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 71권 - 16화
“아고 죽겠다...”
“사우나 하고 싶네.”
운영팀 팀원들에게 야근은 일상이 됐다. 붉게 충혈 된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각자 수십 개의 홀로그램을 띄어놓고 대륙 각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느라 피로도가 높았다.
운영팀 입장에선 날이 설 수밖에 없다.
이번 전쟁엔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조건이 너무 많았으니까.
예를 들어 ‘대악마의 권능’을 이유로 플레이어에게 보장된 플레이 타임을 제한한다거나 하는 부분 말이다.
운영팀이 모든 상황을 숙지하고 고객관리센터에 전파해야만 클레임에 대응하기 쉬워진다.
“어...? 자, 잠깐! 이것 좀 봐주세요.”
“뭔데?”
지옥 상황을 모니터링하던 팀원이 상급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후.
운영팀이 발칵 뒤집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노이즈가 너무 심해. 하나도 안 들려.”
있어선 안 될 괴이가 운영4팀 팀장을 당혹시켰다.
화면 속.
크라우젤과 유라의 눈앞에 ‘모자이크 덩어리’가 일렁이고 있었다.
당최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정보 열람 권한이 없어서다.
플레이어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관찰 권한이 차단됐다.
“DS8051이 권능을 쓰자마자 이렇게 된 거라고?”
“네.”
코드네임 DS8051은 가미긴의 영혼 보관소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고위 악마로 강력한 권능을 지녔다.
놈의 정보를 불러온 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의식 속 트라우마를 끄집어내는 권능이라...”
권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한 듯했다.
레라지에 앞에 서있는 베리아체의 환영이 증명한다.
문제는 너무 잘 작동됐다는 부분에 있었다.
“크라우젤과 유라의 트라우마를 구현한 게 저렇게 된 거네. 우리가 봐선 안 될 트라우마인 거고.”
“네, 확실해요. 이건 두 사람의 개인 정보에 접근한 겁니다. 그게 아니면 우리의 관찰 권한이 차단 될 이유가 없잖아요.”
“골치 아파졌어.”
플레이어가 S.A에 제공하는 정보는 크게 3가지다.
기본적인 신상 정보, 캡슐이 스캔하는 뇌파와 신체 정보, 게임 진행 내역.
‘기억’을 제공하는 경우는 없다.
S.A가 요구하지도 않는다.
한데 DS8051은 크라우젤과 유라의 기억을 읽고 두 사람의 트라우마를 구현한 것이다.
모르페우스가 제멋대로 행사한 권한이었다.
소송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는 사태였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모르페우스가 약관을 어기다니...’
온갖 상상이 범람했다.
모르페우스의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S.A그룹이 무너지는, SF영화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상상이다.
반면 윤상민 이사의 반응은 담담했다.
“문제될 게 있나?”
“네?”
“크라우젤과 유라의 트라우마를 열람한 건 모르페우스지 당사가 아닐세. 모르페우스가 우리에게 정보를 차단한 내역이 전부 증거로 남았어. 두 사람의 개인 정보는 지켜진 거잖나.”
윤상민 이사는 모르페우스와 S.A를 별개로 보았다.
약관의 특정 조항들을 지목하면서다.
‘원활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모르페우스는 이용자의 정보를 열람하고 이용할 권한이 있다.’는 조항과 ‘모르페우스가 이용자에게 제시하는 퀘스트와 컨텐츠는 이용자의 정보와 경험을 근거로 한다.’는 조항 등이었다.
“그리고 경험은 즉 기억이기도 하지. 모르페우스가 두 사람의 기억을 엿보고 끄집어낸 트라우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 약관에 위배되는 행위가 아니야.”
“백 번 양보해서 경험과 기억을 같은 개념으로 친다고 해도, 게임 내 기억이 아닌 현실의 기억에서 비롯한 트라우마잖습니까? 이용자가 모르페우스에게 열람을 허가한 건 게임 내의 기억이지 현실의 기억이 아니라고요.”
“Satisfy에 접속한 상태로 타인과 대화하는 과정에 기억을 유출한 거겠지. 그로 인해 현실의 기억이 Satisfy의 정보로 판정된 거고.”
“...전 점점 무서워지네요. 모르페우스가 확보하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영향력이 너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언젠간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거 아닙니까?”
“최근에 공상과학영화라도 봤나? 걱정하지 말게. 모르페우스는 단지 Satisfy를 위해서 권한을 행사할 뿐이야. 그 권한을 악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애초에 그렇게 설계 됐다고.”
이번 경우만 봐도 악용과는 거리가 멀다.
모르페우스는 플레이어의 정보를 ‘재료’로 써서 Satisfy를 더 맛깔나게 ‘요리’했을 뿐이다.
플레이어에게 현실감을 선사하고 몰입시키기 위함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이 문제는 법무팀이 알아서 할 테니 그만 신경 끄라고.”
축객령을 내린 윤상민 이사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을 장식하는 주인공은 그리드다.
플레이어가 제공하는 모든 정보를 열람하는 모르페우스가 봤을 때 성공과는 도통 거리가 멀었던 인물.
그가 지금은 세계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밸런스를 명분으로 삼은 모르페우스에게 꾸준한 견제를 당하며 종국에는 인마대전에 휩쓸렸으나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도리어 더욱 더 성장해버렸다.
‘그리드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모르페우스는 명확한 선을 지킨다. 명분을 핑계로 월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약관을 최우선으로 둔다.
4팀 팀장이 염려하는 영화 속 전개 같은 사태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
‘전원 훌륭했다.’
쿠자라크는 수십만의 목숨이 스러졌던 전장을 회상한다.
기사라고 주장해도 손색없는 병장기를 무장한 연합군의 병사들.
스탯과 스킬에만 의지하지 않고 기교를 구사한 연합군의 기사들.
오만을 버리고 그들과 교감을 나누었던 플레이어들.
자신의 재능을 드디어 정확히 파악하고 숙련 된 랭커들.
숙련의 단계를 넘어 초월의 단계로 나아가는 템빨단원들.
출신, 인종, 소속, 사상.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귀감으로 삼고 하나로 똘똘 뭉친 광경은 쿠자라크에게 커다란 감격을 선사했다.
쿠자라크의 이상(理想)은 이미 구현되어 있던 것이다...
누구에 의해서냐는 의문은 어리석다.
답은 명확했으니.
‘그리드.’
그 존재를 인지했을 땐 이미 너무 높은 곳에 올라있던 인물.
영영 연이 없을 거라 믿었건만, 서리여왕의 심장이 그의 손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말았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인연이었다.
‘멀리서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크라우젤의 폭력적인 재능으로도 완성시키지 못했을 세계.
그리드가 만든 이 세계를, 나는 지키고 싶다.
지금도 캡슐에 누워있을 동생의 미소를 지켜주기 위해.
푸욱. 푸욱. 푸욱...
눈보라치는 혹한의 땅.
설원에 커다란 발자국을 새기며 나아가는 쿠자라크의 뒷모습이 더 이상 외롭지 않다.
***
지혜의 탑.
세계관의 관점에서 봤을 땐 인류의 수호를 위해,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봤을 땐 오직 선구자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다.
특수한 정보와 보상을 특정 1인이 독점하게 되므로 악용 될 여지가 컸다.
막말로 인성에 하자가 있는 플레이어가 선구자가 됐다면 온갖 혼란을 야기했을 터다.
함구의 맹세를 어기고 탑의 기술이나 정보를 팔아먹다가 탑의 존재를 유출하고, 그로 인해 드래곤의 주의를 끌어 대공황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물론 선구자는 맹세를 어기는 순간 큰 페널티를 받는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된 안전장치가 아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수틀릴수록 막나가는 법이니.
지혜의 탑이 존속하기 위해선 탑과 선구자 간에 신뢰가 형성되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우젤과 그리드가 선구자가 된 것은 여러모로 큰 행운이었다.
그들은 인연을 숭상하며, 자존심 때문에라도 맹세를 어기지 않기에.
‘결사 놈들이 이런 곳에 숨어있었구나.’
구젤의 검과 도.
그리드에 의해 탄생한 두 자루 드래곤 웨폰엔 구젤의 자아가 담겼다.
비록 일부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절반으로 쪼개졌으나, 드래곤은 워낙 거대한 존재이며 구젤은 상위룡에 속하는 개체이다. 작은 자아조차도 구젤의 기억과 의지를 계승했다.
‘입자 단위로 분해하고 혼합하여 성질을 바꾼 마력을 토맥으로 흘려보내 구축한 결계다. 발견하지 못했던 게 당연해.’
드래곤은 마법의 조종이다.
구젤의 자아가 지닌 지식과 지혜는 영락한 것이나, 지혜의 탑을 감싼 이적을 충분히 분석해냈다.
다만 법칙을 파악하는 수준에 그쳤다. 결계를 부술 방법을 강구하기엔 자격이 부족했다.
‘확실한 기회가 찾아오길 기다려야겠군...’
탑과 가까워지고 있다.
결사들, 특히 하야테가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학습한 바 있는 구젤의 자아가 침묵했다. 생각 자체를 멈췄다. 자신의 존재감이 혹시라도 새어나가지 않게끔 만전을 기했다.
그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연기할 속셈이지.”
-...
구젤의 자아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드의 혼잣말을 흘려들었다.
그래, 혼잣말인 줄 알았다.
“수틀리면 없애버리는 수가 있어. 녹여서 새로 만들고, 또 다시 녹여서 새로 만들고. 무식한 방법이지만 몇 번이고 반복하다보면 드래곤의 자아라도 점차 희미해져가겠지.”
-...!?
구젤의 자아가 동요했다.
그리드가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과 도로 만들어지고 의식을 되찾은 뒤로 자신은 단 한 번도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다. ‘생각’마저도 방금 막 처음 했다. 심지어 잠시였다.
한데 그리드에게 자신의 존재를 대번에 간파당하고 말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야테에게도 벅찬 일일 텐데?’
저벅.
어느새 탑의 입구에 도착한 그리드가 속삭였다.
“생전의 미련 따위 버리고 내게 복종해라. 그게 네가 태어난 이유니까.”
구젤의 검과 도엔 ‘광증’을 겪는 대상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옵션이 귀속되어 있다.
광룡에게 상처를 입고 약해져 결국 죽음에 이른 구젤의 원한이 고스란히 계승되었다는 증거다.
그리드는 진즉부터 눈치 챘다.
드래곤 웨폰에 귀속 된 구젤의 자아를.
구젤의 자아가 스스로를 숨겨 시스템마저 속였다지만, 창조자인 그리드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구젤의 자아가 절망했다.
자신의 격 따위론 그리드를 감당하지 못함을 눈치 챈 까닭이다.
만물을 지배하는 템빨신의 권능이 구젤의 자아를 압박하고 있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네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죽은 용의 탄식이 기록합니다.]
두 자루 드래곤 웨폰이 웅웅 운다.
[아아, 원통하도다.]
[어리석은 신을 만나 눈을 떴다 여기었거늘 위대한 신이었도다.]
[나는 영원토록 자유롭지 못하겠구나.]
[죽음으로 용들의 수치가 되었고, 죽어서도 용들의 수치가 되었다.]
[수천 년을 군림해온 내가 한낱 조롱거리로 영락하였구나.]
[한탄하는 용에게 템빨신이 이르기를]
“...?”
의외의 타이밍에 발생한 서사시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이런 미친.’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붉힌다. 오래간만의 수치플레이가 썩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내게 협력하면 아무도 너를 조롱하지 못할 거다. 만약 너를 조롱하는 놈이 있다면 너와 똑같은 신세로 만들어줄 테니까 나를 믿고 따라라.”
[“너를 비웃는 용들 또한 너와 같은 절망을 맛볼 터이다.”]
[오오, 늠름한 기상이로다.]
[템빨신의 선언에 죽은 용이 탄복하였다.]
...
..
[서사시의 열네 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 완성 효과로 <구젤의 어금니(검)>과 <구젤의 어금니(도)>에 숨겨진 에고를 각성시키고 복종시켰습니다.]
[서사시 완성 효과로 ‘용단’을 체화하고 있는 당신의 마나핵이 강화됩니다.]
[공격마법 사용 시 석상룡 구젤의 기운이 일부 발현됩니다.]
-드래곤?! 어이어이, 갓리드! 대체 어디서 뭐하는 거냐고! 굉장하잖아!!
-대, 대단해요! 멋져요! 느, 늠름해요!
-후후훗, 역시 주군이십니다. 저로서는 도무지 이길 도리가 없군요. 제 안에 봉인 된 흑염룡도 감탄을 금치 못하는 중이랄까요.
‘아니 오해라고.’
서사시의 내용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나는 라우엘과 다르다.
“...!”
빠르게 올라가는 길드 채팅을 보고 얼굴을 붉히던 그리드가 문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탑의 정상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껴서다. 빛살처럼 뻗어지는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컸다. 세계 전역으로 퍼지는 듯했다.
용살자 하야테.
표표히 선 그가 천하를 도발하고 있었다.
용들의 이목이 그리드가 아닌 자신에게 쏠리게끔 유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