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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57화 (1,446/1,794)

템빨 73권 - 2화

마물 잔당을 소탕한 후.

그리드는 무저갱으로 투신하려는 크리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뭘 굳이 무저갱에서 사냥을 하겠다는 거야. 너 아직 100레벨도 안 되는 거 잊었어? 그 레벨에 좋은 사냥터야 지천에 널렸잖아.”

“...”

크리스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레벨이 초기화되기 전의 감각을 털어내고 선택지가 몹시 많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인 부분이 있었다.

“언제 또 갑자기 마물들의 총공세가 시작될지 모르는데... 이때 내가 자리를 비워도 될지 걱정이군.”

무저갱은 가장 중요한 거점이다. 최대한의 전력을 갖추는 편이 좋았다.

‘어차피 저렙이라 큰 도움도 안 될 텐데.’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그리드가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크리스의 레벨을 초기화시킨 당사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다. 크리스의 기분도 고려했다.

속내와 다르게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네 빈자리는 무척 크겠지만 괜찮아. 다른 동료들을 믿어.”

“...그래, 잠시 떠나있어야겠군.”

“레벨 열심히 올리고 있어. 조만간 선물 들고 찾아갈 테니까.”

그리드는 크리스의 전투를 유심히 관찰했다.

쯔단의 후예의 특징을 면밀히 파악해서 그에게 어떤 아이템을 만들어줘야 좋을지 구상을 끝냈다.

서프라이즈도 준비했다.

크리스에게 선물해줄 새로운 대검에 쯔단의 영혼을 부여할 계획이다.

어차피 그리드는 그레니어의 정보를 얻는 등 쯔단에게 취할 건 다 취했다.

앞으론 쯔단이 크리스의 곁에 머물며 크리스를 착실히 발전시켜주길 바랐다.

파그마의 영혼이 내 곁에 머물며 여러 조언을 해줬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며 내린 판단이다.

‘...아니, 파그마는 차라리 없는 편이 도와준 셈이 되겠다.’

만약 파그마와 함께했다면...

인간관계에서 온갖 트러블이 발생했을 확률이 높다.

일단 확실한 건 브라함과 평생 원수로 지냈겠지.

“선물...? 이미 전설 전직서를 선물로 줘놓고 또 무슨 선물을 주겠다는 거야?”

“부담 갖지 마. 전직서는 선물이 아니라 어차피 돈 받을 거니까.”

“...!”

“1억 2천만 달러 어때? 이쯤 돼야 서로 부담이 없을 것 같은데.”

그리드가 제시하는 가격은 한화로 약 1,500억이었다.

꾸준히 그리드에게 아이템 제작 의뢰를 맡기고 엘릭서를 구매하는 등.

성장을 위해 투자해온 지출이 너무 커서 모아둔 재산이 적은 크리스에겐 재앙과도 같은 금액이었다.

“우편으로 계좌번호 보내놓을게.”

“...반품은 안 되나?”

“하하.”

어울리지 않게 농담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기는 좋은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던 그리드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크리스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크리스가 낭비벽이 심한가 보구나.’

하이랭커의 평균 연수입은 수백 억 단위로 알려져 있다.

스포츠 스타와 헐리웃 스타를 초월하는 인기를 구가했으니 당연하다.

어지간한 스포츠 스타의 몸값도 수백억 단위가 기본이지 않나.

하이랭커는 CF와 방송 출연료만으로 큰돈을 쓸어 담았는데 심지어 그게 부수입에 불과했다.

하이랭커의 진짜 수입원은 당연히 Satisfy였으니까.

더군다나 크리스는 레이단의 전 영주다.

템빨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를 몇 년이나 다스렸고, 템빨단에 가입하기 전에도 개인 영지를 소유했었다.

세수입으로만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였을 터였다.

한데 돈이 없다는 거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리드의 발달한 통찰력은 크리스가 진실 된 상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돈을 막 뿌리고 다니는 건가.’

매일 수십 명의 미녀를 저택에 불러들여 마약파티를 벌이는 크리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국대전 출장을 제외하곤 해외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 그리드.

그는 돈 많은 외국인에게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화려하고 문란한 사생활을 보낼 거라는 편견을 쉽게 품었다.

“음... 방금 내가 제시한 금액은 한 귀로 흘려들어. 가격 책정은 크리스 네가 스스로 해라.”

그리드의 마음 같아서야 돈을 한 푼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크리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

그리드는 크리스를 배려하는 중이다.

크리스 본인이 감당 가능한 금액을 지불하여 자존심과 가계를 지키게끔 유도했다.

잘못 된 판단이었다.

이미 1,500억을 불러놓고 뒤늦게 원하는 금액을 제시하라고 해봤자... 크리스 입장에선 1,500억 이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양심의 문제였다.

“빠른 시일 내에... 변제... 하마...”

크리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무려 전설 클래스다.

최근 동향을 봤을 때 1,500억도 무척 싼 거다.

그래, 운이 좋았다...

그리드의 호의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되뇌는 크리스의 머릿속엔 1,500억이란 숫자만 둥둥 떠다녔다.

***

크리스를 떠나보낸 그리드가 곧바로 브라함의 막사를 찾았다.

“마침 잘 왔다.”

널찍한 탁자에 기대어 선 브라함이 그리드를 맞이했다.

한손엔 술잔을 쥔 채다. 느긋한 행색을 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탁자 위에 놓인 지도와 온갖 종류의 문서가 브라함의 평소 업무량을 증명하고 있었다.

특히 마법 기록표가 눈에 띄었다.

마법사는 학자에 가깝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브라함은 전쟁 중에 사용한 마법 내역을 모조리 기록하고 있었다.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마법을 썼을 때 정확히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

일일이 기록하고 대조하며 연구했다.

역사상 최강의 대마법사라는 경지는 재능만으로 이룬 게 아니란 의미다.

피비린내도 났다.

구석에 걸레처럼 구겨놓은 셔츠가 붉게 염색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쯧.”

눈살을 찌푸린 브라함이 손가락을 퉁기자 셔츠가 불타 사라졌다.

“혈마법을 썼다.”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마나핵이 손상되어 큰 위기를 겪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직계의 재생력으로 완벽하게 회복한 후다. 구태여 그리드를 걱정시킬 필요는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브라함을 마주보고 앉았다.

스르륵 날아온 갓 핸드를 의자 삼았는데 편안한 한편 불쾌한 감도 있었다. 갓 핸드의 표본은 어디까지나 그리드 본인의 손이었으니까.

여긴 왜 의자가 하나밖에 없냐.

“마신을 죽인 겁니까?”

마신 슈트리오.

일설에 의하면 한 자릿수 대악마보다 약하다지만 그 거대한 몸집을 무시할 순 없다.

손가락 하나의 길이만 해도 10미터에 이르렀던 놈이다. 전체 크기는 얼마나 거대할지 짐작조차 안 됐다.

그쯤 되면 크기 자체가 무기였다.

손짓 한 번으로 하늘을 뒤덮고 콧김 한 번으로 태풍을 일으킬 유형이었다.

‘대량 학살에 특화 된 존재. 게다가 그쯤 되면 어지간한 병기론 타격을 입히기 힘들 확률도 높다.’

크기에 걸맞는 생명력과 방어력을 보유한데다가 신격까지 보유했으니까.

실제 전투력과 별개로 두려운 상대였다.

“아니, 그건 죽일 수 없는 놈이다.”

“몸집이 큰 만큼 튼튼한가 보군요.”

“물리적으로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놈은 원념의 덩어리... 개념에 가까운 것이니. 그래서 신이겠지.”

브라함이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베리아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나왔다.

지옥이란 본래 어떤 곳이었는지 브라함은 자신의 추측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지상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로운 중립지대.

분쟁을 막는 야탄 신의 석상.

대악마가 관리하는 윤회의 강.

지옥과의 협력을 주저하지 않는 신들.

레라지에가 바알에게 품은 원한과 분노.

바알이 지옥을 왜곡시켰음을 알렸던 시스템 메시지 등등.

의심할 근거야 워낙 많았었다.

“야탄의 석상이 지옥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단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의심했습니다. 어째서 악신이 평화를 상징하는 건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야탄은 정말로 악한가.

자문해 보았을 때, 그리드는 야탄의 악행을 섣불리 떠올릴 수가 없다.

물론 야탄이 악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었다.

지옥과 악마들을 만든 존재가 바로 야탄이니까.

야탄은 세상 모든 악의 원천이므로 당연히 악신인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개념이 뒤집혔다.

브라함의 가설대로 지옥은 ‘망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쉼터’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게 아니면 윤회의 강이 지옥에 흐르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

윤회의 강은 망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망자를 위한 배려였다.

만약 지옥이 정말로 악의 소굴이었다면 굳이 망자를 배려할 필요가 있었을까?

지옥은 야탄의 악의가 아닌 자애가 빚은 세계라고 해석함이 옳다.

여기서부터 악의 근원이 야탄이라는 근거가 빈약해진다.

애초에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땐 천상의 신들부터가 악했다.

“내 생각에 야탄이 저지른 죄는 하나뿐이다.”

콰직.

브라함의 손에 쥐어진 술잔에 수십 개의 균열이 생겼다.

“바알을 만든 것.”

브라함은 어머니께서 마리로즈를 낳은 이유를 떠올렸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대신 이뤄주길 바라서였다.

그래서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를 만들었다.

어쩌면 야탄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가 바알에게 많은 권한과 거대한 힘을 준 이유는, 바알이 형제들과 협력하여 자신의 운명을 구원해주길 바라서가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주기적으로 세계를 파멸시켜야하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거나.

“나의 어머니께서 증명하셨듯이... 무릇 자식이란 부모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펜릴과 마리로즈, 어머니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내가 바로 증거다. 야탄과 바알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겠지.”

브라함의 직계 시절 과거는 부끄러운 치부였다.

하지만 굳이 직접 드러냈다.

자기 자신을 근거로 들어 야탄과 바알의 관계를 증명했다.

덕분에 그리드에게 확실하게 전달됐다.

“나는 지옥을 되돌리고 싶다. 그게 어머니의 궁극적인 소망일 테니.”

브라함은 어머니의 마음을 느낀다.

굳이 자식들의 기억을 왜곡시켜가면서까지 진실을 숨기신 이유...

자식들이 위험을 자처하지 않길 바라서였을 터다.

그래서 숨길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진정한 소망을, 브라함은 반드시 이뤄드리고 싶었다.

또한 자신을 위해서라도 잘못 된 세상을 바로잡을 필요를 느꼈다.

“그리드 너는 어떠냐.”

[<월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월드 퀘스트는 세계관을 뒤엎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진행에 유념하십시오.]

<월드 퀘스트>

★지옥편

여태껏 당신이 수집해온 정보와 브라함의 해석이 맞물려 지옥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왜곡된 지옥의 형태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보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

1.진실 전파.

지옥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십시오.

전체 인류의 최소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구가 당신의 주장을 믿어줘야 합니다.

이때 반드시 ‘데빌 슬레이어’도 함께 설득해야 합니다.

조건 충족 시 월드 퀘스트 진행도 20퍼센트 상승.

2.윤회의 강 해방.

윤회의 강은 본래 망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현재 윤회의 강을 관리하고 있는 대악마 엘리고스를 설득하거나 패주시켜 윤회의 강을 해방시키십시오.

조건 충족 시 월드 퀘스트 진행도 30퍼센트 상승.

3.바알 퇴치.

바알은 지옥의 형태를 왜곡시킨 원흉입니다. 만악의 근원을 징벌하여 지옥을 복원하십시오.

조건 충족 시 월드 퀘스트 진행도 50퍼센트 상승.

4.???

5.???

퀘스트 클리어 보상: 퀘스트 진행도에 따라서 다름.

퀘스트 실패 조건: 진실 전파에 실패.

퀘스트 실패 시 페널티: 레벨 200 하락. 가장 높은 능력치 2개 영구적으로 20퍼센트 하락. 거짓 선동 페널티 발생.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리드가 브라함을 마주보았다.

“베리아체의 소망이 당신의 소망이듯.”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다.

“당신의 소망이 나의 소망입니다.”

그리드에게도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바알에게 붙잡힌 파그마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아이린과 로드를 비롯한 소중한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

또한... 어쩌면 이미 마신의 일부가 되어 고통 받고 있을 칸을 위해서.

“후로이.”

“예, 주군.”

막사를 나선 그리드가 곧바로 실천에 나섰다.

후로이의 입을 통해서 지옥의 진실을 세상에 전파했다.

인류에게 우리가 반드시 싸워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만약 그리드가 평범한 랭커였다면.

단지 한 개 길드, 혹은 국가의 수장에 불과했다면 인류의 30퍼센트를 설득한다는 건 평생이 지나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별세계의 진실을 아무리 설파해봤자 그 누가 쉽게 믿어줬을까.

설령 믿는다고 할지언정 막연한 사후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줄 사람이 몇이나 됐겠는가.

[지옥의 진실이 세상으로 전파됩니다.]

[인류의 5퍼센트가 당신의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인류의 10퍼센트가 당신의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인류의 20퍼센트가 당신의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데빌 슬레이어 ‘유라’가 당신의 주장에 힘을 싣습니다.]

[인류의 35퍼센트가 당신의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목적을 이미 달성하였습니다!]

[인류의 50퍼센트가 당신의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놀라운 업적입니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68퍼센트가 당신의 주장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동쪽의 인간들과 그레니어의 원주민들 또한 당신의 주장을 신뢰한다는 소문입니다.]

[...!]

[...!!]

[...!!!]

[대부분의 인류가 당신을 신뢰합니다.]

[템빨신의 신화가 급격히 강화됩니다.]

[신위가 20 상승합니다.]

[2개의 새로운 권능을 부여하기 위해 당신이 남긴 업적들을 분석합니다.]

[...]

[...]

그리드는 실감했다.

내가 인류의 등불이라면, 인류는 등불을 실은 배다.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더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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