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18화
대륙 각지에서 승전고가 울렸다.
국지전에서 활약하는 플레이어가 무척 많았다.
첩첩이 겹친 산세를 계단처럼 깎아 밭을 일군 휴렌트가 산맥을 통째로 요새화시켰다거나, 다리를 막고 선 레가스가 홀로 수만 마물의 발을 묶었다거나, 난민들의 피신처를 포위한 악마군 사령관을 후로이가 말 몇 마디로 제압했다거나 등등.
믿기 힘든 소식이 속출했다.
야탄교 소속 플레이어들의 고충도 화제였다.
데미안과 포식이불족발 단 둘에게 어그로가 끌린 야탄의 종들 탓에 며칠째 추격전 중이라는 것이다.
‘퇴물’ 하스터가 자신을 퇴물로 만든 장본인들과 힘을 합쳐 대악마를 무찌른 사건도 있었고, 브라함과 함께 무저갱의 입구에 선 유페미나가 장장 3시간 동안 마물들의 출현을 억제한 사건도 있었다.
그중 몇 개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일화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전쟁은 지옥이 맞다.
아군의 활약이 들려오는 것과 별개로, 대규모 인명피해는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악마의 활동을 차단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본래 악마가 까다롭다.
대악마와 달리 힘을 과신하지 않아 간교하여, 주제를 넘는 경우가 드물고 자신의 능력을 몹시 잘 활용한다. 무력이 낮을수록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특히 위장이 가능하거나 인간의 꿈과 욕망 등에 개입하는 소수 개체가 위협적이었다. 전쟁으로 위축 된 군중의 심리를 손쉽게 파고들었다.
인간들의 사회에 자연스레 녹아든 놈들이 체제를 붕괴시키고 주요 거점을 괴멸시키길 반복했다.
제국의 고위 귀족으로 위장한 어떤 악마는 고작 이틀 만에 수만 명의 인명을 몰살시킨 사례도 있다. 여러 불운이 겹친 결과였다.
모략의 힘이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지모로 권력을 쟁취하고 악용하여 무력을 웃도는 위력을 과시한다.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데미안 님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레베카교가 건재했어도 똑같았을 거라고. 은밀히 위장하거나 꿈으로 침투해 접근하는 악마들을 미연에 찾아내고 퇴치하는 건 삼신교 사제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기는 악마의 기척이기도 하다.
강함과 비례하는 개념으로, 강한 악마일수록 마기가 넘쳐 은밀하기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악마는 수색이 힘들단 의미다. 거기에 권능의 성질까지 은밀하면 더욱 어려워진다.
그런 놈들에겐 ‘징후’가 발생한 뒤에야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사소한 징후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는 건... 쉽지 않다. 사람들이 바보라서 당하는 게 아니었다. 피해가 속출하는 게 당연했다.
“다만 거울 악마라는 놈은 반드시 퇴치해야합니다. 놈에게 암살 당한 연합군 수뇌가 어느덧 스물넷에 이릅니다.”
거울에서 나타나는 악마.
거울을 이동 수단으로 삼는 것으로 추정되는 놈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놈 때문에 지휘관을 잃고 마비 된 진지가 수두룩했다.
“그간 속수무책으로 당한 건 아닙니다. 놈의 활동 반경을 분석하여 다음 등장 지점을 예측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아직 오차 범위가 크긴 하지만... 대응할 수 있습니다.”
대신 조건이 붙는다.
템빨그림자 단원 중 그림자술을 익힌 최고위 실력자 전원, 그리고 페이커에 더해 카심까지 투입해야한다.
특정 요인들의 호위가 약해질 거란 뜻이다.
가장 걱정되는 인물은 당연히 아이린이었다.
물론 아직까진 직접적인 암살 위협이 없었다.
이유는 많다.
첫째, 플레이어는 그리드의 가족을 노리지 않는다. 게임 접을 각오가 아닌 이상에야 선을 지켰다.
애초에 플레이어는 아이린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악마들의 편에 선 플레이어라고 해봤자 야탄교 소속인데, 흑마법사의 스킬트리로는 템빨성까지 잠입할 도리가 없다. 라인하르트의 방비는 일반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둘째, 악마들은 그리드의 가족에게 관심이 없다. 그리드에게 원한이 깊을지언정 전쟁보다 우선시하진 않았다.
쉽게 죽이고 기만할 수 있는 인간이 지천에 널렸는데 굳이 해치기 힘든 인간에게 집착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아이린을 죽인다고 해서 어떤 이득이 있나?
없다.
단순히 그리드 한 사람을 괴롭히는 용도밖에 안 됐다. 그 시간에 더 많은 인간을 해치는 편이 훨씬 더 보람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린의 호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늘 만전을 기하는 게 당연했다.
아이린을 당분간 신전에서 지내게 하려는 이유다.
템빨신교 본단.
사리엘이 상주하는 그곳이야말로 현재 라인하르트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였다. 템빨성과 인접하는 까닭에 병력을 운용하기도 편했다.
“네, 제게 맡겨주세요.”
악마에게 죽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던 사리엘이 은은한 미소를 짓고 답했다. 고즈넉한 반응이 그녀다웠다.
***
다크엘프 왕, 호르부스.
그리드가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는 단순했다.
비록 타락했을지언정 엘프이기 때문이다.
스틱세이와 베니야루처럼 세계수를 어머니로 섬긴다.
또한 세계수는 템빨단원 전원에게 정령의 축복을 내려준 바 있다.
호르부스를 굳이 해치기엔 여러모로 찝찝했다.
‘애초에 다크엘프가 된 이유도 시시했지.’
사람들은 여전히 엘프를 숲의 주민이라고 부른다. 닿기 힘든 신비를 거니는 신선 취급했다.
환상을 품기에 적합한 대상이었다.
두문불출하고, 정령과 교감하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종족이니.
하지만 그리드에게 있어서 엘프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스틱세이와 오랫동안 함께하지 않았나.
엘프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피아로의 반려이기도 하다.
너무 친숙해서 평범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나를 만나고 싶다 했다고.”
“예, 감히 청하였습니다.”
엘프는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남성 엘프들의 폐쇄성이 더 짙다.
여성 엘프들과의 다툼에서 패배하고 숲의 가장 깊은 곳에 틀어박힌지 오래인 탓이다.
호르부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문화와 체제는 낯선 것이었다.
많은 면에서 공감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상식도 달랐다.
인간이나 인간의 문화에 익숙한 존재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개념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무력을 해석하는 시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
엘프가 보는 힘의 척도는 마나의 밀도와 정령과의 교감이며, 여기서 말하는 마나란 체내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지기와의 동화에 가깝다.
호르부스가 피아로를 인간 최고의 실력자라고 착각했던 이유다.
피아로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은 자연지기와 하나 되지 못하고 힘을 빌려 쓰는 수준에 그쳤으니까.
인간이란 듣던 것보다 더 나약한 존재구나 싶었다.
그 상태로 템빨국을 방문해 그리드를 마주한 것이다.
호르부스는 대번에 깨달았다.
인간의 무도는 저급하지 않다.
다만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과연 신이 될 만하다...
그렇다.
호르부스의 상식과 안목으로 봤을 때 그리드는 무도의 극한을 이루어 급기야 신이 된 존재였다.
즉 무신이라는 것이다.
그리드를 대하는 태도가 극진했다.
“한낱 포로에게 귀중한 시간을 내어주신 전하의 하해 같은 배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막불감동이옵니다...”
“...”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딱히 의식한 반응은 아니고 자연히 그렇게 됐다.
고맙다는 말을 장황하게도 늘여놓는 호르부스의 화법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피곤해질 것 같았다.
호르부스는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 챘다. 초월의 격을 쌓은 존재답게 그리드의 심기를 대번에 파악하고 본론을 꺼냈다. 말투도 수정했다. 안 그래도 어색하던 차였다.
“전하께서는 굳이 저를 죽일 생각이 없으신 거겠지요.”
호르부스의 사고는 1초를 수백 개 단위로 분절하고 활용한다. 자연경과 초월의 경이 맞물려 선사한 공능이다.
말을 꺼내기에 앞서서 충분히 숙고했다는 의미다.
과연 그리드는 불편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대의 처분은 순전히 숲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드가 호르부스를 죽여 봤자 찝찝하기만 하다.
템빨국은 그에게 입은 피해가 전무하기도 해서 원한도 없었다.
애초에 집안싸움이다. 엘프들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였다.
‘인마대전이 끝나는 즉시 숲의 사절단이 찾아오지 않을까.’
전쟁 중에 방문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지금의 전시는 엘프족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었다.
지옥과 연결 된 포털은 대륙 전역에 무작위로 발생했고, 그 무작위엔 공교롭게도 세계수의 숲도 포함되어 있었다.
숲의 결계가 무색해진 것이다.
“엘프의 손아귀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자결하겠습니다. 엘프는 백해무익한 존재입니다. 세계수를 지킨다는 핑계로 정기가 모인 숲을 독점하고, 스스로를 가둔 채 진화를 멈춘, 그런 옹졸하고 하찮은 놈들 따위에게 제 운명을 맡기고 싶지 않습니다.”
“...”
“전하께서 제 운명을 정해주십시오.”
결의에 찬 얼굴로 용건을 말하는 다크엘프 왕.
마기를 받아들인 부작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중이다.
말본새와 달리 품행은 단정치 못했다.
들끓는 마기가 화를 자극하는 여파였다.
처음엔 공손히 모아두었던 두 손이 어느새 허리 옆으로, 턱 아래로 옮겨졌다. 처음엔 가지런하게 섰던 두 다리도 비스듬히 어긋났다.
엘프의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에서 생긴 변화다.
아마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 터였다.
울렁이는 감정을 아주 잘 다스리는 중이라고 믿고 있겠지.
실제로 말투는 여전히 공손했으니까. 착각할 만하다.
“음...”
그리드는 호르부스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 막 호감을 느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진로를 생각하고 결단을 내리지 않았나.
과연 초월의 격을 쌓은 존재답게 진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도 출중하니 부하로 삼으면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을 것이다.
‘이족의 왕 칭호 효과도 노릴 수 있어.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할 인재야.’
엘프를 성별로 분단시킨 원흉이긴 하지만 상관없다.
당시의 호르부스에겐 사사로운 욕심이 있던 게 아니라 평등을 바란다는 명분이 있었다. 베니야루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물론 마기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파악할 필요는 있다.
그를 다크엘프로 만든 악마를 찾아 죽여야 혹시 모를 후환이 없다.
“생각해보지.”
짧게 답하는 그리드의 시선이 호르부스의 발치를 향한다.
그 시선을 자연히 따라가 본 호르부스가 속으로 기겁했다.
내가 언제부터 짝다리를 짚고 있었지?
즉시 차렷하는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고고할 따름이다.
엘프의 신령함과 초월의 격이 혼합되어 특이한 성질을 띠게 만드는 듯했다. 거기에 마기로 인해 발생하는 성정까지 보태지면, 적들의 속내를 아주 제대로 뒤집어놓지 않을까. 후로이에게 파트너로 붙이면 시너지가 상당할 것이다.
“...”
재미있을 것 같다며 미소 짓던 그리드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무의식중에 또 짝다리를 짚었던 호르부스가 급히 차렷했다. 실수를 반복한 것에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죄송하다는 외침까지 덧붙였다.
멀리서 용광로를 수리 중이던 인부들이 힐끔힐끔 그 모습을 훔쳐봤다.
민간에선 무신으로 군림할 인물에게 얼차려를 주는 그리드가 대단할 따름이었다...
***
같은 시각, 번헨 열도.
‘뭐지?’
병사들의 배식을 지켜보던 폰이 이질감을 느꼈다.
오물 묻은 맨손으로 음식물을 집어먹는 병사들이 간간히 보인 까닭이다. 멀쩡한 수저가 있는데도 그랬다.
계속되는 전투 탓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걸까?
‘...아니,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징후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숫자도 미묘하게 많다.
폰의 뇌리에 그리드의 말이 스쳤다.
쥬다르가 전쟁의 배후에 개입했다는.
실제로 최근 ‘죽이기 힘든’ 적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설마...?’
쥬다르는 건강과 ‘지혜’를 관장하는 신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의 떨리는 동공에 주인 잃은 무기 몇 개가 비쳤다.
식사를 마치고 떠난 병사들 중 일부가 놓고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