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54화 (1,444/1,794)

템빨 72권 - 21화

“이럴 수가...”

노말 클래스.

크리스가 종종 아쉬움을 느껴온 부분이다. 부족한 스태미나를 체감할 때면 특히 그랬다.

자부심이기도 했다.

이런 한계를 딛고 무려 통합랭킹 1위까지 올랐다는 자부심.

물론 크라우젤의 레벨이 초기화되고 그리드가 비공개 랭커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절대로 폄하되어선 안 될 기록이었다.

속내야 어찌됐든 잠시나마 20억 플레이어의 정점에 올라놓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면 기만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만드는 짓이었다.

크리스는 항상 열정을 유지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태껏 없던 업적을 세우고 자신만의 기록을 남기고자 최선을 다했다.

The Gap is Closing.

임철호 회장이 공언했던 그 시점까지 50레벨을 채 안 남겼을 정도다.

그렇다.

노말 클래스 최초로 5차 전직을 달성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직전까진 아니지만, 아무튼 늦어도 내년 중엔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잡을 기회였다.

인마대전이 발생한 덕이 컸다.

한데 전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레벨... 내 레벨이...”

대외적인 크리스의 이미지는 대단히 훌륭하다.

노말 클래스의 한계를 딛고 묵묵히 정진하는 사내.

그간 쌓아온 업적과 진중한 성격, 그리고 남성미 넘치는 외모가 맞물려 수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자국 캐나다에선 영웅이었고 해외에서의 인기도 엄청났다.

그야말로 인지도와 인기가 정비례하는, 보기 드문 호감의 아이콘이었다.

한때 온갖 이유로 수많은 안티를 양산했던 그리드완 유형이 달랐다.

그런 그가 지금.

“으아아아아아악!!”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비명을 질렀다. 거의 울부짖는 것에 가까웠다.

여태껏 쌓아온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현장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청자들까지 당혹을 금치 못했다.

-크리스 왜 저럼??

-와ㅋㅋ 크리스도 비명을 지르네 목석인 줄 알았는데ㅋㅋ

-주식 떨어졌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나?

-갓리드가 준 책 때문인 거 같은데...

대부분의 전설 클래스는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만 월드 메시지로 존재를 알린다.

크리스가 지금 막 전설로 전직했고, 그로인해 레벨이 초기화 됐다는 사실을 눈치 채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단 의미다.

갱신 된 랭킹 목록을 확인했을 때 크리스의 이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추측이라도 가능할 문제였다.

“정신 차려.”

크리스를 일으켜 세운 그리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크리스의 신장이 그리드보다 조금 더 컸지만 크리스가 오히려 그리드를 올려봤다.

비행 능력의 힘이다.

눈높이가 만드는 흡인력의 차이를 그리드는 무의식중에 이용하고 있었다. 왕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다.

“네가 선택한 길이다, 크리스.”

“뭐...?”

크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그리드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고?

사람의 레벨을 다짜고짜 1로 만든 당사자가 하는 말이다. 너무 황당해서 화도 안 났다.

도대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던 크리스가 문득 방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그래, 내가 선택한 길이 맞다.’

그리드가 건넨 책.

즉, 전직서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펼친 건 자기 자신이다.

그리드의 논리엔 문제가 없는 셈이다.

그래서 왠지 더 약이 올랐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돌이킬 필요도 없는 일이고.’

심호흡하는 크리스의 충격과 혼란이 빠르게 진정되어갔다.

플레이어 최초로 5차 전직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됐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하게 생겼고, 완성형 노말 클래스를 체험하지 못하게 됐으며, 그간 힘들게 걸어온 길이 전부 무용해졌으나.

‘그리드를 원망할 일이 아니야.’

결국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또한 전설 클래스를 얻었다.

한때 깊이 열망했던, 지금도 아쉬움을 느낄 때면 무의식중에 바라게 되는 히든 클래스 중 최상위 등급이다.

심지어 그리드가 나를 위해서 직접 마련해줬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대체 왜 그런 건지 살짝 이해가 안 되긴 했지만, 아무튼 호의이고 성의였다. 인연이 만들어준 천운이었다.

‘호의... 맞겠지?’

불쑥 의심이 싹 텄지만 고개를 떨쳐 잠재운다.

매섭게 다듬어진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면서다.

“승객하기 좋은 환경이긴 하군.”

당장 수백의 마물과 수십의 악마에게 둘러싸인 형국이다.

놈들의 등 뒤로 또 수천수만의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게도 ‘1’로 표기되어 있는 레벨이 과연 어떤 숫자에 도달할지 짐작조차 안 됐다.

촤르르르르륵!!

서른 개의 갓핸드가 펼쳐졌다. 크리스를 중심에 둔 채 각자 무기를 쥐고 회전하는 모습이 살벌했다.

그랜드마스터의 육신을 차지한 템빨골1과 해골 병사를 일으키는 템빨골2가 호위로 붙었다.

랜디와 노에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함께였다.

퉤퉤.

템빨콘은 크리스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었다.

“...”

“막타 잘 쳐.”

파티는 맺지 않았다. 레벨 차이가 클 경우 레벨이 낮은 쪽은 경험치를 얻지 못하는 탓이다.

쿠콰콰콰콰콰콱!!

바로 버스가 출발했다.

크리스에게 쏟아지는 공세를 쳐내고 반격하는 갓 핸드들의 참격이 마물들을 분쇄했다. 다진 고기가 된 마물들이 즉시 잿빛으로 산화했다.

본래 고립 된 형국이었던 크리스의 주변이 고작 몇 초 만에 시뻘건 광야로 바뀌었다.

“...”

레벨 초기화의 반동으로 힘이 약해졌으나 기존의 무기를 착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파악한 크리스.

다시 육중한 대검을 패용하고 기회를 노리던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팔짱 낀 채 곁에 선 그리드를 빤히 바라보는 얼굴에 의심이 가득했다.

“...험험.”

민망함을 감추고자 헛기침 한 그리드가 갓 핸드들의 무기를 빠르게 교체했다.

휘황찬란한 예기를 흩뿌리던 보검들이 굉장히 날카로운 수준의 무기로 바뀌었다.

그리드와 갓 핸드들이 애용해온 주력, 서브 무기가 아닌 보급품이다.

그리드가 동료들의 무기를 만들다가 실패할 때 나온 결과물들로, 조만간 라빗 행정관에게 넘겨줄 예정이었다.

전부 유니크 등급이었고 전설 등급은 하나도 없었다.

쿠콰콰콰콰콰콱!!

무기를 교체한 즉시 갓 핸드들의 멈췄던 칼춤이 다시 시작됐다.

그리드의 스탯 일부를 구현하는 만큼 엄청난 빠르기로, 심지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회전해대는데 마물들이 크리스 근처에는 접근조차 못하고 잿빛으로 산화했다.

조금 전과 똑같았다.

크리스는 칼 한 번 휘두를 기회조차 없었다. 여전히 1레벨이었다.

“아...? 강한 놈들은 이미 네가 전부 처리했구나.”

크리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크리스는 물론이고 현장의 모든 플레이어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다.

그리드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성장에 맞춰 덩달아 성장해온 갓 핸드의 수준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어쩔 수 없었다.

잡몹을 상대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리드는 한동안 레이드와 퀘스트, 제작을 통해서 성장해왔다. 일반적인 사냥을 오랫동안 체험하지 못했다.

물론 상위인지능력을 갖춘 덕분에 금방 분위기를 읽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계속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크리스야. 내가 널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지?”

“...”

그리드의 양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떨어진 마물의 뼈나 가죽 같은 드롭템을 주워 깎고, 엮고, 다듬어 대충 도구라고 우길 수 있는 형태를 만들었다.

[<조악하나 믿기지 않게 날카로운 뼈검>을 완성하였습니다.]

[<더러운 뼈로 만든 기적>을 완성하였습니다.]

[<전장에서 피어난 뼈 꽃>을 완성하였습니다.]

죄다 유니크 등급에 종종 전설 등급 무기, 심지어 여러 개의 수식언을 갖춘 전설 등급 무기가 탄생하긴 했지만 괜찮다.

워낙 재료가 저급해서 등급에 비해 위력이 많이 떨어졌다.

스카아아아아악!!

새로운 무기.

마물들의 뼈를 단지 깎아내 만든 것이라곤 믿기지 않게도 정교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무장한 갓 핸드들이 재차 회전했다.

다행히 이번엔 파괴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범위에 들어온 마물 중 절반 가까이가 살아남았다.

드디어 크리스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음!”

크리스는 어리숙하지 않다. 찾아온 기회를 즉시 포착하고 대검으로 횡을 그렸다.

440레벨 제한의 대검을 고작 1레벨에, 이전과 똑같이 깔끔한 폼으로 휘둘렀다.

물론 검 끝에 실린 기세는 몹시 초라했다.

우선 공격 속도가 너무 느렸다.

레벨이 초기화되면서 스탯도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남은 스탯들의 단위가 무려 수백이라는 점이다.

세컨드 클래스로 획득한 스탯과 온갖 칭호, 퀘스트, 엘릭서 등으로 확보한 스탯은 초기화되지 않고 유지되는 덕분이었다.

부우웅!

“...”

크리스의 대검이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대검이 노린 지점을 한 발 앞서 꿰뚫은 검기가 경로상의 모든 마물을 소멸시킨 까닭이다.

온갖 룬어를 두른 검기였다.

다시 차갑게 식은 크리스의 시선이 이번엔 그리드가 아닌 템빨골1에게 향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템빨골1이 자취를 감췄다. 역소환이다.

“미안, 애가 전직하고 처음 나와서 그런지 의욕이 너무 넘쳤네. 하하...”

“...”

크리스의 레벨은 아직도 1이었다.

이 무렵엔 근처에 섣불리 다가오는 마물이 없었다.

만약 이런 우여곡절이 없었다면, 오늘 크리스의 레벨은 조금 더 많이 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

고작 1시간 후 그의 레벨은 60을 넘어섰으니까.

어쩌면 영원토록 깨지지 않을 기록이었다.

뛰어난 학습능력을 자랑하는 갓 핸드들의 딜 조절이 어느덧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덕분이다.

크리스에게 향하는 공격을 모조리 왜곡시키는 템빨골2의 도움이 컸다.

템빨골2가 크리스의 생존을 보장하자 갓 핸드들은 공격에만 전념했고 그만큼 크리스의 사냥 효율도 올라갔다.

크리스는 쭉쭉 오르는 스탯 포인트를 즉시즉시 분배하여 힘을 되찾아갔다. 마물을 마무리하는 속도가 실시간으로 빨라졌다. 매서운 컨트롤 솜씨로 자신이 왜 최고의 플레이어인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최대한 귀엽게 몸을 웅크리고 마물들을 유인해오는 노에의 활약 또한 훌륭했다. 랜디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했다.

곁에 선 그리드는 계속해서 마물들의 뼈를 깎았다.

몇 번 휘두르면 쉽게 부러지는 저질 뼈검들을 실시간으로 교체해주는 중이다.

언제라도 기사 소환을 쓸 수 있게끔 준비하면서다.

‘브라함은 괜찮아.’

그리드는 브라함과 깊이 교감한다. 무저갱의 심연까지 떨어진 기척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는 수준이다. 설령 위기를 겪더라도 유대 시스템의 도움으로 즉시 인지할 수 있다.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무저갱.

브라함이 히드라를 없애고 여러 신화의 일부가 되었던 장소다.

그러므로 브라함에게 더 큰 힘을 선사하는 그곳에서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기를, 그리드는 간절히 소망했다.

푸르릉!!

템빨콘의 투레질 소리가 그리드의 귓전에 스며들었다.

브라함은 무사할 거다, 마치 그리 말하는 듯했...

‘아니, 그럴 놈이 아닌데?’

그리드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크리스의 얼굴을 주둥이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대는 템빨콘의 모습이 보였다. 도끼눈을 뜬 기세가 흉흉했다. 살기를 대놓고 드러냈다.

사내놈 따위에게 침을 바르는 자신의 신세가 상당히 불만인 눈치였다.

‘...죽이진 않겠지.’

저래 봬도 말은 참 잘 듣는 녀석이다.

그리드는 모르는 척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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