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52화 (1,442/1,794)

템빨 72권 - 19화

하이랭커.

평범한 사람은 평생 도달하지 못할 별세계의 위계다.

인터넷상에선 하이랭커를 굳이 그리드와 비교하며 조롱하는 문화가 성행했으나, 실제 인식은 달랐다. 상당수의 사람이 하이랭커를 존중하며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최근에 목표를 이룬 사람이 많다.

하이랭커의 숫자가 대폭 늘어난 여파였다.

기존에는 언론이나 지역에 따라 통합랭킹 천위, 혹은 만위권 랭커를 하이랭커로 구분했지만 근래엔 10만위권 랭커를 하이랭커로 규정하는 게 정론이 되었다.

하이랭커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결단코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상승하면서 10만위권 랭커가 과거의 하이랭커 이상 가는 위용을 보여줬을 뿐이다.

애초에 플레이어의 숫자가 22억 명에 육박하는 시대다.

10만 명은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다.

상위 0.0045퍼센트에 속하는 초수퍼울트라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 집단의 정점에 위치한 사내 둘이 바로 이곳에 있다.

서걱!

검 한 자루로 극한을 넘나드는 검성 크라우젤과,

쿠화하학!!

온갖 그림자를 활용하여 병사를 일으키는 란스티어 페이커.

카심과 글런트, 그리고 서큐버스들이 레라지에를 데리고 탈출한 사이 두 사내는 체파르데아와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목표는 시간을 버는 것.

정확히는 레라지에가 성 지하에 도착할 때까지다.

체파르데아와 싸워 이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체파르데아는 바알의 권속.

그 강함은 한 자릿수 대악마 바로 아래 급이라는 평가였으니.

“개골.”

촤르르르륵!!

체파르데아의 혀가 나선을 그리며 휘몰아쳤다.

그림자에 숨는 페이커를 무시하고 크라우젤을 우선 공격했는데, 크라우젤의 검에 닿을 때마다 베일지언정 한층 더 길게 뻗어나갔다.

아무리 채를 썰어도 마찬가지였다. 길이에 끝이 없는 듯했다.

애초에 체파르데아의 혀는 미끄러운 점액의 보호를 받고 있다.

제아무리 검성이라도 수월하게 베지 못한다.

화마를 일으킬 정도의 불을 다루지 못하는 이상 매번 벨 때마다 심력을 크게 소모해야 할 것이다.

쿠콰콰콰쾅!!

크라우젤을 집요하게 추적하던 체파르데아의 혀가 급기야 궁전 내부를 어지럽게 장악했다.

전장으로 삼기엔 다소 비좁은 침실 전체와 바깥 복도까지 거미줄처럼 펼쳐져 상대방의 동선을 차단했다.

“...”

호화멤버로 꾸린 파티가 레이드에서 꼭 성과를 거두리란 보장은 없다.

협공의 관건은 상호 간 이해이기 때문이다.

한데 크라우젤과 페이커는 평소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다만 개인의 역량이 출중할 뿐이다.

만약 이 전투가 방송에 중계 됐다면, 지금쯤 해설진은 탄식을 뱉었을 거다.

안 그래도 승산이 적은데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 문제라며.

방송을 시청했을 그리드를 콧방귀 뀌게 만들 해석이었다.

“...!”

표적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파르데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예상한 크라우젤의 대응은 당연히 ‘베는 것’.

경로를 막는 혀의 줄기를 모조리 가를 참격을 준비할 거라고 예상했고, 대비했다.

여태껏 체파르데아가 풍문으로 들어온 검성이란 그런 존재였던 탓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달랐다.

혀를 베지 않고 딛고 넘어 내달렸다.

검성이 아니라 원숭이 같은 모양새였다.

비웃긴 힘들었다.

혀 안에 독극물이 가득 주입됐다는 사실을 눈치 챈 태도였기에.

‘아니, 알 도리가 없다. 기량의 문제겠지.’

켜켜이 겹친 혀를 한꺼번에 벨 때 소모될 기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피한 걸 터다.

그 탓에 상황이 운 좋게 맞아떨어진 거고.

체파르데아가 크라우젤의 동선을 주시했다. 횡을 그리는 궤적을 확인했다.

‘쥐새끼처럼 움직이는군. 지긋지긋할 정도로 신중한 놈이다.’

인마대전 내내 체파르데아가 보여준 공격 수단은 혀가 전부다.

그 혀를 내벽, 바닥, 천장 등에 바느질하듯 수십 번 꿰어 만든 것이 지금의 결과, 즉 거미줄처럼 얽힌 혀의 줄기였다.

상대방 입장에선 결계로 보일 구조다.

체파르데아가 방어에 전념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전혀 적극적이질 않았다.

체파르데아에게 혀 외의 공격수단이 존재할 거라고 추측하고 경계하는 태도였다.

‘뮐러였다면 단칼에 베어버리고 폭사했을 텐데!’

개구리는 파리를 쉽게 사냥한다.

한데 크라우젤은 쉽게 잡히질 않자 짜증을 느낀 체파르데아의 감정에 동조하듯 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질척하고 미끄러운 혀를 딛고 달리는 크라우젤의 균형을 미세하게 무너뜨릴 정도로 과격했다.

그 순간을 체파르데아가 정확히 포착했다.

불룩!

체파르데아의 혀가 부풀어 올랐다.

크라우젤을 압사시킬 기세로 빠르게 빈 공간을 채워나갔다.

오돌토돌한 수만 개의 미뢰가 일제히 바짝 서며 연기를 뿜었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황갈색 연기.

독을 품은 폭발의 전조였다.

쿠콰콰콰콰쾅!!

폭발이 몹시 거대했다.

오죽하면 성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크리스탈 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음을 알아도 그랬다.

체파르데아가 단 한 수로 일으킨 재난이었다.

과연 바알의 권속다운 파괴력이었다.

“속이 시원하군. 개골.”

화려한 벽지와 융단은 물론이고 침구와 가구 등이 모조리 소멸해버렸다.

새카맣게 타들어간 침실에 무사히 선 존재는 체파르데아가 유일했다.

검성과 란스티어는 그림자 채로 소멸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체파르데아가 복도로 향하는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앞서 도망친 레라지에를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거울 악마가 뒤쫓긴 했지만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아그너스는 진즉 뒤진지라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

“...?”

체파르데아가 움찔 놀랐다.

휑하니 드러난 침실을 색칠했던 검은 재가 밧줄로 변해 자신의 발목을 휘감은 탓이다.

고개를 돌려 보자 멀쩡한 침실의 풍경이 시야를 채웠다.

폭발의 흔적이 온데간데없었다.

소멸한 줄로 알았던 침구와 가구 또한 온전히 자리를 지킨 채였다.

체파르데아가 뒤늦게 눈치 챘다.

그림자가 폭발의 여파를 집어삼켰음을.

침실을 뒤덮었던 잿더미의 정체도 사실은 그림자였던 것이다.

‘템빨신만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정신 나갔군? 개골.’

체파르데아는 당대 란스티어를 기억한다.

아직 인마대전을 열기 전, 아그너스를 죽인 원흉이었다.

정확히 그때를 기점으로 아그너스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제법 위협적인 놈이긴 했다.

란스티어의 암살능력과 그림자술법은 워낙 유명했으니.

개인적인 역량은, 글쎄.

썩 인상 깊지 않았다.

아직 그림자를 매끄럽게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란스티어의 이름을 계승한 지 얼마 안 된 느낌이었다.

템빨신과 비교하면 하찮을 정도였다.

한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놈의 그림자 운용 능력이 극도로 발달했다.

현상을 무효화시키는 경지.

전대 란스티어의 명성을 초월한 게 아닐까 싶은 경지다.

체파르데아가 품는 의심은 타당했다.

방금 페이커는 카심에게 전수받은 탐(貪)을 이용해 폭발을 삼킨 동시에 그림자 장막을 전개했다. 적어도 방금 그 순간만큼은 전대 란스티어도 재현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물론 크라우젤의 도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라우젤이 폭발의 일부를 베어 만들어준 찰나의 간극을 활용한 것으로 두 사람의 완벽한 연계가 만든 결과였다.

크라우젤과 페이커는 서로를 신뢰했다. 친분이 아닌 존중에서 비롯한 신뢰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선택과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전적으로 믿고 호응하여 손발을 맞췄다.

그렇게 차츰 서로를 이해해갔다.

“슬슬 됐다.”

저벅.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크라우젤이 중얼거린다.

두서없는 말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체파르데아의 표정이 이내 굳었다.

전투 내내 요란한 기파를 발생시키던 크라우젤의 투명한 검이 잠잠해졌음을 눈치 챈 까닭이다.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다.

“드디어 교감이 끝났어.”

크라우젤은 신화급 아이템을 다뤄본 경험이 없다.

하여 백호검이 신화 등급으로 성장한 시점부터 발생한 저항에 내심 당황했다.

자고로 검성이란 모든 도검류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법인데, 백호검은 만들어준 부모를 닮아서인지 몹시 도도하여 크라우젤의 손길을 거부한 것이다.

꽤 큰 충격이었다.

검성 입장이 아닌, 키워준 부모 입장에서 서운했다.

그리드가 만들어서 신화가 될 잠재력을 품었고, 실제로 신화가 되자 템빨신이 만든 신물로 구분됐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제 주인은 자신 아닌가.

한데 반항 할 줄이야...

아무튼 잘 해결됐으니 다행이다.

“이제 시작하지.”

서걱!

심장을 찔러오는 혀를 크라우젤이 망설임 없이 베었다.

더 이상 피하지도, 딛고 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젠 스킬을 쓰지 않아도 점액에 둘러싸인 두꺼운 혀를 무처럼 자를 수 있었으니까.

투쾅!

크라우젤은 최단의 거리를 주파했다.

선회하는 일 없이 직진으로 쏘아졌다.

본래 검성이란 그런 존재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 넘기고 돌파한다.

미끄러운 점액에 둘러싸인 체파르데아의 두꺼운 혀를, 본래라면 화마가 있어야만 말려 제압할 수 있을 그것을, 단칼에 베어 떨어뜨리길 반복했다.

혀를 벨 때마다 폭발하는 독도 함께 베었다.

검성의 손에서 빛나는 백호검이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체파르데아 또한 그 사실을 눈치 챘다.

“템빨신...!”

놈이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항상 더뎠던 인류의 성장을 촉진시켜 결과적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깨닫고 분노하는 체파르데아의 눈빛을 읽은 크라우젤이 속삭였다.

“그리드는 네게 관심조차 없을 텐데.”

반박하고 싶은 체파르데아였으나, 공교롭게도 말하지 못했다.

몸에서 잘려나간 머리통이 하필 입부터 지면에 떨어진 까닭이다.

놈의 크고 둥근 머리통을 잽싸게 쇄도해온 그림자가 포박해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뻐엉!!

머리를 잃고 휘청거리는 몸통은 크라우젤이 발로 차 떨어뜨렸다.

소형 몬스터를 공략하는 대표적인 기믹 중 하나다.

가벼운 ‘무게’를 공략해 전선에서 이탈시키는 방법이다.

“이...! 비겁한 놈들이이!! 개고오오오올!!”

성 밖으로 추락하는 체파르데아의 절규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성에서 쫓겨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단 하나.

홀로 성에 남은 거울 악마의 생환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

투사란 쉽게 말해서 싸움꾼이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모조리 무기 삼아서 휘두르는 게 가능했다.

웨폰 마스터리 스킬을 보유했다는 의미이며, 액티브 스킬들의 사용 조건이 무기로부터 자유로울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쯔단의 전직서를 예정대로 크리스에게 넘길 생각이다.

‘쯔단의 주력 무기가 대검이었으니까.’

특정 레벨에 도달하거나 직업 퀘스트를 진행할 시 개방되는 스킬들, 특히 궁극기가 대검을 사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공산이 크다.

이제 와서 크리스 말고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가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드 자신이 배운다는 선택지는 당연히 없다.

왜?

못 배우니까.

배울 수 있었으면 산군에게 받은 스킬들처럼 바로 배웠겠지.

‘크리스에겐 자격이 차고 넘치기도 하고.’

이제 남은 문제는 얼마를 받느냐다.

세계적인 재벌들처럼 100조 단위 재산을 보유하고 싶은 바람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그리드였지만 마땅한 대가는 꼭 받을 생각이었다.

크리스완 늙어 죽을 때까지 친구로 지내고 싶어서다.

귀한 물건을 괜히 공짜로 넘겨줘서 마음에 빚을 얹었다가 거리감이 생길 것을 염려했다.

‘흠... 100억? 이건 너무 싼가.’

전설 전직서의 가치는 예전과 다르다.

획득 경로가 불분명하고 수량도 제한되어 있음이 명확히 밝혀진 탓이다.

재산이 1,500조, 2,000조가 넘는 중동의 부자들이 수천 억 단위 현상금을 내건 것이 시세 상승의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은 실감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돈으로 제2의 그리드가 되려는 부자가 세상엔 차고도 넘쳤다.

‘...아무래도 최소 1,000억은 받아야겠는걸.’

크리스는 오랜 시간 최상위 랭커를 유지했고 대도시의 영주로 지냈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플레이어로 방송과 CF도 많이 찍었다.

각종 이벤트 대회에 출전해 상금을 휩쓸기도 했다.

1,000억쯤이야 당연히 있을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리드의 경제 개념은 평범함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주변에 돈 많은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입장인 탓이기도 했다.

‘일단 어서 가서 전직시키자.’

전직서를 이용하면 레벨이 1로 초기화 될 가능성이 높다.

시간이 금이었다.

그리드가 제2의 빚쟁이를 만들기 위해서... 아니, 소중한 동료의 미래를 위해서 곧장 출발했다.

목적지는 무저갱.

마침 새로운 위기가 도래한 전장이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