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8화
쿠우우우웅...
“...”
천장이 있어야 할 자리가 파랗다.
오늘따라 유독 선명한 하늘이 이불처럼 대장간을 덮어주었다.
일부러 엿 먹이는 걸까?
처참히 무너진 대장간에서, 그리드는 진지하게 의심했다.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었다.
아니 왜 뭐만 하면 대장간이 무너지냐고.
라빗의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템빨골1의 진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알림창이 상념을 깨웠다.
하늘을 푸르게 만든 원인이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다.
새카만 마력 사이로 명멸하는 보라색 전광.
구름을 증발시키는 열기를 내뿜는 기세가 심상찮다.
[왕께 충성을...]
그리드 앞에 무릎 꿇는 템빨골1의 모습은 의외로 낯설었다.
지크와 닮은 듯하면서 달랐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탈색돼서 그런 걸 수도 있었고, 두 눈이 붉은 안광을 토해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새카만 마력을 갑주처럼 두른 까닭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체격이 커졌다는 점에 있었다.
템빨골1의 골격과 지크프렉터의 골격이 합쳐지고 재구성 되는 과정에서 자연히 생긴 변화인 듯했다.
서리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장신의 기사.
템빨골1의 바뀐 모습을 자랑스레 마주한 그리드가 상세정보를 확인했다.
이름:템빨골1
레벨:430
우선 레벨은 정상이다.
템빨골2가 리치가 됐을 때와 동등한 수치로 상승했다.
‘당분간 빨골2가 우위를 점하겠군.’
템빨골2의 현재 레벨은 461이다. 한 발 먼저 4차 전직하여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친 덕분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클래스명이야.’
댄싱 나이트 이딴 식이면 조금 화날 것 같다.
템빨골2가 댄싱 리치가 된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고 말았다.
직업:고대의 언어를 읊는 댄싱 데스나이트
“...”
템빨골1의 클래스명을 확인한 그리드가 처연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그래... 너희들 멋대로 해라.’
그 멋진 모습으로 탭 댄스를 추든, 왈츠를 추든, 아크로밧을 추든, 스트립 댄스를 추든 내 알 바냐...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다.
템빨골2처럼 활약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애써 자위한 그리드가 템빨골의 스탯과 스킬 목록을 열었다.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우선 근력과 민첩성이 대폭 상승했다.
근력이 4,000, 민첩성이 4,500으로 검술을 구사하기에 적합한 스탯 비율이었다.
기사치고 체력 비율이 낮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비율을 논했을 때의 이야기다. 체력은 3,500으로, 이마저도 동레벨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에 있었다.
보통 데스나이트의 단점이 약한 방어력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템빨골2처럼 통찰력 스탯이 생겼다.
수치는 동등하게 2,000.
높은 민첩성과 맞물려 강력한 무기로 승화 될 것이었다. 무지막지한 동체시력으로 대부분의 공격에 대응할 터였다.
전설이나 초월자의 위계가 아닌 이상 템빨골1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심지어 지력이 엄청나게 높아졌어.’
지력은 3,000.
아무래도 ‘룬어’를 쓸 수 있는 지크프렉터의 시신을 흡수해서 얻은 판정일 텐데 데스나이트가 아니라 마법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스탯의 총량만 따지면 템빨골2를 압도해.’
데스나이트도 기사는 기사다.
그리고 기사는 밸런스형 클래스를 대표하며, 밸런스형 클래스의 최대 강점은 스탯 총합에 있다.
강점과 약점이 뚜렷한 타 직업군과 달리 균등한 강세를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뚜렷한 강점이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템빨골1은 룬어를 쓸 수 있으므로 단점이 사라진다.
<고대 언어의 이해와 활용>Lv.5(숙련도 축적 불가)
7개의 룬어를 이해하고 활용합니다.
총 19개의 단어로 조합 가능하며, 각 단어가 품는 의미가 현상이 됩니다.
스킬 마나 소모:1개의 룬어당 6,500. 1개의 단어당 23,000. 단어의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소모 마나 2배 상승.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룬어당 10분.
*지금 단계에선 문장 구현이 불가능합니다.
‘...마나를 올려주는 템이 필요하겠는걸.’
지력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스킬의 마나 요구량이 너무 크다.
‘괜찮아.’
데스나이트의 가장 큰 약점은 지능이 낮고 신성력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템빨골1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기본 지능이 높고 신성력 내성을 템빨로 올릴 수 있다.
당장 룬어의 활용에 큰 자원이 소모된다고 해서 그걸 약점이라고 지적하는 건 억지인 셈이다.
‘기본적으로 약점 없는 데스나이트가 룬어라는 무기까지 손에 넣은 상황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템빨골1이 지크프렉터의 시신을 취하여 얻은 것은 룬어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
지크가 지크프렉터이던 시절.
그는 그랜드마스터라고 불렸었다.
룬어 외에도 다재다능하다는 강점이 있었다.
<올 마스터>Lv.마스터
패시브
모든 병장기를 달인의 경지로 다룹니다.
여러 학문을 섭렵하여 쌓은 지식을 기반으로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뭐든지 쉽게 배웁니다.
★체험한 스킬을 확률적으로 습득합니다. 최대 10개. 고등급 스킬을 우선적으로 습득하며 스킬 슬롯이 가득 찼을 경우 사용 빈도가 적은 스킬을 버립니다.
정작 지크프렉터는 증명하지 못했던 강점이다.
나태의 저주 탓에 활약할 기회 자체가 없었으니.
하지만 템빨골1에겐 저주가 없다. 템빨골1이 지크프렉터로부터 계승한 것은 능력이지 저주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템빨골1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올 마스터>는 템빨골2의 <공간 왜곡>과 비견할 만한 스킬이다.
권능이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닌 셈이다.
딱딱딱!
리치가 된 이후로 자유로워진 템빨골2.
라티나의 목걸이를 자유자재로 출입할 권한을 지닌 녀석이 다짜고짜 템빨골1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모습만 봐도 템빨골1의 잠재력은 증명된다.
템빨골2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왕께서 지켜보는 자리이다... 체통을 지켜라.]
템빨골1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해골바가지가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하는 말이라 더 큰 무게감이 있었다.
그렇다.
겉모습만 봤을 땐 템빨골1이 언데드인지 인간인지 구분하는 게 불가능했다.
딱! 딱딱딱!!
템빨골2가 턱을 맞부딪치며 춤을 췄다. 허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꼴이 잔망한 수준을 넘어서 경박했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이유는 빨골1에게 우리는 언데드라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기 위한 의도 같았다.
템빨골1이 콧방귀 뀌었다.
[대화가 안 통하는군. 뇌가 썩어 사라진 존재답구나.]
[...]
템빨골2가 석상처럼 굳었다.
새카만 눈구덩이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꼴을 보아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학센이 언데드간의 경합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지성이야말로 모든 다툼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광경이라며, 어리석은 평화론자들이 이 장면을 반드시 목격하길 바랍니다.]
[파일볼프는 마장기와 한 몸이 되기를 꿈꾸는 중입니다.]
“...출발하자.”
정상인이 드문 세상이다.
특히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일수록 뒤틀린 구석이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고대 전설의 영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세상을 뜻대로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인 듯했다.
거칠 게 없으니 성격도 제멋대로일 수밖에.
‘마지막 사도만큼은 부디.’
나처럼 정상인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대장간을 나서는 그리드였다.
목적지는 그레니어.
산군으로 군림하는 은둔자가 서식하는 지역으로, Satisfy에서 손꼽히는 금지(禁地)다. 무수히 많은 전설과 신화가 그곳에 묻혔다.
쯔단이 <다섯 걸음의 전설>을 쓰고 최후를 맞이한 장소이기도 했다.
***
강자에겐 지켜야 할 철칙이 있다.
패배하지 않는 것.
승리를 거듭함으로써 쌓는 명성이야말로 곧 강자의 증거였다.
그 사실을, 백요와 흑요 자매는 다소 늦게 깨달았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도중 적으로 마주쳤던 그리드라는 벽.
그에게 패배를 겪을 때마다 백요와 흑요 자매의 명성은 곤두박질쳤다. 별 듣도 보도 못한 어중이떠중이에게 시비가 걸리고 도전을 받았을 정도다.
당시엔 아직 그리드가 지존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시절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 뒤로.
“미친 거야...?”
백요와 흑요 자매는 패배를 최대한 피해왔다.
예를 들어 템빨단 같은 상대적 강자들에겐 섣불리 도전하지 않았다.
주제파악이 됐다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덜덜덜.
자매에겐 강자를 알아보는 통찰이 생겼다.
위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는데 이 순간 그 본능이 미칠 듯이 발작했다.
원인은 그리드의 좌우에 나란히 선 템빨골들에게 있었다.
템빨골1과 템빨골2.
포스 넘치는 생김새와 조화되지 않는 이름을 지닌 자들이었다.
개중 템빨골2는 번헨 열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익히 봤기 때문에 익숙했다. 무려 벨레드의 발을 묶은 괴물 리치 아닌가.
한데 템빨골1은 생경했다.
언젠가 TV를 통해 보았을 땐 누리끼리한 해골바가지였는데 지금은 잘생긴 미남자가 되어있었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서리 같은 표정.
그리고 몸에 두른 새카만 마력... 전반적으로 죽음의 기운을 물씬 풍겨서 커다란 공포를 자극했다. 실로 무시무시했다.
자매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이템...
우리 아이템 언제쯤 만들어줄 거냐고 한 번 물어나 보고 싶었는데 말을 걸 자신감이 도통 생기질 않는다.
그리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목이 베여 떨어질 듯했다. 그 정도로 거대한 공포였다.
“뭐지.”
대장간에서 나온 그리드가 백요와 흑요 자매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직 전쟁 중일 텐데.”
백요와 흑요 자매는 전장에서 몹시 중요하게 작용하는 전력이었다.
괜히 네임드 랭커로 분류되겠나.
악명이라는 것도 실력이 있어야 쌓는 것이다.
자매는 템빨단을 제외한 하이랭커 중 최상위권에 속하는 무력을 지녔다.
“그... 그게...”
시선을 내리 깐 흑요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말했다. 찾아온 용건을 순순히 밝히려고 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리드의 위엄에 짓눌려 어쩔 수 없이 솔직해졌다.
그녀의 입을 백요가 가로막았다.
동생과 달리 영활한 구석이 있는 인물다웠다.
“보, 보급이 필요해서 잠깐 귀환한 거야! 금방 다시 전장에 복귀할 거야!!”
“보급은 현장에서도 충분할 텐데.”
그리드는 자매를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아이템을 바라고 협력한 거라곤 하나 어쨌든 전우 아닌가.
의도가 노골적이라 오히려 신뢰했다. 큰 도움이 되는 전력이기도 했다. 굳이 나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매는 그리드의 마음을 모른다. 낮게 깔리는 음성과 맹금류의 것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히, 히익! 아, 아이템! 아이템 하나가 망가지기 직전이라...”
백요는 급히 핑계를 떠올렸다. 요즘엔 잘 쓰지도 않는 서브 무기의 내구도가 위태하단 사실을 상기하며 자지러지듯 외쳤다.
‘전장에 배치한 대장장이는 전부 다 플레이어였지.’
몇 명을 제외하곤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터다. 백요 수준의 랭커가 귀중한 아이템을 맡기기엔 꺼려졌을 만하다.
납득한 그리드가 호의로 다가갔다.
“줘봐.”
“응...?”
“내가 수리해 준다고.”
“아, 으, 응...”
백요가 아이템을 꺼냈다. 유니크 등급의 건틀릿. 레벨 제한이 고작 350대에 불과해서 안 쓴지 오래된 물건이다. 팔아먹기도 애매한 것이, 귀속 스킬에 횟수 제한이 있어서다.
덕분에 동레벨 아이템과 비교해서 성능이 뛰어났지만 스킬을 전부 소모한 뒤부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흠...”
건틀렛의 상세 정보를 확인한 그리드가 용광로 앞에 섰다. 최근 케를 옹과 건축가들이 수리를 끝낸 덕분에 매끈한 모습을 되찾은 초대형 용광로였다.
화르륵!
대장장이 스킬을 보유한 빨골이들이 몇 번 풀무질하자 용광로의 내부온도가 급격히 솟구쳤다. 그동안 그리드는 건틀렛을 분해하며 제작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
백요와 흑요 자매가 혼란에 빠졌다.
템빨골1과 템빨골2가 풀무질 하는 광경부터가 낯설게 다가왔다.
아니 저 무지막지한 괴물들이 왜 풀무질을...
게다가 그리드는 왜 건틀렛을 부셔버리고 있는 걸까.
‘역시 화났어...!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야! 경고라고!’
두 번 다신 전장에서 이탈해선 안 되겠다...
새삼 깨닫는 자매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드는 건틀렛을 용광로에 집어던졌다. 불길에 녹아 쇳물이 되어 뽑혀 나오는 건틀렛의 모습이 마치 자매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자매의 사고가 정지했고,
“자.”
그리드는 백요에게 다시 만든 건틀렛을 건네주었다.
오토 제작으로 불과 몇 분 만에 뚝딱 만든 아이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보다 좋았다.
당연한 결과다.
템빨신의 기술은 아이템의 성능을 도안보다 뛰어나게 구현한다.
“에, 에에...?”
“수리만으로 귀속 스킬의 사용 횟수를 재충전하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다른 대장장이들이 섣불리 나서지 못했던 걸 거야. 나중에 또 필요하면 나를 찾아오도록 해.”
“...”
“간다. 수고들 해라.”
“자... 잘 다녀와!!”
멀어지는 그리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자매가 뒤늦게 인사했다. 웃는 모습이 굉장히 어색했다. 순수한 의도로 웃어본 경험이 드문 까닭이다.
“...이게 주무기보다 좋아.”
“우, 우리 졸업 사진... 인터넷에 떠돌았었는데... 우리가 해온 나쁜 짓들... 그리드도 전부 다 알 텐데... 심지어 적이었는데... 웃어줬어...”
“응... 그러게...”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풍파를 겪고 세상을 원망해온 자매.
걷잡을 수 없이 삐뚤어져온 그녀들이 오늘,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호감을 품었다. 존경에 가까웠다. 세상이 사뭇 다르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