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10화
기인이사가 흔한 세상이다.
세상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구역이 많았고 폐쇄적인 장소일수록 괴이가 판치기 마련이었다.
‘진짜 별에 별 놈들이 다 있구나.’
그레니어의 원주민들은 복식부터 괴상했다.
몬스터의 가죽을 날것 그대로 뒤집어썼고 두개골을 장신구 삼았다.
사람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려드는 성정에 걸맞은 차림새였다.
그리드는 그들을 태연하게 마주했다. 낯선 야만족들을 통해서 세상의 크기를 실감할 뿐이다.
“무슨...?”
반면 원주민들은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여러 세계를 목격하고 체험해온 그리드와 다른 까닭이다.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그레니어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그들에게 그리드의 초월적인 존재감은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다.
“나는 뭐로 보이지?”
“...”
기척도 없이 나타나 동포들을 낚아챈 사내.
그리드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 침묵만이 맴돌았다.
주황색 극광으로 번지는 템빨신의 기파에 현혹된 자들이 많았다.
우리의 아침과 낮을 밝혀온 태양이 사실은 신이셨다. 신께서 강림하셨다. 신께서 노하셨다. 등등...
원주민들의 머릿속에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른 생각들이 언어로 구현되기 직전이었다.
“갈!!”
오우거의 두개골을 뒤집어 쓴 여인이 외쳤다. 목에 핏대가 서도록 힘껏 소리쳤는데,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소개울 부족 족장인 그녀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현장에 난입하고 고작 몇 초가 지났을 뿐이다.
한데 침입자를 바라보는 부족민들의 눈빛에 선망이 떠올랐다. 마치 산군의 수호자들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지려하고 있었다...
“아주 고약한 사술을 쓰는 놈이다! 요괴들의 왕이 틀림없도다! 귀를 막아라! 입을 닫아라! 눈을 똑바로 떠라! 창을 쥐어 놈을 찔러라!!”
족장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그리드의 손에 붙잡혀 발버둥치는 동포들은 괘념치 않았다.
남이 어떤 꼴을 당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원주민들은 척박한 산에서 제 한 몸 건사하며 살아왔다. 오직 자신의 안위만이 귀중했다.
“우와아아아!!”
소개울 부족민들은 족장에게 복종한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벼랑에서 채집한 꿀도, 몹시 귀한 산양의 젖도 모두 족장이 관리하기 때문이다.
족장에게 복종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스륵...
그리드가 두 명으로 분열했다.
별 거 아니다.
단순히 랜디를 소환했을 뿐이다.
신비 숲의 도플갱어.
그녀는 파그마의 호의 아닌 호의 덕분에 파그마의 모습과 능력을 복제하고 오랜 세월 유지했었다.
그리드를 만나기 전부터 전설의 격과 힘에 익숙했다는 뜻이다.
이후 그리드와 함께하며 꾸준히 발전해오기도 했다.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할 뿐만 아니라 그리드의 능력치 50퍼센트를 구현하는 경지에 올랐다.
즉,
“크아아아악!!”
“히이익!!”
적수가 드문 강자였다.
정작 그리드는 랜디를 고기방패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건 랜디를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평소 그리드가 상대하는 적들이 워낙 강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평범한(?) 적들을 상대할 때는 랜디 혼자서 충분했다.
“화, 환술...?! 저 요괴 놈의 사술이 도를 넘었... 커헉!”
원주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갑자기 둘이 된 침입자가 손과 발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데 반응조차 못했다. 눈앞이 번쩍하는 순간 혼절하기 일쑤였다.
“저, 저분은...?”
밧줄에 발목이 묶여 대롱대롱 매달린 몽크들.
도무지 대화가 통하질 않는 야만족들에게 붙잡혀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폈다.
도리를 모르는 만큼 맹수처럼 사나운 야만족 전사들이 양 떼로 전락해서 쫓겨 다니고 있었다.
꼴불견이라고 비웃는 건 억지다.
침입자가 너무 강했다.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질풍처럼 뻗어나가 권과 각을 휘두르는 움직임이 수려했다.
단 하나의 동작으로 모든 방위를 점령하고 야만족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솜씨가 실로 고강했다. 평생토록 산속에서 권각술을 연마해온 고인인가 싶었다.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헉...! 테, 템빨신...!”
몽크는 보통의 종교인과 다르다. 자신이 섬기는 신이 고결하고 전능하다는 착각 따위 하지 않는다.
실제로 몽크가 섬기는 신들은 대부분 평범한 인간 출신이라는 전승이 있다.
사냥의 신 드비리온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 시절 드비리온은 최고의 사냥꾼이었다.
매일 많은 산짐승을 잡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죽과 고기를 마을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오직 부유한 사람에게만 제값을 받고 팔았다.
마을사람들이 영주에게 착취당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던 건 어디까지나 드비리온의 온정 덕분이었다.
그가 베풀어준 가죽 덕분에 추위에 떨지 않았고, 그가 베풀어준 고기 덕분에 배를 곯지 않았다.
심지어 드비리온은 사람들에게 사냥을 잘하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 전부 사냥을 잘하게 되어 정작 자신이 배를 곯게 됐을지언정 후회하지 않았다.
급기야 짐승이 사라진 산속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순간까지 그랬다.
몽크에게 있어서 신이란 그런 존재다.
미련한 구석이 있을지언정 배움을 구하고 존경할 만한 대상.
그러므로 더욱 더 신을 존중했다.
몽크는 삼신교나 야탄교 신도와 달리 타인이 섬기는 신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리드가 인간 출신이라고 해서 편견을 품거나, 전능하지 못하다고 해서 부정하거나, 행적을 평가하며 비하하거나.
일체 그런 것 없이 신이라는 이유로 긍정했다.
“허허... 드비리온께서 우리를 산군이 아닌 템빨신께 인도하셨던 건가 봅니다.”
노년의 몽크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한참을 거꾸로 매달린 탓에 피가 쏠려 잔뜩 부운 얼굴로 허허 웃는다. 어지간히 무던했다.
몽크의 기질이었다.
수도자인 그들은 시련에 흔들리지 않는다. 시련을 인내하며 극복하는 과정 자체를 수련으로 여겼다.
물론 NPC에게 국한되는 이야기다.
플레이어인 메드의 사고는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몸을 비틀며 일행을 재촉했다.
“웃을 때가 아니라 이틈에 어서 탈출해야 합니다.”
“허허, 소지품을 모조리 빼앗긴 탓에 밧줄을 끊기 어렵구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평소에 복근과 저작근을 더 열심히 단련할 걸 그랬습니다.”
윗몸을 일으켜 이빨로 밧줄을 질끈 물고, 숨이 차 늘어졌다가 다시 윗몸을 일으켜 이빨로 밧줄을 질끈 물고.
그렇게 계속 반복하며 대화하는 일행이었다.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느긋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는 그들 사이에서 오직 메드만 조급했다.
‘아무래도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이다.
직업 퀘스트를 진행하느라 고행의 길을 떠날 때마다 얼마나 많은 위기와 죽음을 겪었던가.
몽크끼리 단체 활동을 할 때면 생존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곤 한다.
질근질근.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일행과 똑같이 행동하는 메드였다.
있는 힘껏 허리를 당겨 발목에 묶인 밧줄을 이로 씹었다.
사실 그 외엔 탈출 방법이 없었다.
그리드에게 도움을 구할 관계도 아니었고.
“그런 식으로 해서 어느 세월에 탈출하려고?”
“...!”
메드가 화들짝 놀랐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그리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밧줄을 유심히 살피는 표정이 점잖고 무게가 있었다.
어느덧 7년 전.
제1회 국가대항전에서 만났던 그리드와 지금의 그리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스킬 사용은 가능하지 않나?”
그레니어의 결계는 마법의 사용을 차단할 뿐이다.
말인 즉, 밧줄을 끊는데 왜 스킬을 쓰지 않고 삽질하느냐 이거다.
얼굴을 붉힌 메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몽크에겐... 실용적인 스킬이 적다...”
“차력사에 가까운 느낌이긴 하지. 일단 마셔.”
그리드가 메드에게 물약을 건네주었다.
실시간으로 소모되는 중인 그의 생명력을 확인한 것이다.
“이걸 왜...?”
“죽을 것 같아서.”
“아니, 날 왜 돕는 건데?”
“사람이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하잖아?”
“...”
Satisfy는 경쟁 사회다.
특히 랭커는 아군조차도 경쟁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플레이어가 NPC를 돕는 거야 도의적 차원에서 흔한 일이지만, 같은 플레이어를 조건 없이 돕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고맙다.”
메드가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벌렸다. 그리드가 흘려 넣는 물약을 순순히 받아마셨다.
그리드는 밧줄을 살폈다.
‘엄청 질기고 단단하군.’
나무를 꼬아 만든 밧줄이 금속처럼 단단했다. 어떤 가호가 깃든 듯했다. 단순히 힘으로 끊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빨로 끊으려던 게 미친 짓이었지. 밧줄을 만든 주술사를 없애야 풀 수 있는 일종의 봉인 같은데...?”
민망한 표정으로 말하던 메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드가 칼을 한 번 휘두르자 밧줄이 툭하고 썰려나간 까닭이다.
정수리가 땅에 닿기 직전 낙법을 취해 똑바로 선 그가 그리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사이 다른 몽크를 모두 풀어준 그리드가 메드의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역행 기원을 쓴 건가?”
“어? 어...”
몽크는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지만 의외로 지속력이 약하다.
대부분의 스킬이 대가성을 띠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즉시 생명력과 상처를 치유하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역행 기원이 대표적인 예다.
[템빨신 ‘그리드’가 당신에게 <극상급 회복 물약> 100개를 건넵니다.]
신화 등급이 되면 플레이어가 아니라 신이라고 표기되는 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고 흥미로운 표정을 짓던 메드가 문득 당황했다.
“이건 또 뭐...”
“산에선 드비리온에게 기원을 올릴 수 있다고 들었는데. 드비리온이 응답할 때까지 그거 먹으면서 버텨. 레이단 연금소에서 만든 특제 상품이라 효과는 충분할 거다.”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레이단표 극상급 물약의 효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가치 또한 잘 안다.
하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호의의 고하를 떠나서, 그리드가 자신에게 대체 왜 호의를 베푸는 건지 메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강하잖아. 전쟁 공헌 순위도 500등 근처던데, 소속도 없이 그 정도 수준이면 전쟁 내내 바쁘게 뛰어다녔다는 뜻이겠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 많이 도와줬을 거 아니야. 나도 똑같은 거야.”
“...”
“정 찝찝하면 나중에 뭐라도 해서 갚던가.”
“...그래, 반드시.”
그리드가 슬며시 웃었다.
결의에 찬 메드의 표정이 보기 좋아서다.
앞으로 계속 될 악마와 신들과의 전쟁에서 도움을 청할 상대가 한 명 더 늘어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드에겐 더 강하고 더 많은 아군이 필요했다.
‘끝났나.’
마침 주변이 잠잠해졌다.
뒤를 돌아보자 게거품을 물고 기절해있는 수십 명의 원주민이 보였다.
오우거의 두개골을 투구처럼 뒤집어썼던 여성은 맨얼굴을 드러냈는데 이름이 무려 황금색이었다.
메드가 경악했다.
‘도플갱어 혼자서 저 무지막지한 놈들을 제압했다고? 그것도 고작 몇 분 만에?’
랜디는 그리드의 오랜 전력이다.
플레이어들은 랜디의 정체가 도플갱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몬스터에겐 응당 한계가 있는 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질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한데 랜디에겐 도무지 한계가 없어보였다.
메드를 포로로 붙잡을 정도로 강력한 원주민 수십 명이 랜디 한 명에게 제압당했으니 말 다했다.
물론 메드는 인질로 잡힌 동료들 탓에 발목을 붙잡혔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랜디가 훨씬 강했다. 메드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오오... 과연 템빨신이십니다. 소문대로 고강한 무위로군요.”
“덕분에 개안하였습니다.”
랜디를 둘러싼 몽크들이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드가 아닌 랜디를 본체라고 착각하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반응이긴 했다.
대부분의 활약은 랜디가 했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끄러움은 메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한숨 쉰 그가 그리드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이건 내 작은 성의니까 받아줘. 이걸로 은혜를 갚은 셈 치겠다는 게 아니야. 나중에 꼭 제대로 보답하마.”
[플레이어 ‘메드’가 당신에게 <사냥신의 법보>를 건넵니다.]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