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9화
무후총의 망령, 그레니어의 산군, 대수림의 질풍.
신화 찬탈자, 혹은 포식자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학센은 그들의 존재를 긍정합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수천, 수만의 인신이 난립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쯔단과 파일볼프가 동의합니다.]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나약하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인신은 범람해왔다.
그리드가 처음 신이 됐을 당시 의외로 파급력이 약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의 신들은 인간들의 염원으로 비롯한 신을 낮게 보았다.
[학센은 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염원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커질수록 염원의 종류가 다양해졌고, 그로인해 우상으로 삼을 대상이 난립한 거라고 주장합니다.]
“흠...”
그리드는 별로 공감하지 못했다.
동대륙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까닭이다.
양반들은 인간의 염원으로 비롯한 신을 특별하게 여기며 경계했다. 시기하고 질투했다.
물론 단순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인공적으로 배양된 신-후보-이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알고 있다.
무신 치우 또한 인간들의 염원으로 비롯한 신임을.
‘여러모로 왜곡 된 걸 수도 있어.’
인신은 범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그리드도 수차례 들어왔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일까?
그리드는 자신과 같은 존재를 여태껏 보지 못했다.
인신이라고 해봐야 당장 떠오르는 건 몽크들이 섬기는 몇 토착신이 전부였다.
하나 같이 특정 지역에선 귀한 취급을 받는 신들이었다. 마치 동방의 사신처럼 말이다.
한데 그들이 하찮고 흔하다니...
인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누군가의 의지가 세계에 편견을 심은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든다.
“그건 그렇고 쯔단 당신도 신화 찬탈자들을 긍정하는 겁니까? 당신은 산군에게 살해당했다면서요?”
[쯔단은 죽음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먼저 산군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설명합니다.]
“...”
그리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긴장에 의해서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눈치 챈 까닭이었다.
신화 찬탈자들의 위세가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
‘전설에게 죽음을 수긍시킬 수준이라...’
사실상 신급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신급인 게 당연하다.
신화 찬탈자들은 고대의 거인족이 멸망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수백 년 단위가 아닌 천 년 이상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높은 격을 쌓았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당장 아스가르드와 지옥만 봐도 신화 찬탈자와 충돌을 꺼려하고 있다.
지옥과 인계에 연결 된 포탈 중 신화 찬탈자의 영역을 침범한 포탈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단적인 증거다.
‘도전하기엔 아직 이른가?’
한때 그리드는 자신이 지존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오만했던 시절도 있다.
짧은 열병 같은 것이었다.
지금의 그리드는 자신의 수준을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최소한 무적을 논할 위계는 아님을 알았다.
바알, 리파엘, 미르, 제라툴, 드래곤, 그리고 태초신들과 치우 등.
세상엔 강한 존재가 워낙 많았으니.
‘난 언제쯤 무적이 될까.’
이 순간 품는 의문이야말로 지고의 오만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그리드였다. 그럴 자격이 있기도 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순 없지.’
그리드는 크리스가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봐왔다.
그가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수백의 마물이 잿더미로 산화하는 광경을 보았다.
공격 스킬이라고는 십톤검, 백톤검, 천톤검 정도밖에 없는 노말 클래스로 그 정도다. 세컨드 클래스 폭군의 힘을 활용하는 능력이 신기에 가까웠다.
크리스가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하면 어떨까.
정말로 든든할 것이다.
신화가 된 까닭에 하위 직업을 얻지 못하는 그리드 입장에선 재능 있는 동료들을 성장시키고 싶었다. 지금도 충분히 의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의지하고 싶었다.
거센 풍랑을 맞이한 마음을 진정시킨 그가 점차 가까워지는 태산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레니어.
마치 두 발로 선 곰을 연상시키는 모양새의 석산이다.
녹림이 듬성듬성하여 벌거벗은 꼴인데, 기이하게도 산세의 구조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안구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가 모조리 왜곡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멀리서 봤을 땐 굉장히 커보였는데 초라하군요.”
높고 가파른 절경에 흠 잡을 곳이 없다. 작다고 깎아내리는 건 억지다.
하지만 산줄기에 포함되지 못하고 덩그러니 놓인 산이다.
심지어 광야를 홀로 장식했다.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파일볼프가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저 산에 도전했다가 죽은 동포가 무척 많다며 조심하라고 조언합니다.]
[학센이 고등한 결계의 흔적을 느낍니다. 술식과 마력을 기반으로 삼는 마법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에 가깝다며 경악합니다.]
[쯔단이 겉모습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저 산의 규모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며 미로처럼 복잡하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했었다고 밝힙니다.]
경고는 필요 없었다.
그리드는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Satisfy 9대 불가사의, 10대 불가사의 따위로 불리며 여러 사상자를 발생시킨 장소니까.
특이한 모습에 현혹되어 등반을 시도했다가 미아가 되어 끔찍한 체험을 했다는 후기가 수두룩하다.
애초에 이곳까지 도달한 사람이 거의 없어서 도시괴담 취급을 받기 일쑤였지만.
‘괴담 취급을 받을 만해.’
대부분의 금지가 그렇듯, 이곳에선 스크린 샷과 동영상 촬영이 금지된다.
우연히 방문한 사람이 증거를 제출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구조다.
템빨단원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지급된 스컹크 지도의 ‘원본’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스컹크가 만든 지도엔 여기까지 오는 길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다만 산 내부 구조는 물음표뿐이다.
스컹크의 말에 따르면 입산할 때마다 산세의 구조가 바뀐다고 한다.
‘별 소득도 없이 몇 번이나 죽어서 탐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
내가 조만간 가이드 해주자.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쯔단이 위축됩니다.]
[파일볼프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당신을 만류합니다.]
[학센이 마나의 흐름이 정지했다고 경고합니다.]
“위험해질 것 같으면 곧바로 물러날 거니까 걱정 마요.”
[금지 ‘그레니어’에 입산하였습니다.]
[마나의 자연 회복이 금지됩니다. 모든 종류의 마법 사용이 봉인되며 주문서와 아이템에 각인 된 마법도 포함됩니다.]
[귀환 주문서가 비활성화 됩니다.]
[학센과 파일볼프가 탄식합니다.]
[쯔단이 자신의 최후를 떠올리며 질색합니다.]
“...”
마법의 사용에 제한이 생길 거란 건 예상했었다.
학센이 마나의 흐름이 멈췄다고 경고했으니까.
하지만 설마 귀환 주문서의 발동 원리도 마법으로 판정될 줄은 몰랐다.
‘괜찮아.’
그리드가 애써 당황을 억눌렀다.
그에겐 귀환 주문서를 대처할 만한 수단이 있었다.
[불사 상태에서 ‘긴급 복귀’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시공간의 개념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신전 중 한 곳으로 복귀합니다. 단, 불사 돌입 후 7초 내에 사용해야합니다. 7초가 지나면 스킬이 비활성화 됩니다.]
‘설마 이것까지 막히진 않겠지.’
신의 죽음은 치명적이다.
격의 하락으로 직결된다.
하물며 상대가 신화 포식자라면 더할 것이다.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애써 노력하던 그리드가 문득 표정을 구겼다. 울화통이 치밀었다.
“아니 빌어먹을. 쯔단 당신은 이미 예전에 겪은 상황 아닙니까? 어떤 위험요소가 있는지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어요?”
[수백 년 전, 심지어 죽기 전에 겪은 일이라 기억이 흐릿했다고 쯔단이 해명합니다. 미안해서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학센과 파일볼프가 당신의 인성을 의심합니다.]
“...”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하고 다퉈봤자 뭐하나.
이래서야 단순한 고인 능욕에 불과하다.
깨달은 그리드가 입을 다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쯔단이 조금씩이나마 옛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나무의 가지가 자란 방향을 따라서 걷는 게 미로를 돌파하는 방법이라는 조언이 특히 큰 도움이 됐다.
***
만약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일평생 세계 일주를 반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지구의 모든 땅을 밟아볼 수 있을까?
단연코 불가능하다.
천운을 타고나 모든 국가를 여행해볼 순 있어도 그 국가의 모든 지역과 거리를 방문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물며 Satisfy는 지구 이상의 면적을 자랑한다.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장소를 탐사하는 건 어지간한 스킬의 혜택을 받지 않는 이상 힘들었다.
설령 스킬의 혜택이 있어도 방문할 수 없는 장소 또한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레니어다.
겉보기와 달리 규모가 상당히 큰 이곳 그레니어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갔다.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사회의 주체는 천 년도 더 전부터 존재해온 부족들.
대대로 삼군을 섬겨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겐 산군이 유일한 신이자 만물의 지배자였다.
그레니어가 의외로 크다한들 결국 우물에 불과하다는 증거다.
그레니어의 원주민들은 세상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다.
얕은 경험과 미개한 지식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어리석은 철칙을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몹시 저열한 족속이었다.
‘이런 놈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 나는 바보고.’
플레이어 메드는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았다.
드비리온을 섬기는 몽크들과 함께 고행의 길을 걷던 도중 우연히 도착한 광야.
그곳에 우뚝 선 산을 마주한 순간 그는 전율에 휩싸였었다.
마치 곰이 하늘을 떠받치고 선 듯한 산세를 보고 자신이 그 유명한 불가사의 중 하나에 접근했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운명을 느꼈다. 히든 퀘스트의 전조라고 해석했다. 드비리온이 그레니어의 산군에게 자신을 인도한 거라고 확신했다.
반드시 산군을 만나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느꼈다.
전쟁이 한창 중이기에 더욱 그랬다.
메드와 몽크들이 고행의 길을 걸어온 이유는 인마대전 때문이었다.
대륙 각지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우라는 신탁을 받고 온 대륙을 떠돌며 악마들을 퇴치해왔다.
이와 같은 상황에 산군과 만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산군이 도움을 줄 거라는 믿음이 자연히 생겼다.
하여 등반을 시도했다.
처음 흐름은 좋았다.
메드는 한때 통합랭킹 33위까지 올랐던 인물.
현재까지도 100위권 랭킹을 유지 중인 네임드 랭커다.
실력에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동료 몽크들과 함께였다.
여러 함정과 미로를 돌파하고 산의 중턱까지 오르는데 성공했다.
어쩌면 플레이어 최초의 업적일 수도 있었다.
산의 부족들에게 붙잡혀 포로로 잡히기 전까지만 해도 들뜬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었다...
‘이놈들하곤 말이 안 통해.’
직접 체험해 보고 확신한 사실이 있다.
그레니어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그레니어가 전부다.
바깥세상에서 악마들과 마물들이 천재지변급의 재앙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재앙이 언젠가 자신들에게까지 미칠 거란 사실도 당연히 몰랐다. 도움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요괴들아. 어서 본모습을 드러내라.”
원주민들이 밧줄에 묶여 거꾸로 매달린 메드 일행을 둘러쌌다.
두꺼운 철을 불에 달구면서다. 작고 얇은 칼을 숫돌에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산 밖에서 온 요괴들이 어찌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느냐. 가죽을 벗겨야 진짜 모습을 드러낼 셈이더냐.”
원주민들은 몬스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괜한 협박이 아니라 진짜로 가죽을 벗길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메드 일행을 재촉하는 여인이 특히 흉흉한 기세를 자랑했다. 그녀의 얼굴을 투구처럼 덮은 오우거의 두개골이 마치 메드 일행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했다.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지?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이야. 그레니어 바깥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
설명하던 메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비명을 삼키면서다. 복부에 꽂힌 단검이 그의 생명력을 대량으로 앗아갔다.
‘뭔 공격력이...?’
초네임드급 수준인가?
메드가 반사적으로 <역행 기원>을 썼다.
몽크의 궁극기 중 하나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생명력을 완전히 회복합니다.]
[손상 된 신체가 재생됩니다.]
[지속적인 생명력 하락을 겪습니다. 이 효과는 생명력이 최소치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죽음을 늦추는 사술이라니... 과연 요괴가 맞구나.”
여인의 음성이 한층 더 사늘해졌다. 그녀가 눈짓하자 칼을 갈던 원주민들이 메드 일행에게 바짝 다가갔다. 가죽을 벗길 칼을 하나씩 거머쥔 채였다.
‘이런 제기랄.’
단단히 잘못 걸렸다.
죽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손실인데, 죽음의 형태마저 역대 최악이다. 아마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왜 굳이 산에 올라선...’
괜히 금지가 아니었다. 불가사의는 불가사의로 남겨뒀어야 했다...
깊이 반성하고 후회하던 메드가 비명과 고함을 들었다.
조금 전까진 없던 사내의 모습이 한 발 늦게 인식됐다.
바람 한 점 없건만 흑발을 나부끼는 사내였다.
그의 커다란 양손에 얼굴을 붙잡힌 원주민들이 괴로워하며 허공에 발을 차댔다.
주황색 빛이 선명하게 번진다.
땅거미가 내려 차갑게 식은 산을 다시 태양이 비추는 듯했다.
“나는 뭐로 보이지?”
사내의 질문이 침묵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