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17화
하야테는 타인을 위해 살아왔다.
아무도 모를 헌신이다.
그를 기억하고 구속하는 건 멸시와 증오가 담긴 용언(龍言)이지 인류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그를 잊었다.
고독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드는 그를 위해, 그를 대신해서 분노했었다.
하야테와 결사들이 세상을 등지게 만든 원흉.
인류를 인질 삼아 결사들을 구속해온 용들에게 살심을 품었다.
여기까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하야테에 의해서였다.
그리드가 용들의 분노를 살까 우려한 그는 그리드의 서사시를 비화로 만든 바 있다.
한데 지금.
“...!”
그리드 스스로 비화를 끄집어내고 말았다.
구젤의 자아와 교감하는 과정에서 용과 싸울 것을 결의한 여파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리드는 구젤과 진실 된 관계를 쌓고 싶었다. 그래서 솔직한 감정과 의지를 드러냈을 뿐이다.
딱히 서사시를 쓰려고 의도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리드가 간과한 사실은, 드래곤이라는 존재의 특수성에 있었다.
드래곤은 세계의 탄생과 유지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파멸로 인도할 자격을 지녔다.
단순히 강해서다.
궁극의 무력을 타고난 것으로 모자라 마법이라는 개념을 창조한.
그러므로 신의 권능으로부터 자유롭고 세계를 발밑에 둔 초월종.
그들과 싸워야 할 순간이 오면 피하지 않고 맞서겠다는 결의 자체가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하야테!!”
행동이 사고를 앞선다.
시공간을 압축하고, 도약하며 하야테에게 손을 뻗는 그리드의 모습이 필사적이었다.
응당 그래야했다.
하야테는 승산 없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희생이라고 표현함이 옳았다.
그리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드에겐 그를 말릴 자격이, 의무가 있었다.
“멈추십시오!!”
그리드가 외쳤지만 한 발 늦었다.
어느새 세상 전체를 하야테의 존재감이 뒤덮어버렸다.
이 순간.
용들에게 그리드의 결의는 뒷전이 되었다.
하찮게 취급하는 게 아니다.
그리드에겐 용을 적대할 자격이 있다. 자격이 없었다면 애초에 서사시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세계는 그리드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드래곤에겐 하야테가 더 특별할 뿐이었다.
역사상 유일한 용살자.
언젠가부터 그는 용들의 목표이자 목적이 되어있었다.
용들에겐 그리드의 결의보다 하야테의 존재감이 훨씬 더 크고 무겁게 다가왔다.
지금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드래곤이 하야테를 느꼈다.
하야테를 제외한 모든 개념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며 여러 감상을 품었다.
천상의 신들 또한 이변을 눈치 챘다.
“저 괘씸한 인간에게 드디어 죽을 날이 찾아왔구나.”
훼손 된 격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 중이던 제라툴이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제라툴은 의외의 희열을 느꼈다.
치우를 죽이는 순간을 상상할 때와 비견 될 수준의 희열이어서,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
‘내가 하야테 놈을 이만큼이나 의식하고 있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다만 놈이 괘씸할 뿐이다. 나의 격을 훼손시킨 장본인이니...
눈살을 찌푸리는 제라툴의 귓전에 불쾌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추하세요.”
“...”
감히 신에게, 심지어 무신의 면전에서 비난을 퍼붓는 이를 제라툴은 그저 바라만 보았다.
체격은 작고 얼굴은 앳되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두 뺨에 머무는 홍조가 가증스러운 순수를 연기한다.
제1위 대천사 리파엘.
순수한 놈이긴 했다.
보통의 천사들과 다르게 모체가 없으니까.
천사 중 몇 안 되는 근본이다.
“명색이 신께서 한낱 인간을 두려워하다니요.”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라툴이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하야테의 종말을 예견하고 기뻐했잖아요. 그를 두려워했던 게 아니면 굳이 기뻐할 이유가 있나요? 궁금하네요. 설명해주세요.”
“...”
네 호기심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제라툴이 그런 속내를 삼키려고 애쓰는 그때였다.
“똑똑~ 베니스가 병문안 왔어요! 어머? 우리 귀염둥이 리파엘 씨는 오늘도 제라툴 님을 위해 헌신하시네요.”
“제 역할 중 하나인 걸요. 언젠가 베니스 님이 같은 꼴을 당해도 성심성의껏 보살펴드릴게요.”
“어머, 왜 그런 무서운 말씀을...”
구원자가 나타났다.
금전의 신 베니스.
천상의 대부분 신들은 그녀를 천대한다.
뭐든지 재화로 환산해서 집착하는 그녀의 성향을 괄시하는 탓이다.
하지만 제라툴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녀가 운영하는 상점을 통해 비급을, 무신의 무를 과시할 수 있기에.
***
무차별 폭격이 있었다.
드래곤들의 마법이 거리를 무시하고 쏘아진 것이다.
‘자책할 일이 아니다.’
검기를 거두고 심호흡하는 하야테 곁에서 그리드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구젤의 자아와 교감을 나눈 일, 서사시가 발생한 일, 드래곤들에게 어그로가 끌린 일 전부.
그리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과정이라고 보았다.
드래곤 웨폰은 궁극의 무기니까.
엔드 컨텐츠 중 하나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중히 다뤄야하는 물건인 것이다.
구젤의 자아를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과정에서 드래곤의 어그로를 끄는 건 감수해야 할 문제였다.
하여.
“섣부르셨습니다.”
그리드는 하야테를 질책했다.
늘 경의를 표해온 대상을 처음으로 비난하고 원망했다.
감정에 치우쳐서 죄책감부터 느끼기엔 현재 그리드가 너무 이성적이었다.
“미안하오.”
하야테가 사죄했다. 그리드에게 자신을 비난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표정에 미련이 없었다.
그리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이 옳았다고 믿는 것이다.
“이해해주시오. 방관하기에는 그대가 잃을 게 너무 많다고 보았소.”
그리드는 신이다.
불멸이다.
하지만 불멸이라고 해서 죽음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다.
제라툴이 증명했듯, 신에게 죽음은 끝은 아니되 격을 잃는 계기가 되고 만다.
그리드가 자각하고 있을 진 모르겠으나, 그리드는 인간일 때보다 더욱 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입장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수천 만, 수억의 백성을 거느리고 있다.
드래곤을 적대하는 건 너무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했다.
그러므로 하야테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흔들림 없는 그의 눈동자가 그리드를 한숨 쉬게 만들었다.
“탑의 위치가 노출되지 않았습니까. 하야테 님이야말로 많은 걸 잃으신 것 같은데요.”
지혜의 탑은 결사들의 안식처다.
탑을 잃은 결사들은 드래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매일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게 될 것이었다.
또한 탑은 보고(寶庫)이기도 했다.
마장기와 백야철 같은 지고의 보물들이 탑에 보관되어 있다.
그것을 잃는다는 건 결사들에게 지나친 손해였다. 거의 모든 걸 잃는 셈이었다.
하야테가 안심시켰다.
“탑은 하나가 아니라오. 장장 수천 년을 용과 싸워온 우리에게 설마 아무런 대비도 없었겠소.”
“다만 이사를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2좌 프론잘츠의 등장이었다.
표정이 험악했지만 거인족의 특성 때문이다.
딱히 화가 난 눈치는 아니었다.
하야테와 그리드에게 불만을 표출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에게 잘못이나 실수는 없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거인족다운 반응이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템빨신.”
프론잘츠는 기율과 법도를 중시한다.
그리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예의를 갖췄었다.
선구자란 즉 인류의 대표이니 연령과 종족과 관계 없이 존중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반응은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상전을 대하듯 허리를 크게 숙였다.
“편히 대해주십시오.”
그리드는 결사를 존경한다.
하물며 프론잘츠는 고대부터 살아온 거인족이다. 그의 태도가 불편했다.
프론잘츠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존중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익숙해지십시오.”
프론잘츠의 태도는 당연했다.
이제 그리드는 인류의 대표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염원으로 신이 되었다.
게다가 드래곤 웨폰을 만들었으니 아마도 용살의 자격까지 갖췄다.
‘본인은 스스로의 위대함을 아직 완전히 자각하지 못한 건가.’
민망해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프론잘츠가 하야테를 재촉했다.
“어서 짐을 챙기십시오. 염룡이 추격해올 확률이 무척 높으니 서둘러야 합니다.”
“음, 상황이 이리 됐으니 그리드 그대는 어서 돌아가도록 하시오.”
“함께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하야테에게 그리드가 억지를 부렸으나.
“그래서야 다시 용들의 관심을 끌고 말 터인데.”
“...”
“한 가지만 명심하시오. 용들이 그대가 아닌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대가 나보다 못해서가 아니라오.”
“...네.”
좋게 설득하는 하야테에게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운 표정을 금치 못한 그리드가 하야테에게 구젤의 검을 건네주었다.
“그럼 이 검을 저 대신 비반 님께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반 님께 약속드렸던 선물입니다.”
“...!”
프론잘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결사들은 만들지 못했던 드래곤 웨폰.
그것으로부터 <드래곤 슬레이어>의 기운을 느낀 까닭이다.
물론 일부에 불과했으나 충분히 막강했다.
‘예상하긴 했지만... 충격적이군.’
하야테가 ‘용의 목을 베고’ 얻은 힘을, 그리드는 기술만으로 구현해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잠재력이었다.
[지혜의 탑의 2좌 ‘프론잘츠’의 호감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
“비반 공이 몹시 기뻐하겠어. 그대를 평생의 은인으로 삼지 않을까 싶소.”
“제 평생의 은인 중 한 분이 바로 비반 님입니다. 하야테 님도 마찬가지고요.”
[지혜의 탑의 2좌 ‘프론잘츠’의 호감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
“조만간 사람을 보내어 새로운 탑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소. 부디 또 찾아와주시오.”
옅게 웃으며 말한 하야테가 즉시 탑으로 돌아갔다. 프론잘츠도 뒤를 쫓았다. 그리드에게 목례하면서다.
‘혹시 탑이 잘못 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탑의 기척은 밖에서 느끼기에도 소란스러웠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걸 보아 마장기를 운반하는 듯했다.
‘나도 이만 돌아...?’
떠나려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말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반으로 갈라진 탑의 상단부에서 초대형 비공정이 나타난 까닭이다.
전장이 족히 300미터는 넘었다. 높이는 그 절반이다.
광활한 규모를 자랑하는 탑의 내부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면, 저만한 물건이 대체 어떻게 탑 안에 보관되어 있던 건지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멋진데. 저것도 거인족의 유물인가.’
그리드는 우선 함포에 시선을 빼앗겼다. 특히 상단부 갑판에 설치 된 함포의 크기가 압도적이었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버금가는 위력을 자랑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어? 이, 이보게!!”
“...?”
비공선을 구석구석 살피던 그리드가 두 눈을 의심했다.
함포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비반이 그리드를 발견하곤 고래고래 소리쳐왔다.
“왜!! 왔다고!! 말하지!! 않아아아악...!!”
“...”
뭘까.
왜 저 양반만 혼자서 바깥에 매달려 있는 걸까.
그리드는 궁금했지만 애써 호기심을 외면했다. 이유를 알아봤자 허무하고 황당할 게 뻔해서였다.
콰아아아아앙...
12개의 엔진에서 일제히 마력을 분사한 비공정이 어느덧 점이 되어 사라져갔다.
그리드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훗날 탐욕으로 비공정을 만들 때 라드볼프가 큰 도움을 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리드가 서둘러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다.
다크엘프 왕이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