는 한편 오프라인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NPC와 플레이어 양쪽 전부를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
그 과정에서 의외로 야탄교가 큰 도움이 됐다.
도미니언교, 쥬다르교가 진실을 부정하는 가운데 야탄교는 후로이의 주장이 옳다고 동조한 것이다.
그들 또한 진실을 처음 안 눈치였으나, 야탄 신의 강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종교이니만큼 이번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방침을 세운 듯했다.
대신 그 과정에서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야탄이 정녕 악하지 않다면 우리가 섬길 이유가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 된 까닭이다.
야탄의 종 중 무려 절반 가까이가 교단으로부터 등을 돌렸고, 상당수의 신도가 그들을 쫓아 떠났다.
야탄교는 사실상 플레이어들이 주축이 되고 말았는데 이는 템빨국에게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플레이어는 템빨국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니까.
어이없게도 야탄교가 템빨국의 우방에 속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인하르트, 템빨성.
라우엘은 후로이를 격하게 반겨주었다.
각국 언론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 그리드가 밝혀낸 지옥의 실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중이다.
사람들이 그리드를 신뢰한다는 증거였지만 후로이의 활약도 컸다.
악의 소굴인 줄 알았던 지옥이 사실은 망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였다니.
상식이 뒤엎인 사건이다.
후로이의 유창한 언변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근거를 제시해도 섣불리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후로이처럼 유능한 대변인이 있다는 사실이 라우엘은 몹시 기쁘고 듬직했다.
“고생이랄 게 있습니까? 다 주군께서 해내신 일인 걸요. 그보다 정말로 전쟁이 끝났군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후로이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라인하르트는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 덕분에 활기가 넘쳤다.
생사를 넘나든 끝에 재회한 부모의, 반려자의 손을 잡고 거리를 노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같이 밝았다.
친구, 혹은 가족과 함께 무리를 짓고 찾아온 손님들로 술집이며 식당이며 전부 문전성시를 이뤘다.
다 함께 힘을 합쳐 지켜낸 광경이다.
템빨단과 템빨국뿐만 아니라 제국과 발할라를 비롯한 연합국 전체, 어디에도 속하지 않던 낭인들은 물론이고 사건사고만 일으키던 악인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마음 한 뜻이 돼서 지켜낸 현재였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싸워야만 한다.
“...”
후로이의 표정이 굳었다.
저 멀리, 외성 밖.
언젠가 산이 있던 부지를 향해 빼곡히 늘어선 행렬이 자꾸 눈에 밟혔다.
“혹시 저들이 전부...”
“네, 전사자들의 유족입니다. 브라함님이 산이란 산은 죄다 부셔놓은 덕에 국립묘지를 만들 터가 많아져 다행이었죠.”
“전사자가 5만이 넘었다고 했나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선 정말로 적은 피해죠.”
사하란 제국의 경우 전사자가 무려 수천 만 단위였다.
인마대전 발발 직전 발생한 마인 출몰 사건부터 시작해 황도 타이탄이 전쟁의 무대가 되는 등.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민간인 사상자까지 집계가 끝나면 사망자 숫자만 억 단위를 가뿐히 넘길 터였다.
후로이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피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던 전장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함께 싸웠던 병사들의 표정과 비명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키지 못한 병사들의 숫자를 감히 헤아리지 못했다.
그들의 희생이 실감되게 다가오자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전장에 직접 나서지 않았던 라우엘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다.
“결과적으론 잘 됐죠. 이번 전쟁으로 제국은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홀로 서기 힘들 정도죠. 그리드 전하를 향하는 민심까지 고려해 템빨국과의 합병을 진지하게 논의 중일 겁니다. 이제 제국은 사하란이 아닌 우리가 된다는 뜻이죠.”
“...이런 질문 실례지만.”
“네, 말씀하세요.”
“주군께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 이면엔 당신의 입김이 있던 겁니까?”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후로이의 눈동자에 어떤 두려운 감정이 스쳤다.
라우엘이 내심 부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라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미소 지은 채다.
“그럼요.”
이번 전쟁에 그리드가 직접 나설 명분은 적었다.
첫째, 그리드 없이도 전체적인 전황이 유리했다.
둘째, 그리드가 개입하는 건 다른 플레이어와 병사들의 성장 기회를 빼앗는 격이 됐다.
셋째, 그리드의 대장장이 능력은 후방 지원에 탁월하다. 후방에서도 아군에게 충분한 도움이 됐다.
넷째, 그리드는 마침 드래곤 웨폰을 만들 재료를 확보한 참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드래곤 웨폰의 완성을 최우선 순위로 삼는 게 옳았다.
등등.
라우엘은 온갖 이유로 그리드를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바알의 자아 파편이 출현했을 때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리드가 굳이 직접 전장에 나설 필요가 없음을 매 순간 상기시켰다.
잘못 된 부분은 없었다. 이치에 맞았다.
그러므로 그리드는 공감했고, 동료들에게 전쟁을 맡긴 것이다.
다만 라우엘의 속내는 도리에 어긋나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인마대전을 기회로 여겼다. 제국을 약화시키고 흡수할 기회 말이다.
물론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리드가 화를 낼게 분명했으니.
“그렇습니까...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로이가 힘겹게 토했다. 라우엘의 간계를 비난하지 않고 긍정했다.
표정은 어두웠다.
라우엘을 긍정하는 자기 자신에게 혐오를 느끼면서다.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직한 사람들만 모인 집단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죠.”
템빨단은 무척 특이한 조직이다.
악인이 없다.
야욕을 드러내는 이조차 없었다.
기껏 부리는 욕심이라고 해봤자 발전하려는 향상심이 고작인데,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더욱 더.’
내가 냉정해져야 한다...
재차 다짐하며 후로이와 작별하는 라우엘의 표정이 씁쓸했다. 표정을 감지하고 흐르는 피눈물이 스킨 제작자의 실력을 증명해주었다.
***
마음에 묻은 때를 씻겨주고 싶은 걸까.
하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나는 담배 태우는 어르신들 보면 기분이 좋더라.”
전사자들의 유품이 묻힌 묘지.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난 가족을 추모하는.
아니, 앞으로 영원토록 지옥에서 고통 받을 가족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유족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레가스 곁에 폰이 다가와 섰다.
“담배 태우면서도 일흔, 여든까지 멀쩡히 살아계신 모습들 보면 위안이 되거든.”
잠시 로그아웃했다가 돌아온 폰에게서 담배 냄새가 나는 듯했다.
물론 기분 탓이다.
레가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예순밖에 안 되시는 분들이 담배 탓에 노안이 된 거 아닐까요?”
“어... 그거 애연가들한테 너무 실례되는 말 아니냐? 저주잖아.”
“담배는 백해무익합니다. 끊으세요.”
“그래야지...”
안개 낀 묘지의 풍경을 바라보는 폰의 목소리가 침중했다.
방금 피고 온 담배가 또 떠올랐다.
8년 전쯤.
가상현실게임이 출시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무렵부터 금연을 시도했었다.
그깟 담배 때문에 일일이 캡슐을 들락날락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프로 게이머다운 자세였다.
다행히 금연은 성공했다.
말 그대로 담배 필 시간까지 아껴가며 하이랭커가 된 셈이다.
한데 언젠가부터 다시 담배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NPC들과 교감한 게 원인이었다.
큰 전투를 치르고 사상자를 확인할 때마다 우울해지는 기분을 달랠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아왔지만, 인마대전이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인마대전 발발 후 첫날.
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죽은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리드가 잘 했다고 생각해.”
만약 그리드가 전장에 상주했다면.
사상자는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의도적으로 전쟁을 기피했고 덕분에 플레이어들과 병사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그리드가 활약을 덜 한만큼 사람들은 더 많은 시련을 겪고, 극복하며 강해졌으니까.
“앞으론 지옥을 상대로 멸망전이야. 그 전에 충분히 성장할 기회가 필요했어.”
“압니다. 혹시 제가 그리드님을 원망할까봐 걱정하시나요? 염려 마십시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도 제가 그리드님을 미워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폰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응, 단원들 전부 똑같겠지.”
템빨단원들은 그리드의 성격을 잘 안다.
그가 단순히 개인의 욕심 때문에 전쟁을 피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해야만 일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라우엘이 잘 설득했을 거다. 어쩌면 그리드 본인이 사람들의 성장을 바란 걸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리드가 전장에 상주했다면.
전사자는 지금보다 몇 배, 혹은 수십 배까지 적었을지 몰라도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미래가 밝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지옥의 실체가 알려졌고 사람들은 레베카에게 품었던 신앙을 잃어가는 상황이다.
앞으로 인마대전 이상의 위험이 계속해서 도래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다.
이 세상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죽은 사람들에겐 잔인한 말이지만, 그들의 희생은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애초에 매번 위기 때마다 그리드에게만 의지하려는 것 자체가 오류다.
동료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비에 젖은 묘비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유족들.
그들로부터 간신히 시선을 뗀 레가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추도는 끝났습니다.”
당신들의 가족을 지옥에서 구원하겠다.
윤회의 권리를 누리고, 새로운 삶을 되풀이하여 끝내 당신들과 재회하도록 만들어주겠다.
다짐하는 레가스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소를 버린 얼굴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레벨 업 외에도 다양한 수련을 강구해온 레가스.
예를 들어 정신수양을 한답시고 몇날 며칠이고 폭포를 맞는 등, 그는 종종 비효율적인 행동 양상을 보였었다.
무도인의 기질이다.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 레가스의 집중력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발휘되는 집중력을 활용한 초월적 판단, 반사 신경 등.
선택 받은 천재들이 흔히 구사하는 집중력에 지속력을 더했다.
여러 수련의 성과일 수도 있었다.
그 집중력을 온전히 사냥에만 쏟으면 얼마나 빠른 성장이 가능할지 폰은 늘 궁금했었다.
‘이제 알게 되겠군. 나도 다시 금연이다.’
***
월드 퀘스트.
역대급 난이도를 자랑하는 만큼 역대급 페널티와 보상이 동반되는 퀘스트다.
그리드는 일단 고비를 넘겼다.
후로이의 입을 빌려 크게 힘들이지 않고 세상에 진실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월드 퀘스트 진행도 20퍼센트를 달성한 보상은 무려 20의 신위 상승.
지난 몇 년간 쌓아온 신위가 총 18개였는데 그를 뛰어넘는 수치다.
달콤했다.
2개의 새로운 권능이 개방됐다.
그리드는 우선 첫 번째 권능부터 살폈다.
[만물의 창조자에 적합한 권능이 추가됩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제작한 아이템엔 2개의 옵션 슬롯이 생성됩니다. 부여되는 옵션은 무작위지만 언제라도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단, 옵션을 갱신할 때마다 당신을 향한 기도가 2,000개씩 소모됩니다.]
[새로운 권능에 의해 <기도> 스탯이 개방됩니다.]
<기도>
당신을 대상으로 삼은 기도가 축적 된 횟수를 의미합니다.
현재 축적 된 기도:1,839,874,511
“...?”
그리드가 구젤의 도의 상세정보를 불러왔다.
옵션 목록에 공백란이 2개 추가됐다.
즉시 실험해보았다.
[2,000개의 기도를 소모해서 옵션을 부여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스다.
[<구젤의 도>의 1번 옵션 슬롯에 근력 +53이 추가됩니다.]
“허...”
아이템에 스탯 옵션을 넣기 위해선 특정 재료를 쓰는 등 조건을 충족해야한다.
한데 이젠 아무런 대가 없이. 아니, 기도만 소모하면 언제라도 스탯을 추가할 수 있게 됐다.
근데 신화급 무기의 옵션치고 수치가 너무 낮다.
그리드가 재차 시도해보았다.
[2,000개의 기도를 소모해 옵션을 부여하시겠습니까? 새로운 옵션 부여시 기존 옵션은 삭제됩니다.]
[<구젤의 도>의 1번 옵션 슬롯이 흡혈 +5퍼센트로 갱신됩니다.]
[<구젤의 도>의 1번 옵션 슬롯이 민첩성 +90으로 갱신됩니다.]
[<구젤의 도>의 1번 옵션 슬롯이 상태이상저항률 +1퍼센트 갱신됩니다.]
[<구젤의 도>의 1번 옵션 슬롯이 위엄 +101로 갱신됩니다.]
[<구젤의 도>의 1번 옵션 슬롯이 데미지내성 +3퍼센트로 갱신됩니다.]
“XX.”
옵션의 범위가 너무 크다.
Satisfy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치가 대상에 포함되는 듯했다. 심지어 수치도 랜덤이다.
그리드는 정확히 31회를 시도해보았고, 그중 근력 추가 옵션이 3번 발생했는데 각 50, 53, 120으로 변동 폭이 몹시 컸다.
원하는 옵션을 최대한 높은 수치로 가져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해야 할지 확률적으로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어서 2번 옵션 슬롯에도 시험해봤다.
사정은 같았다.
“와, 뭐 이딴...”
그리드는 S.A그룹의 악랄함에 질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뻐했다.
아이템마다 원하는 옵션이 나올 때까지 돌려서 2개의 새로운 옵션을 채워 넣으면 무척 강해질 거라고 기대하면서다.
아무튼 강해지니 좋다...
사실상 호구 마인드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기뻐할 만했다.
그리드는 18억이 넘는 기도 스탯을 보유 중이니까.
게다가 지금도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다.
공짜로 옵션을 돌리는 셈이니 당연히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