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2권 - 5화
그리드는 인간의 국가 단위와 세력 구도에 연연하지 않는다.
지상과 지옥, 그리고 환국과 아스가르드.
세계를 크게 4개로 나눠서 인식하며 지상의 수호에 힘썼다.
그런 위계였다.
남들은 상상 못할 책임감을 짊어진 원인이기도 했다.
“...”
미래의 난적 중 하나.
품에 안은 미르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표정이 점차 사늘해졌다.
미르의 호흡이 약해질수록 가라앉는 눈빛이 심연에 도달해갔다.
“세희야.”
표홀히 지상에 내려온 그리드가 동생을 부른다.
“이자를 치료해줘.”
담담한 말씨였다. 잔뜩 굳은 표정과 조화되지 않았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겠어?”
눈을 동그랗게 뜬 루비가 오빠의 진심을 묻는다.
템빨단원들의 촉각이 곤두섰다.
물론 그들은 그리드와 미르의 대화 내용을 듣지 못했다.
방송사 카메라들과 사정이 같았다.
뇌전과 빛이 얽히며 명멸하는 그 짧은 틈 동안 나란히 섰던 그리드와 미르의 모습을 제대로 쫓지 못했다. 세상에 번진 빛이 너무 밝았다.
하지만 템빨단은 미르의 정체를 알고 있다.
양반의 정점이자 청룡도의 주인.
그리드가 쓰러뜨려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미르를 없애야만 동쪽의 사신들을 전부 부활시킬 수 있다고 그리드는 밝힌 바 있다.
한데 굳이 살리겠다는 거다.
미르가 먼저 달려와서 그리드를 도운 건 사실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있는 걸 수도 있지만, 놓치기엔 몹시 아까운 기회를 스스로 내치겠다는 것이다.
애초에 합의 따위 없을 확률이 높다.
그리드가 갈등하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만약 미르가 그리드의 편에 설 거라는 암시라도 줬다면 어땠을까?
그리드의 성격상 즉시 미르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조금도 망설였을 리가 없다.
섣불리 캐묻지 못하는 동료들을 대신해 극검이 나섰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들 주위로 검막이 펼쳐졌다.
방송국 카메라가 그들의 모습과 대화를 찍지 못하게끔 크라우젤이 만든 결계였다.
템빨단이 독점 중인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인데, 정작 크라우젤 본인도 멀찌감치 떨어져 귀를 닫았다.
식구끼리 논하는 자리에 끼는 건 영 어색했다.
“미르하고 다음에 만날 때는 다시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거잖아?”
극검은 그리드의 성격을 너무 잘 안다.
미르가 작은 여지라도 줬다면 그리드가 갈등했을 일은 결코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곧장 요점을 짚을 수 있었다.
그리드가 씁쓸히 웃었다.
“맞아요. 결국 적이 되겠죠.”
극검과 동료들의 예상대로였다.
분위기가 크게 술렁였다.
극검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살려도 괜찮은 거야? 미르는 너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였잖아. 청룡의 봉인을 풀고 나아가 사방신을 해방하기 위해선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상대라며.”
극검과 동료들이 우려하는 건 딱 하나다.
그리드의 후회.
사람들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열망을 괜히 품겠나.
후회야말로 사람을 좀먹는 가장 큰 독 중 하나다.
극검과 동료들은 그리드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하고 지지할 것이지만, 그리드가 후회만큼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 그리드가 슬며시 웃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드디어 허물어졌다.
“오늘만큼은 같은 편입니다.”
미르가 먼저 나를 도왔다. 미르의 상처는 나를 돕는 과정에서 생겼다. 환국과 다른 미르 개인의 진심을 알게 됐다. 등등.
그리드가 미르를 도울 명분은 많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리드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하지만 오늘만큼은 당신의 편입니다.”
미르가 남겼던 그 짧은 몇 마디의 말이다.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니까 살릴 겁니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다섯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내일의 적을 품에 안은 채, 전승 될 신념을 세상에 새깁니다.]
“애초에 이자에겐 살아갈 권리가, 자격이 있어요.”
[덧없는 이가 많은 세상이다.]
[존중 받지 못하는 자가 발에 채였다.]
[신을 빼앗긴 동쪽 땅의 주민들이 그중 하나다.]
[신을 빼앗은 동쪽 땅의 침략자들이 그중 하나다.]
[그가 품에 안은 자도 그중 하나였다.]
“설령 우리의 적이 되어 우리를 몇 번이고 좌절시킬지언정 많은 걸 바꿔나갈 존재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요.”
[그는, 덧없는 자를 존중해주었다.]
[비록 작지만 사라지지 않을 권리를 주었다.]
[소수의 지배자를 위한 제물을 홀로 오롯이 품었다.]
[그게 옳다고 믿었다.]
[자신 역시 한때 그와 같았기에 품을 수 있는 신념이었다.]
[일방적으로 짓밟히고 이용당하는 운명을, 그는 부정했다.]
...
..
[템빨신 그리드가 서사시의 열다섯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세상을 적십니다.]
[템빨신교 교인들이 더 큰 신앙을 품습니다.]
“그러냐.”
히죽 웃은 극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단원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밝았다.
루비는 스킬을 전개했다.
정화와 여러 종류의 힐을 연계하자 미르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갔다.
단, 완전한 해독은 아니다.
독이 직접적으로 침투한 국소부위로 독을 가두고 확장을 막는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 반영구적인 마취를 가해 고통을 완화시키는 수준이었다.
신조차 죽이는 히드라의 독을 완전히 정화한다는 건 성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충분했다.
미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은 눈에 띄게 줄었다.
“...”
서서히 정신을 되찾는 미르의 왼쪽 눈과 그 주변에 검게 변색된 흔적이 반점처럼 남았다.
앞으로 미르를 평생토록 괴롭힐 독의 잔재이자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 훈장이었다.
주르륵.
상황을 파악한 미르가 투명한 눈물을 흘렸다.
신들의 권리와 복수를 위해 창조 된 도구.
그게 미르다.
그의 입장에선 그리드의 호의가 몹시 낯설었다.
먼저 호의를 베푼 쪽은 자신이면서도 그랬다.
보답을 바라고 베푼 호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같았다.
갈 곳 잃은 짐승들을 보살펴줄 때조차 어떤 보답을 바랐던 적이 없다.
신의 자격을 증명하는 자애였다.
“후회...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미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생전 처음 겪는 이 따뜻함이 두려웠다.
칼처럼 벼려온 정신과 마음이 녹아내릴 것만 같아서, 자기 자신을 잃을 것만 같아서 애써 외면했다.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어디서 객사하지 말고 청룡도나 잘 간수해. 조만간 빼앗으러 갈 테니까.”
“...”
미르가 잠시 멍해졌다.
뭐라 답하지 못한 채 초점을 잃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리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 그날까지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청룡도.
미르는 그것을 의무적으로 수호해왔다.
어디까지나 신들의 명령 탓에 곁에 두었다.
청룡을 연민하되 싫어했기에 썩 달갑게 여겨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순간 귀하게 다가왔다.
그리드와 연결되는 유일한 물건이 됐으니까.
“어서 가봐.”
그리드가 재촉했다.
미르가 서대륙에 도착하고 벌써 몇 분이 흘렀다.
이쯤 되면 환국의 신들도 충분히 이변을 감지했을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르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당신께 죽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방금 전.
미르는 그리드에게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었다.
자신이 그의 발목을 몇 번이나 붙잡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후회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리드의 태연한 반응을 통해 눈치 챘다.
그리드는 몇 번의 실패로 좌절할 만한 인물이 아님을.
나는 언젠가 반드시 그에게 죽게 될 거란 사실을.
“...”
그리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미르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고 손만 휘저었다.
죽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미르의 인사에 새삼 현실이 실감되서다.
아픈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스가르드.
황금구름 위를 사뿐사뿐 걷는 리파엘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패배 따위 100번을 겪어도 똑같을 것이다.
천사는 신과 다르니까.
인간들 앞에서 추태를 보인다고 해서 뭔가를 잃는 것이 없다.
천사를 존재케 하는 건 여신이지 인류의 숭배 따위가 아니므로.
“빛에는 히드라의 독이 담기지 않더군요. 여러모로 난감했어요. 독을 활용하려고 빛의 권능을 억제하기도 했는데 본말전도이죠.”
헥세타이아의 공방.
주인을 잃은 그곳은 한동안 겨울처럼 시렸었다.
열기에 닿지 못한 금속들이 품은 서늘한 예기 탓이었다.
그곳이.
따앙! 따앙! 따앙!!
새로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어떤 노인에 의해서다.
불룩 튀어나온 배와 푸근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인상이 워낙 선해서인지 등 뒤에 달린 한 쌍의 작은 날개도 은근히 조화로웠다.
얼마 전 새로이 태어난 천사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빛이 독을 정화하나 보군요. 빛이란 신성하고 전능한 것이니까요. 음... 전능, 전능이라... 발상을 역으로 바꾸면 독과의 조화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천사장님을 위해서 제가 잘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그래요. 당신께 기대하는 바가 커요. 헥세타이아님의 빈자리를 채워주셔야죠.”
“허허... 어찌 저 따위가 대장장이 신의 공백을 대신하겠습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끈기만큼은 아주 탁월합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당신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스스로의 성격을 파악하기엔 아직 시간이 부족할 텐데요.”
“으음? 그러게 말입니다. 막연한 자신감인데 근거를 모르겠군요?”
신참 천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스로도 전혀 모르는 눈치다.
리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전의 기억이 은연중에 남은 걸 수도 있겠죠. 뭐 흔히들 겪는 증상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질 거예요.”
“생전의 기억... 그렇군요...”
천사장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신참 천사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도 모르게 짓는 미소였다.
끈기, 노력, 열정...
소중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를 듯했다.
상념에 잠겼던 그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리파엘이 히드라의 독주머니와 창을 건네 왔다.
“그럼 잘 부탁해요. 그 독주머니 이젠 더 이상 못 구하니까 조심히 다루고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 웃는 신참을 뒤로한 리파엘이 공방에서 나왔다.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의 넓은 시야각에 아스가르드의 전경이 통째로 담긴다.
제각각 높이가 다른 황금구름들.
보다 위에 있는 구름일수록 더 크고 높은 신전을 지탱하고 있다.
신들의 세상이라고 해서 평등하진 않은 것이다.
천사에게도 서열이 있고 평범한 신들 위에 주신이 있다. 그리고 여신께서 그 모두를 보살피신다.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정중히 인사한 리파엘이 이내 머리를 긁적였다.
“가브리엘이 화내려나?”
임무 실패.
이제야 실감되는 현실이 생경하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여태껏 수많은 신을 척살해온 자신이 고작 지상에서의 임무를 실패할 줄이야.
“...뭐, 운이 나빴지.”
미르.
패퇴한 망령의 인형이 거기서 갑자기 나타날 줄 누가 알았을까.
감히 추측컨대 여신께서도 예상치 못하셨을 거다.
‘아님 말고.’
리파엘의 발걸음이 다시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