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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49화 (1,439/1,794)

템빨 72권 - 16화

‘역시 사람은 아는 게 많아야 돼.’

당장 그레니어만 봐도 지식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레니어 외의 세상을 몰라 외부인을 괴물 취급하는 원주민들, 그레니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으며 외부인을 깔보는 수호자들, 그레니어가 우물에 불과함을 알고 늘 바깥세상을 주시해온 산군.

같은 환경에서 살아감에도 원숭이보다 못한 놈들이 있고 현자가 있는 것이다. 순전히 지식의 힘이었다.

‘내가 아는 게 없었으면 크레이슐러라는 이름에 혹했을 거 아니야.’

지금 그리드가 지뢰를 피한 것 역시 같은 논리다.

지식이 없었으면 얼씨구나 좋다고 지뢰밭에 투신했으리라.

그렇다.

그리드는 크레이슐러를 지뢰로 인식했다. 그를 잘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관짝이 된 인간.’

크레이슐러는 마리로즈의 봉인 된 육신을 영원토록 품길 바랐다.

마리로즈의 체취를 만끽하고 싶어서 생물학적 죽음을 선택했다.

‘관이 되도 감각은 살아있을 것.’이라는 파그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인간의 몸을 버리고 관에 영혼을 전이했음이 증거다.

마리로즈의 봉인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크레이슐러의 음습한 욕망을 목격했다.

만약 그리드가 크레이슐러에 대해서 몰랐다면.

미친 변태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산군의 말에 혹해서 그를 부활시키려고 혈안이 됐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멋모르고 크레이슐러를 부활시켰다가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까. 산군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도 못할 텐데.

‘애초에 지금 타이밍에 크레이슐러를 부활시키는 건 악수다.’

마리로즈가 부활했다.

브라함에게 ‘피’를 돌려주고 직계의 권한을 복권시키는 등, 그간의 태도와 행보를 봤을 때 우군에 가까웠다.

일종의 보험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때 크레이슐러가 부활하면?

‘무작정 마리로즈를 찾아 떠나겠지. 마리로즈의 활동을 훼방 놓으면서 결과적으로 내게 손해를 끼칠 거다.’

크레이슐러는 필시 훌륭한 교황이었다.

당시 인류의 최대 위협이던 마리로즈를 봉인한 실력을 그리드는 감히 폄훼하지 못한다.

크레이슐러가 역사상 몇 안 되는 초월자 중 한 명이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대개 초월자란 성향이 괴팍하고 이기적이게 마련인데 크레이슐러는 타인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그리드가 원하는 인간상에 가까웠다.

물론 과거에 한해서다.

아마도 마리로즈와 마주친 시점부터 크레이슐러는 변질됐다.

사랑에 눈이 멀어 음습한 욕망에 몸을 맡긴 변태로, 상식과 완전히 동떨어지고 말았다.

비극이었다...

그자와 올바른 소통이 가능할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래도.’

크레이슐러를 부활시킬 방법을 들어두긴 해야 한다.

누차 말했듯이 지식은 힘이 되니까.

‘그를 당장 되살릴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필요한 순간이 올 수도 있어.’

무려 최초의 교황이 ‘자신 이상’의 재능을 찾아 후계로 삼은 인물이 바로 크레이슐러다.

역대 교황 중 최강으로, 궁극의 성직자이자 초월자였다.

레베카의 딸들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협력을 받아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어쨌든 마리로즈를 봉인시켰다는 실적까지 남겼다.

구태여 어떤 업적을 더 찾지 않아도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다.

‘새삼 느끼는데 대단한 인물이 참 많았구나.’

검성 뮐러, 무패왕 마드라, 데빌슬레이어 알렉스, 교황 크레이슐러, 바알과 계약했던 파그마, 염룡 트라우카와 맞서 싸운(?) 브라함 등등.

홀로 천지를 개벽시킬 강자가 즐비했던 시대가 존재한다.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찰 정도다.

‘...앞으로의 시대가 훨씬 더 대단하겠지만.’

지혜의 탑의 결사들과 브라함, 지크 등의 과거의 잔재를 염두에 두고 품는 믿음이 아니다.

피아로, 메르세데스, 카일 등.

이번 시대의 재능만 믿고 품는 자신감도 아니다.

그리드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플레이어들을 믿었다.

마땅한 신뢰다.

Satisfy의 시간을 기준으로, 플레이어들은 이 땅을 밟고 채 20년도 안 돼서 과거의 인물들을 초월하거나 뒤쫓고 있다.

그간의 성장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잠재력까지 마련한 상태다.

막말로 몇 년 만 지나도 과거의 인물을 뛰어넘는 플레이어가 등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업적만 놓고 봤을 땐 지금 당장 뛰어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옥과 일부 신이 협력한 대공습.

심지어 바알까지 참전한 공습을 당대의 인류는 막아내고 있으니까.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그리드다.

“그런데 크레이슐러를 어떻게 부활시킨다는 거지?”

그리드가 시대의 흐름을 촉진시켰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단 한 명도 없다.

산속에 칩거해온 산군조차 알았다.

“그대가 크레이슐러를 잘 아는 눈치이니 설명하기 편하구나. 크레이슐러는 산 채로 영혼을 박리 당했다. 브라함이나 지크와 경우가 닮은 것이지.”

그러므로 산군은 그리드를 존중한다.

그리드에게 동질감을 느끼거나 설득에 마음이 동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그리드가 산군의 힘을 목도한 순간 위축되어 싸우길 꺼려했던 것처럼, 산군 또한 그리드와 적대하길 원치 않았다.

그리드 본인은 아직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템빨신의 위계다.

“브라함과 지크가 그랬듯이 육신을 찾으면 부활시킬 수 있다는 뜻인가?”

“옳다.”

“크레이슐러가 관에 봉인되고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육신이 보존되어 있을까?”

브라함은 천년빙옥에, 지크는 무저갱에.

두 사람의 육신은 특수한 처리가 되거나 특수한 환경에 놓여 보존됐었다. 악의에서 비롯되었든 선의에서 비롯되었든, 누군가가 정성을 쏟아 만든 결과였다.

크레이슐러의 육신이 무사히 보존됐을 가능성은 적은 것이다.

‘파그마는 크레이슐러에게 사적인 감정이 없어보였으니까.’

파그마가 크레이슐러에게 접근한 것은 순전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서 수명이 다해가던 크레이슐러에게 대련을 요청했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크레이슐러의 숨은 욕망 덕분에 성립 된 결과다.

크레이슐러에게 관이 될 의지가 없었다면, 마리로즈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이 없었다면 파그마의 억지에 어울려주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파그마는 자신을 위해서 크레이슐러의 욕망을 이용했다. 죽여서 관으로 만들었다.

그래놓고 크레이슐러의 시신을 잘 보관했다고?

가능성이 낮다. 언데드로 만들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그리드는 확신했으나.

“잘 보존되어 있다.”

산군이 예상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크레이슐러가 신목의 관에 봉인됐다는 사실까지 아는 걸 보면 내막을 전부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구나. 그대도 알다시피 크레이슐러의 시신을 취한 것은 파그마인데, 시신을 아주 묘한 장소에 안치했다.”

“묘한 장소?”

“무후총이라는 곳이다.”

“...!”

“규모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무덤이다. 지하에 성터를 만들고 온갖 보물과 일만 명의 몸종, 거기에 또 삼만 명의 병사를 순장시킨 뒤 거대한 봉분을 쌓았는데 그 규모가 마치 산과 같다. 이곳 그레니어와 비교했을 때 높이는 비할 바 없이 낮다만 면적은 수백 배에 이른다지.”

무후총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 이유다.

만들어지고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주인조차 잊힌 무덤.

봉분 위로 풀, 나무 따위가 무성하게 우거져 말 그대로 산이 됐다.

산을 보고 저것이 무덤일 거라는 발상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무후총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물론 그리드는 위치를 알고 있다.

스컹크 덕분이다.

스컹크가 말하길, 무후총은 진시황릉의 확대판이라고 했던가.

“그 무덤의 주인은 대체 누구지?”

스컹크조차 무후총의 주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탐사를 위해 안에 들어갔다가 무덤을 지키는 망자들의 눈길을 피하지 못하고 죽기 일쑤였던 탓이다.

“모른다.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무후총이라고 불렸으니.”

“무후총의 망령하고 만나본 적도 없나?”

“신화 찬탈자가 교류한다라. 망상으로 그칠 일이다. 우리의 본질은 포식자. 우리끼리 만나봐야 어느 한쪽이 죽기밖에 더 하겠나. 애초에 우리는 ‘영역’을 떠나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내가 그레니어를 지키기 위해 탄생했듯이 무후총의 망령은 무후총을 지키기 위해 탄생했을 테니.”

“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무후총의 특정 구역들에 묻힌 시체는 절대로 훼손되지 않는다는 풍문이 도는데 나는 그 소문을 진실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크레이슐러를 부활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다.”

“흐음...”

그리드가 영 꺼림칙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보의 가치가 낮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신뢰하지 못해서였다.

‘호감도 20이 결코 낮은 건 아니지만.’

그리드는 산군을 의심했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네 말을 믿기 힘들군. 첫째, 크레이슐러는 교황이다. 그의 시체를 처분하는 건 교황청의 몫이지 파그마가 나설 문제가 아니야. 둘째, 파그마가 굳이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크레이슐러의 시체를 보존하려 한 이유가 납득이 안 된다. 그가 왜 굳이 그래야 했지?”

“합리적인 의심이다. 하지만 신격을 걸고 맹세컨대 내 말은 진실이다. 아쉬운 점은 나 또한 파그마의 속내를 모른다는 점이다.”

“...”

산군은 산군이라고 불릴 뿐, 정확히는 산신에 가깝다.

그리드보다 높은 격을 보유했으니 당연히 신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격을 걸고 맹세했다.

[쯔단은 산군을 신뢰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같긴 한데.’

쯔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격을 희생했던 존재다. 허투루 맹세할 리 없다.

그럼 남는 의문은 하나.

‘파그마가 왜 그랬냐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그리드는 파그마의 눈물을 떠올렸다.

번헨 열도에서 홀로 악마들의 침공을 마주하고 쏟았던 회한의 눈물 말이다.

‘브라함을 배신한 것을 후회했었지. 전설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점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고.’

따지고 보면 파그마에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

크레이슐러의 시신을 무후총에 안치해 썩지 않게 만든 것 또한 일말의 양심이 아니었을까?

‘크레이슐러에게 미안해서...? 아니, 이건 너무 억지다.’

파그마가 크레이슐러를 위했다면 시신을 당연히 교황청에 인계했을 것이다.

비록 영혼은 지상에 남았지만 만인의 배웅을 받으며 작은 위안이라도 얻으라는 의미에서.

‘가만... 억지가 아니라 정말로 크레이슐러를 위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는데?’

신목의 관의 효과는 결국 영구하지 못했다.

마리로즈 스스로 봉인을 풀어버렸다.

관을 만든 당사자인 파그마는 이런 미래를 예견하지 않았을까?

마리로즈가 풀려나고 홀로 남게 된 크레이슐러가 영원히 고독 속에 떨지 않게끔, 언젠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 아닐까?

‘가능성 높은 추측이다. 파그마에게도 양심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파그마가 눈물을 흘렸었기에, 브라함의 육체를 온전하게 보존했었기에 이끌어낼 수 있는 추론이다.

한참을 생각해 본 끝에 결론을 내린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신의 말을 믿도록 하지. 그럼 파그마는 정확히 어디에 크레이슐러의 시체를 안치한 거지?”

파그마가 크레이슐러의 시신을 묻겠답시고 무후총의 심층까지 내려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만약 그가 바알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고 해도 무후총의 망령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도중에 한 번 격을 훼손당했던 산군도 자신의 영역에선 이 정도다.’

아마도 상위 신이나 고룡급이다.

산군보다 오랫동안 존재해온 무후총의 망령을 파그마가 설득하거나 제압했다고 보는 건 비현실적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무후총 내부는 내가 헤아릴 영역이 아니니까. 무덤과 연결 된 지하갱도 중 어딘가 한 곳에 안치됐을 거라고 추측하는 게 고작이다.”

“갱도가 몇 개나 되는데?”

“갱도마다 수백의 망자가 길을 지킨다는 풍문으로 추측하건대 최소 100개 이상이지 않을까 싶군.”

“...그래? 어차피 관심 없었어.”

“...?”

“아까도 말했잖아. 크레이슐러를 부활시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역시 크레이슐러와는 인연이 아니다...

깔끔하게 미련을 버린 그리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석좌 아래서 그를 멍하니 지켜보던 수호자들이 혹 시선이 마주칠까 황급히 눈을 깔았다.

산군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신격을 그들은 처음 보았다. 고절한 무력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드에게 절로 경외심을 품었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당신의 부인 ‘아이린’의 신격이 올랐습니다.]

“떠나기 전에 이걸 받아라.”

“이건...?”

“침입자들을 포식하고 체화한 기술 중에서 제법 쓸 만한 것들을 추려봤다.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구나.”

[<잊힌 전설의 스킬북> 3개를 습득하였습니다.]

[<잊힌 신화의 스킬북> 1개를 습득하였습니다.]

“...”

상상도 못한 어마어마한 보상에 그리드의 말문이 막혔다.

잠시나마 산군을 의심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고맙다. 보답이라기엔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레니어가 안전할 수 있게끔 밖에서 나도 나름 신경 쓸게.”

그리드가 느끼기엔 정말로 무의미한 약속이었다.

그 누가 그레니어를 침략하든 결국 산군의 먹이가 되고 말 테니까.

한데 의외로 산군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로 족하다.”

[그레니어의 산군과 호감도가 10 올랐습니다.]

큰 사건 없이(?) 많은 걸 얻은 모험이었다.

항상 이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고 뿌듯했다.

그런 그리드의 혼잣말을 들은 랜디의 표정이 왠지 우울해졌다.

소녀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상태인지라 더욱 가엾어 보였다.

“냐옹.”

노에가 묵묵히 위로해줬다.

흰색 벙어리장갑을 낀 듯한 말랑말랑한 앞발이 어깨를 토닥이자 랜디의 기분도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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