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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47화 (1,437/1,794)

템빨 72권 - 14화

예로부터 산은 신령스러운 장소로 취급받았다.

그레니어 또한 그랬다.

광야에 홀로 솟은 산.

워낙 신비로운 광경이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기암절벽 위에 고고히 선 소나무에 영약이 맺힌다는 헛소문이 돌았는데 곧장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마치 홀린 듯이 그레니어를 방문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영약과 보물을 찾아 산을 들쑤셨다.

한때 산군은 그들을 지켜만 보았다.

석산에선 귀한 자연을 해치고 짐승들을 재미로 사냥하는 그들의 행태에 분노하면서도 잠자코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다.

당시 산군은 개념에 가까운 존재였다. 실체하지 않았다.

산에는 신령이 있게 마련이라는 사람들의 막연한 믿음이 만든, 아직 희미한 정령에 가까웠다.

그래서 처음 몸을 얻었을 때 산군은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분노를 표출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격하며, 빙의한 곰의 털을 인간들의 피로 물들였다. 침입자들을 거침없이 살육했다. 그것이 응당 자신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침입자에게 새끼를 잃고 자신은 산 채 쓸개즙을 내어주던 어미 곰의 바람을 들어서다.

침입자에게 껍질이 벗겨져 겨우내 얼어 죽은 나무의 원한을 들어서다.

침입자의 노리개로 전락한 화전민들의 분노를 들어서다.

산군은 산을 위해 태어났다. 산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게 당연했다.

새끼 잃은 짐승의 몸과 죽어가는 화전민의 몸을 빌려서 침입자들을 쫓아냈다.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레니어를 찾아왔다.

돈에 눈 먼 용병들이, 갑옷을 무장한 군대가,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전사와 성직자들이 산군에게 도전했다.

그쯤부터 산군은 괴물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레니어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존재하지도 않는 산의 영약이 아닌 산군으로 바뀌어 있었다. 복수와 질서를 논하며 산군 토벌을 대의로 세웠다.

그럴수록 그레니어는 결속했다.

나무들과 짐승들, 그리고 화전민들은 침입자들의 폭력을 잊지 않았다. 한마음으로 뭉쳐 산군의 승리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렇게 무수한 세월이 흘러 산군은 전설이 되었다.

용병들과 군대는 더 이상 그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용사, 혹은 전설이라고 불리는 자들만이 그레니어를 등반했다.

그들과 싸워 이길 때마다 산군은 강해졌다.

도전자들의 격과 육체를 빼앗으며 진화해갔다.

새로운 신화의 태동이었다.

그레니어와 산군은 점차 민간에서 멀어져갔다.

최소한의 자격을 지닌 자들에게만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게 벌써 천 년 전이다.

***

‘저놈... 저놈이 감히 우리를 기만하다니!’

살아남은 수호자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사력을 다해 싸운 적이 한낱 하수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죽인다...!’

수호자들이 가녀린 여성에게 살심을 품었다.

물론 대놓고 표출하진 못했다.

겉모습은 저래도 형제를 일격에 죽인 괴물이다.

여태껏 산군에게 도전했던 그 누구와 비교해도 격이 높았다. 감히 덤비지 못했다.

물론 산군과 비교해선 하찮을 것이었다.

수호자들은 반드시 설욕할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기회는 빠르게 찾아왔다.

“좋다. 그대가 이 석좌에 오를 수 있다면 말벗 정도론 삼아주마.”

산군이 여성에게 손을 까닥였다.

산군이 말하는 석좌란 그레니어 그 자체를 뜻한다.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켜켜이 얽히고 쌓여 만드는 것으로 오직 산군만을 위한 좌석이다.

그곳에 오르라 함은 그레니어의 의지에 저항하라는 의미였고, 사형을 선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레니어를 침략했던 자들 중 석좌에 앉아본 이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쯔단.

수호자들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 된 이름이다.

신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산군의 석좌에 앉았었다.

단, 죽어서 앉았다.

그레니어의 의지에 심장을 꿰뚫려 즉사하고도 무려 다섯 걸음을 더 나아가 기어코 산군의 곁에 도달했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 또한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산군은 약속을 지켰다.

존재하지도 않는 영약을 만들기 위해 신격을 소모해서 쯔단의 모친을 살렸다. 그 여파로 수백 년을 약화된 채 살아갔을 정도다.

[석좌에 오르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다고 쯔단이 경고합니다.]

쯔단이 다급히 외쳤다.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리드는 쯔단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석좌에 오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다섯 걸음의 전설> 퀘스트에 서술 된 이야기를 통해서다.

‘산의 의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거다.’

무려 천 년 이상을 존재하며 무수히 많은 전설과 신화의 무덤이 된 산, 그레니어의 의지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를 무형지기나 심상 등의 시스템으로 적용할 경우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감히 추측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걸음을 내딛었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지.’

산군의 강함과 별개로 최소한의 목적은 이루고 싶다.

쯔단의 전직서.

반드시 쟁취해야 할 물건이다.

여기서 두렵다고 물러났다간 평생 얻지 못할 확률이 높다.

콰드드득!!

송곳처럼 뾰족한 산봉우리들이 너울거렸다.

암벽에 균열이 생기고 파편들이 비산하였는데 눈보라처럼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천재지변이다.

그 외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자신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큰 재앙이라며 쯔단이 경악합니다.]

‘당연하겠지.’

쯔단이 방문했던 시절과 지금의 그레니어를 비교하는 건 어리석다.

당시로부터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니까.

그 세월의 간극 동안 꾸준히 전설과 신화를 포식하고 체화해온 산군의 영향을 받아 그레니어의 격도 덩달아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드는 충분히 감안했다.

저벅.

그리드가 크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고 쇄도해오는 돌멩이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방패를 거머쥔 갓 핸드들이 주변을 맴돌며 모조리 차단해주었으니까.

“저건 아무리 봐도 대단한 권능이다...”

수호자들이 탄식했다.

파괴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손. 어떤 동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 무한히 가동하는 듯했다.

물론 여기선 딱히 의미가 없다.

그레니어의 의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거센 바람이 당신을 짓누릅니다.]

그리드가 두 번째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바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리드를 대지에 못 박을 기세로 짓눌렀다. 콰드득! 그리드가 딛고 선 땅이 비명을 지르며 움푹 파였다.

‘이건...?’

그리드의 스탯 활용 능력은 최고 수준이다.

특히 근력 스탯을 1도 낭비 없이 써먹는 게 가능했다.

전투뿐만 아니라 대장일에서도 주요하게 작용하는 스탯이므로 활용법을 자연히 단련해왔다.

이 순간 그리드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고 있었다.

한데 보폭을 옮기는 게 불가능했다. 태산 같은 무게를 품고 밀어닥치는 바람 탓에 손가락조차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드는 판단했다.

‘절대 판정이다.’

대상의 능력치와 관계없이 무조건 짓누르는 힘.

이 또한 쯔단이 겪었을 때와 비교해 성장한 부분일 터다.

괜찮다.

그리드에게도 같은 원리의 권능이 있었으니까.

‘살레오스의 힘.’

무조건 이기는 힘끼리 겨루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비긴다.

꽈창!!

살레오스의 힘을 빌린 그리드가 재차 폭풍에 맞서자 굉음이 울렸다.

폭풍의 절대 판정이 살레오스의 힘을 상쇄하면서 충격파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드는 재차 걸음을 옮겼고, 판정을 소모한 폭풍은 그를 더 이상 막지 못했다.

쿠르르르릉!!

이번엔 산봉우리들이 직접 움직였다. 암벽의 파편을 나부끼고, 폭풍을 일으키는 수준이 아니라 창처럼 그리드에게 쏘아졌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그리드는 작은 점에 불과했다. 산봉우리가 너무 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

그리드가 뽑아 쥔 도는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수호자들의 시선에 못 박혔다.

동시에.

콰자자자자자자장!!

그리드를 덮쳤던 산봉우리들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수호자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드가 발도한 순간 산봉우리가 이미 베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지하지 못했었기에.

쿠르르르릉...

산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그리드의 시야 위 봉우리는 모조리 베여 사라졌으나 그리드의 발밑에는 아직 무수히 많은 봉우리가 남아있었다.

당장 그리드가 딛고 선 땅이 봉우리 중 하나였다.

쾅! 쾅! 콰아아앙!!

그리드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봉우리들이 그가 딛고 설 땅을 빼앗았다.

사소한 문제였다.

플라이 마법, 탐욕의 활용, 반용족의 날개 등.

그리드에겐 비행 수단이 아주 많다.

하지만 그리드는 피하지 않았다. 출렁이는 땅을 구태여 밟았다.

<지신>의 발동 조건을 진즉에 충족한 상태였다.

‘쉽게 가려면 애초에 순보를 썼지.’

하지만 맞선다.

시련은 피하는 게 아니라 극복해야만 의미가 있는 거니까.

무엇보다도 그리드는 시련의 내용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꽈드드드드득!!

땅이 출렁임을 멈췄다. 단단하게 굳어서 석좌까지 이어지는 다리로 변모했다.

저벅.

그리드가 다리에 오르는 순간.

[그레니어의 의지가 당신을 거부합니다.]

쿠웅!!

거대한 무게가 그리드를 또 다시 짓눌렀다.

이번엔 풍압 등의 물리법칙이 아니었다.

형태가 없는 힘.

무형지기다.

진정한 시련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이길 수 있을까.’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가 화신의 폭풍을 전개했고,

쿠르르르릉...

산의 의지가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그리드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그리드는 어느새 석좌에 도달해 있었다.

잠자코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산군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속내는 얼떨떨했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되도록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를 바라보는 산군의 표정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산의 의지가 절대자의 기세에 압도당했군...”

화신의 폭풍에 담긴 <무한의 검기>는 용살자 하야테가 남긴 흔적이다.

그는 산군에게도 미지의 존재인 바.

산군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그레니어가 감당할 리 만무하다.

제아무리 그레니어가 대단하다고 해봤자 산이다. 자연의 일부에 불과했고 한계가 명확했다.

“걸음에는 백호 신의 격이, 심상에는 주작 신의 격과 절대자의 흔적이 혼재하고 하물며 대악마의 권능까지 썼던가...”

그리드의 다섯 걸음을 되짚어보는 산군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차츰 짙어졌다.

“혼자이되 여럿이라. 그대는 나를 닮았다.”

탄생 이후 처음 느끼는 동질감.

산군은 그리드에게 명백한 호감을 느꼈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서 기뻤다. 안도감에 가까웠다.

[그레니어의 산군과 호감도가 10 올랐습니다.]

‘뭐냐?’

예상과 다르게 흐르는 분위기가 그리드를 당혹시킨다.

티내지 않으려고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에게 산군이 질문했다.

“왜 순보를 쓰지 않았지?”

석좌에 오를 것.

산군이 그리드에게 걸었던 조건이다.

그 외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순보를 쓸 수 있는 그리드에겐 손쉬운 시련이었다.

산군 나름의 호의였다. 풍문을 통해서 그리드에게 동질감을 느껴왔기에 베푼 호의였다.

한데 그리드는 굳이 두 발로 걸어서 석좌에 올랐다.

허튼 호의는 거부하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단순히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의아해하는 산군에게 그리드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쯔단이 겪었던 고통을 체험해보고 싶었으니까.”

“...감상은?”

“이 험난한 시련을 죽어서나마 이겨낸 쯔단을 존경하게 됐다.”

단 한 점의 거짓도, 과장도 섞이지 않은 감상이었다.

예사롭게 말하여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진실이었다.

그리드는 쯔단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당신의 마음을 읽은 쯔단이 크게 감격합니다.]

[그레니어의 산군과 호감도가 10 올랐습니다.]

“...??”

쯔단이 감동하는 거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산군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럴 만하다. 그는 내 기억에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인물이니.”

고개를 끄덕인 산군이 그리드에게 낡은 서적을 건네주었다.

“내가 보고 체화한 쯔단의 기술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그대가 바라는 것이겠지.”

[<전설의 투사 쯔단의 기서>를 획득하였습니다!]

“...”

레전드리 전직서 얻기 참 쉽다.

그리드가 체감하기엔 그랬다.

하지만 진실은?

우선 제4위 대악마 가미긴을 해치운 뒤 그레니어를 찾아 산군의 인정을 받아야만 얻을 수 있는 전직서다.

또한 그레니어는 북쪽 끝의 동굴처럼 숨겨진 금지다.

쯔단의 기서의 획득 난이도는 파그마의 기서의 획득 난이도를 아득히 상회했다. 어쩌면 플레이어는 영영 얻지 못할 물건일 수도 있었다.

“악마들의 침략을 감지했을 때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산군이 고백한다.

“나는 그레니어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상이 멸망하면 그레니어 또한 위기에 빠질 것이 자명하니 지상의 멸망을 원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들려온 그대의 활약상이 내게 위안을 주곤 했지.”

“...”

그리드는 라드볼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우리들 결사와 적야의 대도를 만나본 너는 잘 알겠지.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강자가 정말로 많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어. 비반 같은 등신은 그나마 애교 수준이고 쓰레기, 병신, 개새끼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무후총의 망령과 대수림의 질풍, 그레니어의 은둔자를 조심해라.”

라드볼프는 분명히 이와 같이 경고했었다.

한데 실제로 만나게 된 그레니어의 은둔자 즉, 산군은 지극히 평범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역시 편견은 무섭구나.’

편견은 거인족의 지혜조차도 흐리게 만든다...

생각하는 그리드의 손목을 산군이 꽉 붙잡았다.

고목처럼 메마른 피부의 감촉이 오싹했다.

“그대는 오늘부터 이곳에 남아라. 나와 함께 영원히 그레니어를 수호하자꾸나.”

‘편견은 개뿔.’

거인족의 지혜는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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