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14화
“잠시.”
그리드는 우선 옷부터 입었다.
루비아 공왕이 진상한 옷인데 장식과 끈이 무척 많았다. 붉은 비단에 화려하게 어우러지며 나풀거리는 양식이었다.
그리드는 이 선물을 달갑게 여겨본 적이 없다.
환복에 최소 5분은 소요되기 때문이다. 공왕이 일부러 엿을 먹이는 건가 의심했었을 정도다.
루비아 공국은 가우스 왕국과 혼약으로 맺어진 맹우였으니.
겉으론 항복해놓고 뒤로는 치졸한 수작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다 싶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의심을 완전히 거뒀다.
‘이럴 때 입으라고 진상한 거구나.’
금전의 신 베니스.
그녀의 방문엔 예고가 없었다.
그리드는 갑작스럽게, 심지어 속옷 차림으로 그녀를 마주하게 되었다.
침착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혹을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이 옷은 큰 도움이 됐다. 옷을 입으며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베니스가 주신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욕은 신성과 거리가 먼 법이다. 차라리 저열한 것에 속했다.
일부 상인을 제외하면 금전의 신을 숭상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스가르드에서 베니스의 입자는 약한 편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변화를 바라는 건가.’
대개 아쉬운 존재일수록 변혁을 꿈꾼다.
베니스는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일심동체가 아닐 것이다.
‘내게 팔고 싶다는 정보의 내용이 기대되는 걸.’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했을 쯤, 그리드는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투명한 보석들이 수놓인 끈을 상의 위로 느슨하게 조였다.
이런 사치품은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편이 도리어 품격을 살리는지라, 어깨에 덮은 천을 내려 은근히 가렸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니스가 입을 열었다.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딱 보기 좋아요. 그 정도 의복을 소화할 정도면 어떤 의복이든 잘 어울리겠네요.”
‘내가 옷빨이 잘 받긴 하지.’
이럴 때마다 열심히 운동하는 보람을 느낀다.
말 그대로 여신.
세계 최고를 논해도 좋을 수준의 미녀가 밝게 웃으며 칭찬하자 그리드의 기분은 자연히 좋아졌다. 사심을 품는 게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었다.
“이 목걸이와 반지를 함께 장식하면 곱절은 멋지겠는 걸요?
[12만 명성 포인트를 소모하여 <해일 진주 목걸이>를 구매하시겠습니까?]
[10만 명성 포인트를 소모하여 <석양 담긴 반지>를 구매하시겠습니까?]
‘...이 장사치가.’
베니스의 칭찬은 영업의 일환에 불과했다. 은근슬쩍 상품을 내놓는 꼴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꽤 상등품이긴 한데.’
목걸이와 반지의 정보를 살핀 그리드가 구매를 거부했다. 이쯤 되는 물건은 자신이 직접 만들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꽤 많은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수십 만 명성을 허무하게 날릴 이유는 없었다.
“내게 큰 도움이 되는 정보를 팔고 싶다고요.”
“네.”
“나는 아스가르드와 적대하고 있는데 괜찮나?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건 즉 아스가르드에게 손해를 입히는 셈이 될 텐데요.”
“당연히 괜찮답니다. 아스가르드야 어찌됐든 장사가 더 중요해서요. 그보다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제게는 고객님이 왕이니까요. 앗, 왕이 신보다 아랜가? 뭐 아무렴 좋지만요.”
“그래서, 팔고 싶다는 정보의 내용이?”
그리드가 본론을 꺼내며 베니스를 관찰했다.
시선을, 호흡을, 사소한 몸짓 하나까지도 전부 시야에 담았다.
이제부터 그녀가 작은 거짓말이라도 하는 순간 그리드는 높은 확률로 눈치 챌 것이다. 경험과 통찰을 괜히 쌓아온 게 아니다.
“아스가르드는 지크의 부활을 좌시하기 힘들었고 결국 쥬다르가 나섰어요.”
“쥬다르...”
건강과 지혜의 신이다.
“역병이라도 창궐하려나?”
옛 사건을 떠올린 그리드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쥬다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야 당연하다.
무신 제라툴의 침략도 겪은 마당에 그보다 약할 쥬다르에게 위축 될 이유가 없었다.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베니스가 방긋 웃었다.
“인류는 예로부터 삼신이라 하여 레베카, 도미니언, 쥬다르를 섬겨오지 않았나요? 쥬다르를 쉽게 보았다간 낭패를 겪을 거랍니다.”
‘확실히... 쥬다르쯤 되면 제라툴 이상으로 골치 아픈 부분이 있을 수도...’
그리드가 납득했다. 신을 평가할 때 중요한 척도는 무력이 아님을 깨달았다. 배움을 얻었다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물론 쥬다르가 인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아요. 악마와 전쟁 중인 인류를 명색이 신이 위협하기라도 했다간 신앙을 크게 잃을 테니까요.”
“티 나지 않게 배후에서 악마들과 손을 잡을 거다?”
“혹은 드래곤일 수도 있겠지요?”
베니스의 시선이 의미심장했다.
그녀는 그리드의 등 뒤를 보고 있었다. 새로운 신검이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투영됐다.
“쥬다르가 악마나 드래곤과 손을 잡으면 무슨 일이 생기지?”
그리드의 표정은 담담했다. 하지만 속내는 불편했다. 구젤의 아들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을 떠올리면서다.
“그야 악마와 드래곤이 몹시 강력해지죠. 쥬다르의 권능은 굉장하답니다. 약골을 강골로, 강골을 약골로, 강골을 더욱 더 강골로 만드는 식이죠. 혹은 천재나 백치로 만들 수도 있고요.”
‘버프와 디버프의 신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
“단순한 강화와 약화가 아니에요. 대상의 약점을 없애 불사의 존재로 만드는 식으로 연계 되거든요. 자, 여기서부터 본론이랍니다.”
눈을 찡긋한 베니스가 손가락 1개를 펼쳤다.
“당신이 보유 중인 명성의 80퍼센트를 제게 주세요. 그럼 대가로 쥬다르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쥬다르의 권능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드릴게요.”
베니스가 손가락 하나를 더 펼쳤다.
“명성이 아닌 신위를 지불하는 방법도 있답니다. 단 1개의 신위만 받고 쥬다르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넘길게요. 그가 어떤 죄를 범해왔는지도.”
베니스의 제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명성도, 신위도 잃기 싫다면 드래곤 웨폰을 지불하는 건 어떨까요? 방금 막 만드신 그거요. 어차피 한 자루 더 만들 재료가 남아있네요. 쥬다르의 정보는 물론이고 쥬다르 다음 차례로 나설 신의 정보까지 알려드릴 테니 잘 생각해보세요.”
“음...”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생물의 약점을 완전히 없애고 불사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겠지. 정작 신도 불사가 아니니까.”
그리드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를 떠올렸다.
Satisfy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이므로 그리드만 일방적으로 지닌 지식이다.
“쥬다르의 권능은 약점을 없애는 게 아니라 축소시키는 게 더 정확하겠군. 예를 들어 아킬레스건을 베지 않으면 죽지 않는 생물을 만드는 식으로.”
“...”
베니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눈동자에 박힌 별빛 중 일부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떨림이었지만 그리드의 통찰력을 피하진 못했다.
“쥬다르가 손잡은 대상은 당연히 악마일 테지. 그 옛날 헥세타이아의 경우만 봐도 드래곤과 소통하는 건 힘들어 보였으니까.”
먼 옛날.
질투의 죄를 범한 헥세타이아는 악마들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인계를 침략하도록 유도했다.
당시 전쟁의 무대는 번헨 열도.
바알의 계약자 파그마가 열도의 섬들을 결계로 만들어 악마들의 침공을 순차적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석상룡 구젤이 개입하려 했었다.
당시 광룡에게 큰 상처를 입었던 구젤은 번헨 열도에 침공한 악마들을 먹이로 삼아 상처를 회복할 심산이었다.
탑의 결사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죽어버렸지만...
아무튼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신과 드래곤은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혹은 협조하지 않는다.
인류의 멸망을 바랐던 헥세타이아의 목적을 수포로 돌리려 했던 구젤의 행동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쥬다르가 범했다는 죄는 분노인가. 지크가 부활하자마자 악마들에게 쪼르르 달려간 꼴을 보면 찌질한 게 죄일 수도 있겠군.”
베니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여전히 미소는 유지했지만 그게 한계인 듯했다.
“이번에 우리가 쥬다르의 시련을 이기면 다음 차례로 나설 신이야 뻔하지. 같은 삼신인 도미니언이 아닐까? 전쟁의 신이니만큼 대규모 전투에서 존재감은 제라툴 이상이겠군. 대비책을 마련해 놔야겠어.”
“...”
“여기까지 내 추측 중에 틀린 부분이 있나?”
그리드의 확장 된 사고가 판단한다.
틀린 부분은 없다고.
과연 베니스는 부정하지 못했다. 장사꾼답게 신뢰를 생명으로 여기는 눈치다.
서서히 미소를 거둔 그녀가 급기야 울상을 짓고 빽 소리쳤다.
“미워! 너무 미워요!! 당신은 정말이지 못 되었군요!!”
‘이 여자가 탐욕이군.’
내게 거래를 제안한 것 자체가 아스가르드를 배신한 죄에 속한다.
여태껏 그녀는 몇 번이고 탐욕의 죄를 범했으리라.
‘어쩔 수 없겠지. 그녀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지 못하는 신이니까.’
죄를 범해서라도 명성과 신위를 쌓는 수밖에.
베니스를 꿰뚫어 본 그리드가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시 내가 원하는 비급을 구해줄 수 있나? 태양 마차에선 품절 상태던데.”
“...어떤 비급이요?”
“쌍수검을 다루는 비급. 제라툴이라면 손쉽게 작성할 테지.”
“그야 그렇지만 제라툴이 의심할 거랍니다. 저를 통해 특정 비급을 주문한 신은 여태껏 없었거든요. 의심 받지 않고 설득하려면 신건비가 상당히 많이 들 거예요.”
“시세의 2배를 쳐주지.”
“5배는 받아야겠는 걸요.”
“1.5배.”
“4배.”
“그럼 어쩔 수 없군.”
“3배! 3배요!!”
“좋아. 오늘 당신이 보여준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번 한 번만 양보하겠어.”
“그것 참, 너무너무 고맙네요.”
방긋 웃는 베니스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솟았다.
오늘 그녀가 그리드를 찾아온 이유는 장사를 하려던 것이다. 한데 그리드의 말대로 호의를 베푼 꼴이 되고 말았다. 너무 많은 힌트를 준 게 패착이었다. 그간의 행보를 보아 이토록 영리할 리가 없는데 무슨...
이도류 비급을 3배 가격에 팔아먹어도 수지가 안 맞다...
“떠나기 전에 검이라도 구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베니스가 정중히 요청했다.
그리드는 거부하지 않았다.
명성과 신위에 집착하는 신.
베니스의 목적을 명확히 알게 된 이상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목적을 잘 이용해서 앞으로도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는 판단이었다. 작은 호의 정도는 베풀 의향이 있었다.
“우와아...”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베니스의 두 눈이 배는 커졌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며 그리드의 팔을 툭툭 두드려댔다. 누가 보면 친한 사이인 줄 오해할 것 같았다. 명품에 진심인 여신답게 흥분한 것이다.
‘대박이다.’
흥분하긴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구젤의 어금니(刀)>
등급:신화
내구력:무한 공격력:15,690
*공격 속도 50퍼센트 상승.
*공격 스킬 전개 속도 30퍼센트 상승.
*지(地) 속성 공격력 400퍼센트 추가.
★공격 대상을 높은 확률로 ‘석화’.
★용족에게 공격력 150퍼센트 상승 적용.
★드래곤의 <절대 방어> 높은 확률로 무시.
★‘발도’시 공격 속도 최대치로 보정.
★‘발도’ 후 첫 공격의 위력이 300퍼센트 상승 적용. 단, 일반 공격과 ‘발도 관련 스킬’에만 적용.
★‘광증’을 겪는 대상에게 공격력 300퍼센트 상승 적용.
최초의 드래곤 웨폰입니다. 템빨신 그리드가 창조하였습니다.
사용 조건:신, 초월자, 드래곤.
무게:2,100
투명한 도신에 신기루처럼 맴도는 잿빛의 마력이 신비롭고 아름답다.
역사상 최고의 예술품들과 나란히 놓아도 압도할 작품성이었다.
위력이야 두 말할 나위 없다.
기본 공격력은 아쉽게도 <헥세타이아의 소검>에 미치지 못 했지만, 여러 조건을 충족할 경우엔 도리어 초월한다.
‘기본 성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템빨신의 타이틀은 대장장이의 신이 아닌 만물의 창조자다.
어떤 물건이든 만들 수 있는 반면 대장기술에 한해선 헥세타이아보다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질 거라고 그리드는 확신했다.
신위라는 개념이 괜히 있겠는가.
신위가 오를수록 만드는 아이템의 위력도 상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초조할 필요가 없는 거다.
‘물론 지금도 내가 헥세타이아보다 못하다고 보긴 어려워.’
아이템의 위력은 수치만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세부 옵션을 봐야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헥세타이아의 소검보다 구젤의 어금니가 훨씬 더 뛰어났다.
무엇보다 그리드에겐 <템빨신 그리드의 개변> 스킬이 있다.
구젤의 어금니는 앞으로 3번이나 더 발전할 여지가 남았다.
<드래곤 슬레이어?>
드래곤 웨폰을 지녔으나 용살(龍殺)을 증명하진 못했습니다. 당신이 드래곤 슬레이어인지 아닌지 혼란해하는 이들이 생깁니다.
*드래곤과 전투 시, 확률적으로 <절대 방어>를 무시.
*드래곤과 전투 시, 확률적으로 능력치 상승.
“...”
구젤의 어금니의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이름 뒤에 붙은 물음표며, 설명이며.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았지만 성능만큼은 신화급이라고 봐도 무방한 칭호였다. 특히 드래곤 웨폰과 상성이 좋았다.
‘좋아.’
큰 의욕을 품은 그리드가 망치를 다시 손에 쥐었다.
구젤의 어금니는 하나 더 남아있었다.
용광로의 불길이 유지되는 동안 제련을 마치고 칼날의 구조를 잡아놓았으니 마무리 작업만 하면 완성이다.
잠시 후.
[템빨신 그리드의 신물(神物)이 출현하였습니다.]
[템빨신의 신화가 강화됩니다.]
[템빨신교 교인들의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하고 검무 관련 페널티가 소폭 감소합니다.]
사람들은 데자뷔를 느꼈다.
템빨신교 교인들이 부러워 탄식하는 사람이 속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