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19화
음악에는 힘이 있다.
심리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고 감정을 유도하는 게 가능하다.
스치듯 들은 희미한 음률에서 영감을 얻고 인생이 바뀐 사람이 많았다.
오죽하면 음악치료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해왔겠나.
음악을 치료의 도구로 사용한 사례는 성서에도 존재할 정도이다.
라라라~
Satisfy에선 음악의 힘이 더욱 위대하게 묘사된다. 음유시인의 노래와 연주는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군에겐 힘을 주고 적의 의욕은 꺾는 식이다.
전쟁이 심화 될수록 음유시인들은 더 크게, 더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고 연주했다.
성대를 얼리는 혹한의 땅에서도, 혀를 불태우는 용암계곡에서도, 손가락을 찢는 칼바람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 역시 싸우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라라라...
라인하르트, 템빨성 인근의 거리.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선율이 흐른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음악.
그리드의 테마곡 중 하나인 ‘출두’다.
거리에 그리드가 나타난 건 아니었다.
지금 흐르는 곡은 장중한 오케스트라가 아닌 하프로 연주 되는 것이다. 가슴에 고즈넉하게 스며드는데 듣기가 몹시 편했다. 은은한 열기가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남편과 자식을 전쟁터로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을 주는 연주였다.
“낭군님을 기리는 노래...”
템빨신교 본단으로 향하는 길.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선율이 아이린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리드가 늘 새로웠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안주하지 않고 쭉 발전해오지 않았나.
이제는 심지어 자신을 기리는 노래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정도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또 있을까.
그리드와 함께해온 생활을 반추하면 감탄만 나온다.
그가 나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그가 나의 왕이라는 사실이 감사하고, 그가 나의 신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 또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어야 해.’
매일 같이 되새기는 말을 또 한 번 상기하는 아이린의 자세가 올곧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마차 안에서도 단정한 품행을 유지하며 명경지수를 이루었다.
그녀의 바람은 한결같다.
그리드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를 쉼터로 여겨주기를 바랐다.
“...”
어느새 거리의 연주가 멈췄다.
더 듣고 싶었는데.
아쉬워하는 아이린을 태운 마차도 제자리에 멈췄다.
언제나 따스하고 다정한 아이린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게으름을 모르는 사람이다.
천성이 그랬다.
거기에 그리드라는 남편을 만나 귀감으로 삼은 탓에 필요 이상으로 부지런해졌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왕비가 되어 의무를 다하면서도 그녀의 일상엔 늘 공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100가지를 배우면 그중 하나쯤은 남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였다.
심지어 그리드 덕분에 조금이나마 신격을 쌓은 이후부턴 무예와 체력도 연마해왔다. 애초에 명문무가의 핏줄이기도 하다. 재능이 있었다.
지식을 섭렵하며 교양을 쌓고 몸과 마음까지 연마해온 그녀는 영민하게 단련됐다.
마차의 동선과 속도, 시간과 환경 등을 고려하고 현재 상황이 비정상적이란 사실을 즉각 파악했다.
곁에 비스듬히 세워두었던 검파를 손에 쥔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쥬드 경, 무슨 상황인가요?”
“마차가. 멈췄습니다.”
하나를 물으면 하나를 답하는 게 쥬드의 성정이다.
그를 대신해서 선임기사 아돌이 상황을 설명했다.
“마부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재촉해도 고삐를 쥘 생각을 않는군요. 적침의 낌새는 없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덜컹.
아이린이 마차에서 내렸다.
멀뚱멀뚱 서있던 쥬드가 그녀의 등 뒤로 자리했다.
카심을 대신해 아이린의 새로운 호위로 임명된 그는 적어도 임무를 망각하진 않는다.
“아니 왕비님, 어찌하여 내리셨습니까? 아아! 신전으로 가는 길이셨죠! 어서 가보십시오!!”
마부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여전히 운전석에 앉은 채다.
표정과 반응은 정상인 반면 고삐를 쥘 생각을 않아 이질적이었다.
“어째서 운행을 멈추신 거죠?”
“네...?”
마부의 표정과 반응에 문제가 생겼다.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급기야 운전석에서 내려버렸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자, 어서 신전으로 가시죠.”
“...”
“...”
기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철저히 교육 받은 왕실 소속 마부가 설마 왕비전하께 농을 지껄이는 건 아닐 테고, 저 괴상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일단 방진을 더욱 철저히 구축했다.
어떤 각도에서도 왕비전하를 노릴 수 없도록 대열을 갖추고 마부를 구속한 후 주변을 살폈다.
그러면서 거리의 이변을 속속히 눈치 챘다.
마부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괴상해졌다.
우선 상당수가 빈손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던 음유시인들, 행인을 세워놓고 신발을 닦아주던 구두닦이들, 순찰을 돌던 병사들, 노점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던 상인들 등등.
응당 써야 할 ‘도구’를 손에서 내려놓고 있었다.
그중 도구가 없어도 괜찮은 일을 하던 사람들.
예를 들어 병사들은 창을 버린 상태로 순찰을 돌았고, 악기를 내려놓은 음유시인은 연주 없이 노래를 부르는 식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반면 도구가 없으면 안 되던 일을 하던 사람들.
예를 들어 철판에 국수를 볶던 노점상 주인이나 신발에 광을 내던 구두닦이들은 멀뚱멀뚱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뜨겁게 달궈진 철판을 맨손으로 주무르는 식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어...?”
후자의 경우가 이질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화상을 입은 노점상 주인이 괴로워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철판 위 국수가 타기 시작하자 다시 맨 손으로 국수를 볶다가 비명을 지르길 반복했다.
“어서 신전으로 가시죠.”
선임기사 아돌이 아이린을 재촉했다.
“...”
서둘러 신전으로 향하는 일행의 표정이 점차 더 어두워졌다.
계속해서 이변을 목격한 까닭이다.
사람들이... 도구를 사용하며 진화해온 인간이라는 종족이 도구의 사용법을 잊어갔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선 피신한 뒤 상황을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아?”
앞장서 걷던 아돌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기우라고 여기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진즉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미 몇 분 전에 스스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
아이린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 중 절반 이상이 어느새 이상해져 있었으나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지적해봤자 무용한 상황이니 한시라도 빨리 신전에 도착하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했다.
그녀가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쥬드. 지킨다. 왕비.”
곁에 쥬드가 있기 때문이다.
바다의 포식자를 연상시키는 대검.
그리드가 친히 만들어 쥬드에게 하사한 그 명검은, 일행이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쥬드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아군의 피해가 일방적으로 많았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무기와 방패를 쥐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황당한 일이었다.
전쟁 중에 다짜고짜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적진으로 돌격하다니.
공교롭게도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무저갱과 번헨 열도의 사정은 좀 낫다는 것이다.
브라함, 피아로, 지크, 카일, 십공신 등의 활약 덕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인마대전의 두려운 점은 무한에 가까운 마물 웨이브이다.
게임 장르가 MMORPG에서 타워 디펜스로 바뀐 격이었다.
물론 마물의 종류는 다양해서, 랭커에게까지 위협을 끼치는 마물의 숫자는 의외로 적었지만, 사람의 체력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반신인 지크조차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병사와 기사들은 모두 물리고 극히 소수의 인원으로만 웨이브에 맞서 싸웠으니 전반적인 자원 소모가 너무 빨랐다.
“이 와중에 군수품까지 도착을 안 하네. 물약 다 떨어져 가는데 큰일 났다.”
“수송부대의 상태도 온전치가 않은 듯해.”
“NPC는 대부분 활동이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하나.”
징후가 발생하고 거의 직후.
대책을 마련할 틈도 없이 사람들이 도구의 사용 방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쥬다르가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빼앗았다는 설정 같았다.
“거의 버그급 권능이구만 시벌.”
“그나마 플레이어한텐 적용 안 되는 게 다행이긴 한데.”
“우리한테까지 그 지랄했으면 고객센터 폭발했지.”
“우선 버텨봅시다. 제아무리 신의 권능이라고 해도 제한 시간이 있겠죠.”
“아깝다. 이게 쥬다르가 저지른 짓이라는 걸 입증할 수만 있다면 신격을 훼손시킬 기횐데.”
입증이 힘들다. 심지어 입증 해봤자 무의미했다.
도구를 사용하는 지혜.
인간의 근본인 그것을 상실한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도구를 못 쓰는 게 문제라는 사실을 모른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쥬다르가 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도 원망을 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저건 또 뭐냐.”
“타이밍 환장하겠네.”
무저갱 입구.
지옥과 연결 된 수많은 통로 중 가장 거대한 그곳에서 제4위 대악마 가미긴이 기어 올라왔다.
영웅의 영혼으로 만든 병사 100명과 전설의 영혼으로 만든 병사 3명을 호위로 대동한 채였다.
전쟁 초반에 브라함에게 패퇴한 뒤로 두문불출했던 놈.
그간 어디서 뭐하나 싶었는데 늘어난 호위를 보니 늦은 게 이해됐다.
『이럴 수가...! 과거의 전설들이 대악마의 수하가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저건 소수인원으로 막을 규모가 아니에요. 무저갱은 포기해야합니다. 군대를 철수시켰을 때 함께 떠났어야하는데 괜한 미련을 품었다가 큰 피해를 입게 생겼군요.』
『뭐요? 괜한 미련? 이봐요, 무저갱을 적에게 내어줬다간 타이탄을 통째로 빼앗기게 됩니다. 저 거대한 도시가 악마들의 요새로 탈바꿈된다고 생각해보세요. 되찾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피해를 감수해야할 겁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아 싸우는 영웅들을 응원하진 못할망정 지금 어디서 망발을...』
방송에서 고성이 오가는 와중이었다.
가미긴이 거느리고 나타난 전설 중 하나.
극점마법의 창시자로 알려진 학센이 지상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믿기지 않게도, 평범한 파이어 볼이 일으킨 대참사였다.
브라함의 마법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위력이었다.
뒷일 생각할 것 없이 일단 무저갱은 포기함이 옳다...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판단하는 순간이었다.
크롸라라라라라라!!
어떤 포효와 함께 갑자기 밤이 찾아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과 지상을 뒤덮은 여파였다.
『드...!』
『래...!』
『...곤!?』
과거의 국가대항전에 우연히 등장해 충격을 선사했던 초월종.
‘사냥이 불가능하도록 설계했다.’고 임철호 회장이 못박은 바 있는 절대적인 생물이 전쟁에 난입했다.
출몰지는 황당하게도,
“낙룡극살파.”
그리드의 칼끝이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회색용의 잔영.
그것은 석상룡 구젤의 자아가 만든 환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환상도 환상 나름이다. 놀라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제4위 대악마의 얼빠진 표정이 카메라에 똑똑히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