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시야를 칠하는 어둠이 짙어질수록 브라함의 의식은 깊이 침잠했다. 사고가 무한히 확장됐다.
심연 너머로부터 용암처럼 분출되는 원념을 낱낱이 느끼고 해석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이었다.
‘괴로워.’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해?’
‘나는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어!’
‘어째서 죽었는데도 끝나지 않는 거야... 누군가가 나를 다시 죽여줘... 완전히 소멸시켜줘...’
‘저주한다. 이 세계를 저주한다!’
수많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브라함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병에 시들어가는 혈족의 운명과 마리로즈를 평생토록 증오해온 그조차 원혼들의 분노와 고통을 측량하지 못했다. 그만큼 깊었다.
브라함은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제3위라는 절대적인 위계를 지니고도 지옥에서 추방당하신 이유.
지옥에서 개혁을 시도하셨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정확한 내용은 어렴풋하다.
어머니의 의지가 일부 기억을 혼탁하게 만든다. 근거가 너무 적어 여러 갈래로 추측해왔을 뿐이다.
정확히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지옥의 군주들은 레베카와 손을 잡아가면서까지 어머니를 추방하고 나태의 저주를 내렸을까.
그 해답을,
‘설마...’
브라함은 이 순간 불현듯 떠올렸다.
원념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완성된 가설이 뇌리를 벼락처럼 관통했다.
‘지옥의 본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생명은 죽어서 천국에 오르거나 지옥에 떨어진다고 알려졌다.
살아생전 덕을 쌓은 존재는 천국행, 살아생전 죄를 범한 존재는 지옥행이다.
한데 원혼들 중 상당수가 외치고 있었다.
자신은 죄를 범하지 않았노라고.
대체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느냐며 세계를 저주했다.
‘정신 나갔군.’
브라함의 창백한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어떤 무서운 생각이 떠올라 몸을 벌벌 떨었다.
위대한 베리아체의 아들, 템빨신의 사도,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라는 자부심들이 무색하게도 겁에 질렸다.
천사의 탄생 원리를 되새기면서다.
천사란 ‘살아생전 능력을 증명한 이들’. 즉, 극히 소수의 선택 받은 존재들의 영혼을 원료로 만들어진다.
제1위 대천사의 행동과 동쪽에서 온 미르의 발언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오직 천사가 된 이들만 천국에 오를 수 있는 눈치였다.
그럼, 천사가 될 자격을 얻지 못한 나머지 존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온갖 생명들은 사후 어디로 가는가?
만약 그들 전부가 지옥에 떨어지는 거라면...
‘지옥은 지금의 형태여선 안 된다.’
지옥의 본래 모습이 지금과 달랐을 거라고 추측 가능한 이유다.
지옥은 망자들을 벌하려고 만들어진 세계가 아닌, 망자들의 쉼터로 만들어진 세계였을 확률이 높다.
지옥에 흐르는 윤회의 강이 그 가설을 뒷받침한다.
윤회의 강은 어디까지나 망자를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시스템이니까.
한데 바알이 지옥을 왜곡시켰다.
윤회의 강은 망자들의 권리가 아닌 악마들의 소유물로 변질됐다.
어머니께선 그런 세계를 되돌려놓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다가 지상으로 추방당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브라함이 평정심을 잃었다.
당장 느껴지는 원혼들의 감정과 어머니의 입장을 헤아리자 분노와 두려움이 끝없이 솟구쳤다.
“쿨럭!”
마음의 동요로 인해 마나가 역류한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이 브라함을 경련시켰다.
쿠우웅!
마나가 흩어지며 플라이 마법이 강제로 해제됐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 브라함의 몸이 광속으로 추락했다.
언젠가 도래할 무저갱의 바닥에 처박혀 뇌수를 쏟아낼 자신의 최후를, 브라함은 멍하니 상상했다.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지옥의 창조주 야탄.
아마도 악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그는 대체 어떤 심정으로 세계를 방관해온 걸까.
혹시 레베카의 훼방을 받아 나설 도리가 없던 걸까?
야탄 같은 절대신조차 억압하는 것이 지금의 세계라면,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애초에 어머니께서도 실패하셨던 일이다.’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절망뿐이다.
우리는 결국 언젠가 모두 죽게 마련이고, 지옥에 떨어져 무의미한 원념만 생산하는 처지로 영락할 것이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끝 모를 지하를 향해 말없이 추락하던 브라함이 문득 어떤 시선을 느꼈다.
심연 너머에 눈동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우주에 홀로 떠있는 행성을 보는 듯하다.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눈동자였다.
““아...파...””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눈동자가 붉은 이유를, 브라함은 뒤늦게 눈치 챘다.
마신 슈트리오.
지옥의 원념들이 모여 만든, 무수한 원한과 소망의 형태인 그것은 지금 울고 있다.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
붉은 행성이 소멸한다.
마신이 눈을 감자 다시 새카매진 우주에 이번엔 블랙홀이 생겼다.
그건 거대한 입이었다.
곧 떨어질 브라함을 집어삼킬 마신의 입.
“...”
브라함은 저항하지 않았다.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사고가 정지된 채 잡아먹힐 순간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운명을 앞당기는 것일 뿐이다...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편했다.
그때였다.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음성이 아닌 마음이다.
그리드의 믿음이, 그리고 바람이 브라함에게 선명하게 전달됐다.
유대가 일으킨 교감이었다.
“...크큭.”
브라함의 굳은 입술 사이로 실소가 새어나왔다.
붉은 눈동자에 빛이 깃들며 추락하던 몸이 도중에 멈췄다.
산산이 흩어진 마나를 대신해 피를 매개로 마법을 구현한 것이다.
혈마법.
브라함의 타고난 권능이었다.
다시 되찾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힘이다.
한데 기어코 되찾았다. 마리로즈가 순순히 건네줬다.
그리드가 만든 기적 중 하나다.
브라함은 그리드와 함께했던 여정들을 돌이켜보았다.
부활.
영혼 상태로 떠돌다가 육체를 되찾았다.
초월.
궁극에 도달했던 마법을 한 차례 더 발전시켰다.
재생.
잃었던 피와 권능을 되찾았다.
그리 길지 않은 여정 동안 숱한 기적을 체험했다.
불가능?
그리드와 함께해온 순간만큼은 겪어보지 못했다.
브라함은 자신의 운명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죽어 지옥에 떨어져 마신의 일부가 되는 운명.
죽어 천사로 조립돼 레베카의 꼭두각시가 되는 운명.
조금 전까진 단 2개의 갈림길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 순간 새로운 선택지가 보였다.
바알과 레베카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그림이 흐릿하게 그려졌다.
이 정신 나간 세계가 강요하는 운명과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장담하마.”
천천히 입을 여는 브라함 주위의 마나가 붉게 물들어갔다.
마나핵의 결손을 피로 대체하자 발생한 현상이었는데 색깔이 몹시 선명했다. 무저갱의 어둠을 잠시나마 걷어내는 수준이었다.
마신 슈트리오의 크고 흉측한 모습이 브라함의 눈동자에 똑똑히 투영됐다.
“너희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을 거다.”
위로가 아닌 통보였다. 말투가 무뚝뚝했다. 어떤 배려라기 보단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으아아아아...””
슈트리오를 구성하는 수많은 원념들은 위안을 얻었다.
원한으로 말미암은 갈증을 해소하고자 벌렸던 입을 다물고 심연 너머로 서서히 물러났다.
[템빨신의 사도 ‘브라함’이 마신의 출현을 억제하였습니다.]
[마신의 출현으로 폭주하던 무저갱의 마물들이 기세를 잃고 쇠약해집니다.]
[마물들의 공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
레벨 업에 요구되는 경험치량은 레벨이 오를수록 상승한다.
레벨이 높을수록 성장이 더뎌지는 구조였다.
한데 크리스의 레벨링 속도는 도리어 가속하고 있었다.
마물과의 레벨 차이가 좁혀진 여파다.
‘레벨 차이가 너무 커서 발생하는 경험치 페널티가 조금씩 완화되고 있다.’
어느덧 90레벨을 돌파한 크리스가 계산했다.
‘이 추세면 200레벨까진 금방 복구하겠어.’
마물의 평균 레벨을 고려했을 때 최소 300레벨을 찍어야 경험치가 온전히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200레벨부턴 요구 경험치량이 급격히 상승한다.
아쉽지만 그때부턴 성장 속도에 제동이 걸릴 터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재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크리스는 의외로 가까운 시기에 최상위 랭킹에 재진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새로운 클래스의 능력이 탁월했다.
전설 클래스.
히든 클래스의 궁극답게 스탯을 추가로 획득하는 수단이 별도로 존재한다.
스킬 또한 몹시 강력했다.
아직 저레벨이라 개방 된 스킬의 종류는 적었지만, 하나 같이 계수가 높고 유틸성을 겸비했다.
크리스는 특히 패시브 스킬에 주목했다.
우선 <쯔단의 무기술>.
웨폰 마스터리 스킬의 상위호환 스킬이다.
어떤 종류의 무기를 착용해도 공격력과 공격속도, 그리고 명중률이 대폭 증가한다.
대검을 사용할 때 가장 극대화되는 효과이므로 크리스를 위한 스킬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관건은 <다섯 걸음>이라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다섯 보를 걸은 뒤 다음 공격의 위력이 2배 상승하는 스킬.
일반 공격과 스킬 전부에 적용되는 효과인데 쿨타임이 없다.
심지어 어느 방향으로, 어떤 보폭으로 걸어도 무조건 적용됐다. 제자리걸음도 포함이다.
스킬 레벨이 아직 1인 점을 감안하면 잠재력까지 보장됐다.
쯔단의 후예를 상징할 만한 시그니처 스킬인 것이다.
‘이걸 잘 활용하는 게 관건이다.’
시스템이 제시하는 보폭이 존재한다.
전투 중에 항시 발생하는 효과로, 반경 10미터 내에 발자국 모양의 빛이 무작위로 떠올랐다.
그 빛을 다섯 번 연속으로 밟는데 성공하면 <다섯 걸음> 후 공격의 데미지가 트루 데미지로 적용됐다.
대상의 방어력과 각종 내성, 저항력 등, 모든 데미지 감소 요소를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단 의미다.
한데 이게 꽤 어려웠다.
시스템이 제시하는 보폭들의 위치가 죄다 영 좋질 못했다. 거의 사지로 몰아넣는 수준이어서 악의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해내야지.’
궁극적으론 시스템이 제시하는 보폭을 따라야한다.
그래야만 그리드가 나를 위해 선물해준 이 직업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리드가 내게 품은 기대감을 여실히 느꼈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열망이 자연히 싹텄다.
콰앙!
크리스가 빛을 쫓았다. 폭군의 길을 활용해서 사지를 돌파하고 트루 데미지를 발생시키는데 성공했다. 마물의 머리통이 일격에 날아갔다.
그 모습을 쯔단의 영혼이 지켜보고 있었다.
[쯔단이 질색합니다. 자신의 후계자가 어째서 자신의 최후를 재연하려고 노력중인지 모르겠다며 황당해합니다. 어서 저 자살 행위를 말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그리드가 왈가왈부할 부분이 아니었다.
아무튼 가파른 속도로 성장하는 크리스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며 보람을 느낄 뿐이었다.
‘이쯤 되면 크리스가 미안해하겠는걸.’
청구서에 적힌 금액을 보고 고작 1,000억밖에 안 받는 거냐며 섭섭해 할 듯하다.
차라리 가격을 크게 올리는 편이 부담을 덜어주지 않을까.
그리드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때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템빨신의 사도 ‘브라함’이 마신의 출현을 억제하였습니다.]
[마신의 출현으로 폭주하던 무저갱의 마물들이 기세를 잃고 쇠약해집니다.]
[마물들의 공세가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아...”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크리스가 탄식했다.
동료가 너무 유능해도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