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50화 (1,440/1,794)

템빨 72권 - 17화

“흐흥~ 흐흐흥~”

별빛을 촘촘히 박아놓은 커다란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반짝인다.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베니스를 천사들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해서다.

금전의 신 베니스.

그녀를 숭상하는 인간은 드물다.

가난한 자는 재물을 원망하고, 부자는 재물을 이용하며, 성직자는 재물을 경계하기에 그렇다.

금전이란 존중받기 힘든 것이다.

베니스는 늘 고독을 품은 채 존재해왔다.

그녀가 항상 밝게 웃는 이유는 초라해지지 않기 위한 노력에 불과했다.

한데 오늘은 진정으로 행복해보였다.

간혹 드물게 기도를 올리는 상인을 발견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기쁜 눈치다.

눈치 챌 수밖에 없다.

“자!”

“...?”

“손!”

짝!!

“...”

베니스는 천사들을 마주칠 때마다 하이파이브를 강요했으니까.

그녀가 기쁜 티를 숨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비급에 있다.

무신 제라툴이 친히 작성한 쌍수검 비급.

그리드가 원하는 물건이다.

베니스에겐 명성을 얻을 기회였다.

‘격이 크게 오를 거야.’

신격을 쌓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누군가에게 숭배 받는 것, 혹은 명성을 쌓는 것인데 베니스의 입장에선 두 가지 방법 모두 힘들었다.

아스가르드뿐만 아닌 세상 모든 신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태양마차를 운영하는 이유다.

그녀는 신을 차별하지 않는다.

출신과 소속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고객으로 삼는다.

거래를 중계하고 수수료를 받아 명성을 챙기고, 유명한 신과 거래했다는 설화를 남겨 추가적인 명성을 얻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시켰다.

물론 후자의 방식으로 명성을 얻은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명성을 잃어가면서까지 뭔가를 원하는 신들은 대부분 인신이었으니까. 그들과 거래했다고 해서 어떤 설화가 되겠나.

세상 모두가 아는 고절한 신들과 거래해야 이문이 컸는데, 그런 신들은 대개 아쉬울 게 없어서 태양마차를 이용하는 일이 없다.

무신 제라툴이 특이한 것이다.

그는 베니스의 가장 큰 고객으로, 그가 비급을 납품하는 덕분에 태양마차가 그나마 구색을 맞출 수 있었다.

‘진짜 말 그대로 구색 맞추기 용이었지.’

공교롭게도 제라툴의 비급이 실제로 팔려나간 적은 드물다.

제라툴이 태양마차에 비급을 납품하는 이유는 순전히 과시욕을 충족하기 위한 것.

되도록 뛰어난 비급을 납품하는 탓에 단가가 너무 셌다.

애초에 프리미엄이 붙어서 보통의 신은 제라툴의 비급을 사고 싶어도 못 사는 수준이었다.

한데 오늘.

드디어 제라툴의 비급이 팔리게 생겼다.

심지어 주문 제작 비급이다.

족히 100년을 장사해야 남길 이문을 한 방에 남길 기회였다.

하물며 거래 대상이 템빨신이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기적 같은 업적들의 주인공으로 특히 인간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엄청났다.

템빨신과 제라툴을 중계했다는 설화를 남기는 순간 베니스의 신격은 크게 오를 것이었다.

‘이런 걸 두고 일확천금이라는 거겠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격의 빈곤에 시달려온 베니스.

그녀에겐 일확천금이란 말이 몹시 낯설고 흥분됐다.

금전의 신임에도 그랬다...

“사랑하는 고객님!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드디어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상품을 들고 찾아왔답니다!”

현재 지상은 악마들의 침공으로 전란을 맞이한 상태였다.

심지어 신의 권능을 은밀하게 부여 받은 악마들이었다.

한데 템빨신의 거처는 저번처럼 평화로웠다.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라고 했던가.

지상의 다른 곳과 달리 전쟁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이쯤 되면 악마들이 이곳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듯했다.

사리분별 못하기로 유명한 악마들조차 경계해야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베니스는 굳이 기감을 펼칠 것도 없이 원인을 파악했다.

눈앞에 보이는 그리드.

저자가 악마들의 침공을 억제하는 원인이다.

‘존재감이 더 커졌어.’

베니스는 최근에 그리드를 만났었다.

여러 정보를 제공하고 호의를 얻어 거래를 텄다.

아스가르드 입장에선 배반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베니스에겐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아스가르드가 아닌 모든 신과의 거래였으니까.

아무튼 그때가 고작 열흘 전이다.

인간에게도 짧은 시간이었으니 베니스에겐 찰나였다.

한데 그 찰나 동안 그리드는 변해있었다.

몸에 두른 상징색부터가 한층 더 선명해졌다.

‘무슨 영문이야?’

탄생과 함께 영생을 누려온 신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지.

매우 높은 곳에서 내려 볼 뿐이므로 알 도리가 없다.

반면 그리드는 보통의 사람보다 더 잘 안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인물이니까.

그의 하루는 가장 길고, 짙다.

“상품? 아, 무신의 비급 말인가.”

그리드는 대장간 밖에 나와 있었다.

요새처럼 쌓인 용광로를 등지고 선 채였는데 주변으로 후끈한 열기를 퍼뜨렸다. 달콤한 땀 냄새를 바람에 실어 보냈다.

베니스를 마중 나온 게 아니란 뜻이다.

그리드는 그녀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이곳에 나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또한 상품이라는 단어에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이쯤 되면 베니스도 불안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부정하며 미소를 유지했다.

“...네, 당신이 오매불망 기다렸을 상품이죠! 특등품이랍니다? 마음에 꼭 들 거예요. 무신이 유독 공들여 만든 비급이니까요!”

베니스는 제라툴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제라툴이 그리드를 혐오하는 탓이다.

그의 비급을 원하는 의뢰인의 정체를 불문에 붙였다.

제라툴은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야말로 무신 아닌가.

세상 모두가 자신의 비급을 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므로 의뢰인의 정체를 궁금해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립 된 거래다.

그렇다.

베니스는 제라툴의 허가를 받은 순간 이 거래가 성사됐다고 믿었었다.

그리드의 허락까지 필요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흐음...”

무신의 비급을 건네받는 그리드의 반응이 덤덤하다. 기뻐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베니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급의 내용을 훑는 그리드의 눈빛이 차츰 사늘하게 식어갔으니까.

불안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기대 이하군. 짝퉁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네?”

“가져가요. 안 삽니다.”

“그, 그게 무슨...! 제라툴의 쌍수검 비급! 당신이 원했던 상품이잖아요! 저는 상품을 제대로 가져왔구요!”

“정확히 짚고 넘어가지? 내가 원하는 건 쌍수검 비급이었고 제라툴쯤 되면 쉽게 작성하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내가 언제 제라툴의 비급을 원했다는 겁니까?”

“아닛...! 그게 무슨 말장난인가요!? 왜...! 왜 갑자기 제게 짓궂게 구시나요!!”

“짓궂게 굴긴? 상품이 마음에 안 들 뿐입니다. 내 기대를 충족 못하는 걸 어쩌라고?”

“웃...! 우으윽...!”

눈이 커서 그런가.

베니스의 표정은 감정을 몹시 잘 표현했다.

경련하는 눈동자와 얼굴 근육이 당혹, 분노, 혼란, 슬픔을 교차해서 표현하는데 가여울 지경이었다.

‘불쌍한 표정이 왜 저렇게 잘 어울리지?’

분명 여신답게 초월적인 미인인데... 이상하게 웃는 모습보다 울 것 같은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

‘이런 미친.’

잠시 멍해졌던 그리드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베니스의 어떤 권능이 발동한 것이 아닐까 경계했다.

“제발... 제발 짓궂게 굴지 말고 사주세요.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

베니스의 커다란 눈동자에 담긴 별빛들이 흔들렸다. 눈물이 차올라 당장에라도 쏟아질 듯했다.

소녀가장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잘 어울려서 사실은 이게 그녀의 본모습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 그럴 리가.’

인간들의 신앙에서 금전의 신은 비주류가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아스가르드의 신인데 소녀가장이라는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역시 어떤 권능이 맞다. 매혹 계열 스킬의 궁극이 아닐까 싶다.

판단한 그리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치 없는 물건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호구가 아니니까.”

베니스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기에, 산군에게 선물 받은 스킬북을 토대로 배운 이도류를 직접 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

베니스가 할 말을 잃었다.

빈곤에 허덕인다고 하나 그녀 또한 명색이 신이다.

무예를 따로 익히지 않았어도 안목이 있었다.

“납득... 납득할 수밖에 없군요.”

한참을 가만히 그리드의 검술을 지켜보던 베니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가상했다.

“제라툴의 비급이 서술하는 쌍수검보다 당신의 솜씨가 더 뛰어나네요...? 헤에, 헤헤헷...”

“...??”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저 모습도 연기일까.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꾸벅 인사한 베니스는 이미 하늘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쏟아낸 눈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데 마치 작은 은하수 같았다.

[쯔단이 여신을 가엾게 여깁니다.]

[학센은 그리드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기술이란 본디 고등한 것만이 살아남는 거라고 설명합니다.]

[파일볼프가 극점마법의 명맥이 끊긴 이유를 알겠다며 동조합니다.]

[학센이 분노합니다.]

‘산군에게 너무 감사하군.’

산군이 준 스킬북들의 가치를 재차 실감한 그리드가 흡족하게 웃었다.

전설 스킬 3개와 신화 스킬 1개.

그중 하필 신화 스킬이 이도류였다.

제라툴의 비급을 얻으려고 명성까지 바쳐야한다는 게 내심 불쾌하던 차에 운명처럼 맞아 떨어졌다.

어쩌면 그리드의 약점을 간파한 산군이 안배한 걸 수도 있다.

아무튼 나머지 3개의 전설 스킬북도 전부 그리드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단, 그중 하나가 좀 아쉬웠다.

생명력이 30퍼센트 이하일 때 발생하는 패시브 스킬.

위력이 무척 뛰어나서 흑화의 재림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생명력이 30퍼센트 이하여야 한다는 조건이 문제였다.

화신의 폭풍과 흡혈, 그리고 아이템에 귀속 된 옵션들.

그리드에겐 생명력 회복 수단이 굉장히 많은 까닭이다.

평상시에도 물약 먹듯이 피가 차는 입장이라 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워 보였다.

‘차차 생각하고.’

우선 쌍수검에 완벽하게 적응하도록 하자.

양손에 구젤의 도와 염룡검을 거머쥔 그리드가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

“흠... 슬슬 되었나.”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훼손 된 격을 복구시킨 제라툴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아주 좋았다.

몸은 가볍고 정신은 맑다.

요양하는 동안 비급을 작성하며 무예를 되새긴 일이 큰 도움이 됐다.

‘내 비급을 갖고 싶다고 자신의 모든 걸 바친 신이 있다지. 과연... 세상 모든 존재가 나를 우러러보는구나.’

툭.

흡족하게 웃는 제라툴의 눈앞에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요양하며 작성했던 비급으로, 쌍수검의 정수를 담은 것이었다.

“...뭐지?”

제라툴이 신전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베니스가 서 있었다.

그녀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반품이요.”

“...?”

제라툴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사고가 연결되지 않았다.

베니스가 쐐기를 박았다.

“의뢰인이 그거 필요 없다고 하네요.”

“...왜지?”

“이유는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드물게 쌀쌀맞은 태도였다.

등 돌려 떠나는 베니스를 제라툴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느끼면서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