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13화
전각을 스치며 물결치는 구름들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미련의 표상이다.
쫓겨난 신들은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제라툴이 패퇴하고 지크가 부활하였다고.”
되뇌는 한울의 표정이 고즈넉하여 삼사(三師)는 사뭇 놀랐다.
‘폭소하실 줄 알았건만.’
태초의 신들 중 가장 감정에 솔직하신 분이다.
경박하다는 비난이 잇따르곤 했지만 그건 흥취를 모르는 자들의 시기일 뿐이었다.
“예, 망신을 과하게 치렀으니 아스가르드도 좌시하지 못하겠지요.”
“도미니언... 아니, 쥬다르가 움직이겠구나.”
삼사가 눈치 챘다.
한울께서 출사를 고민하고 계심을.
시기가 적절하긴 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들을 연이어 겪은 아스가르드의 방비가 잠시 소홀해졌을 터이니.
이때를 노려 아스가르드를 침략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서쪽에 도착하는 순간 신위도 크게 오를 테지.’
서쪽 땅의 인간들은 아스가르드에 큰 불신을 품은 상태였다.
악마들의 침략을 겪는 동안 도움을 받지 못했으니.
그들에게 새로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다만 승산을 논하기엔 부족하다.’
이런 기회는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제라툴의 패퇴와 지크의 부활이 겹친 건 그만큼 큰 사건이었다. 확률적으로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기회를 틈타는 게 꼭 능사는 아니었다.
아스가르드를 침략해봤자 승산을 엿보기 힘들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다.
기본적인 전력 차이가 컸다.
제라툴은 ‘격의 복원’에 들어갔을 테고 쥬다르는 자리를 비울 거라고 해도.
저쪽엔 리카엘과 도미니언이 남는다.
쥬다르와 도미니언, 그리고 리카엘은 레베카가 탄생과 동시에 빚은 최초의 신과 사도.
우리를 이 땅으로 쫓아낸 원흉들이었다.
무력의 개념을 초월하는 권능과 권한을 지닌 놈들이다.
절대신들과 고룡들, 그리고 지옥의 3악처럼 ‘최초’나 ‘태초’의 수식언을 지닌 존재들은 본디 특별한 법이므로 좌시할 수가 없다.
“그리 긴장하지 말게.”
삼사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풍사, 운사, 우사.
그들 셋을 바라보는 한울의 눈빛에 초조함은 없었다.
“아직은 지켜볼 참일세. 템빨신과 지크가 혹 쥬다르에게 낭패를 안길 수도 있으니. 만약 그들이 도미니언까지 지상으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한다면 그때야말로 비로소 우리의 기회일 테지.”
“...템빨신을 몹시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지크야 예로부터 유망했다. 오죽하면 레베카가 직접 저주를 내렸겠나.
한울이 그를 회유하려했을 때 삼사는 찬성했다.
지크를 시작으로 칠악성을 부활시켜 거느릴 수만 있다면 정말로 큰 전력을 갖추는 셈이었으니.
하지만 템빨신은 애매했다.
바람이 속삭이기로 템빨신이 있었기에 인류가 악마들의 침공을 버텼고 지크가 부활했다지만.
삼사는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의 그리드를 기억한다.
그래, 템빨신은 환국을 방문했을 무렵까지도 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우의 시련을 통과하는 업적을 세우긴 했으나 그 이상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과연 그가 쥬다르의 계략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삼사는 어렵다고 보았다.
‘공멸하는 게 가장 좋은 그림이긴 한데.’
삼사가 솔직한 바람을 품었다.
한울의 사도가 되기를 거부했던 지크를 사도로 거둔 그리드.
아무래도 삼사 입장에선 지크와 그리드 둘 모두 내심 괘씸했다. 그들이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서로 죽고 죽이길 바랐다.
한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템빨신을 높이 평가하기보단 베니스에게 기대를 거는 걸세.”
“과연...”
“과거에 그녀가 범했던 죄를 생각하면 충분히 기대할 만하군요.”
표정이 한층 누그러지는 삼사였다.
“...”
소별왕은 그저 잠자코 있을 뿐이다. 삼사를 바라보는 눈빛이 잠시 서늘해졌으나 정작 당사자들은 눈치 채지 못했다.
***
바알의 침략에 대응하고 지크의 전 육신 활용법을 고민하는 등.
그리드의 심력은 크게 소모된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여 쉬지도 못하고 신검의 제작에 돌입했다.
그렇다고 해서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손끝이 무뎌지는 등의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진 않았지만, 솔직히 힘든 게 사실이었다.
현실과 똑같은 환경에서 음속을 넘나드는 전투를 치른 직후다. 체력은 진즉에 회복된 반면 정신적인 피로감은 여전했다.
물론 그리드의 끈기와 집중력은 힘든 상황일수록 더욱 더 빛났다.
힘든 것과 별개로, 그리드는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작업을 통제했다.
용광로의 불길을 의도대로 조절했고 예상 외로 치솟는 화력을 역이용해 어금니의 제련에 성공했다.
그리고 의지와 심상의 강화라는 보상까지 얻었다.
고작(?) 재료 하나 제련했다고 해서 얻은 보상이라기엔 과했다.
모든 개념 중 가장 상위에 놓인 개념이 바로 의지와 심상이었으니.
하지만 그리드는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신의 용광로가 파괴된 까닭이다.
이 신화급 용광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금을 투자했던가.
평생의 동반자로 삼겠노라 다짐했었는데 일회용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최고의 결과를 노리는 수밖에 없다.’
용광로의 희생을 헛되이 만들 순 없다.
아직 완전히 파괴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화로 들끓는 머리를 차갑게 식힌 그리드가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따앙! 따앙! 따앙!!
헥세타이아의 모루와 망치로 어금니를 단련하고,
화르륵!
구멍 뚫린 외벽으로 여전히 화염을 분출 중인 용광로를 이용해 제련하고,
따앙! 따앙! 따앙!!
같은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칼날의 틀을 잡고, 직접 창조하여 머릿속에 각인시킨 설계도를 따라 구조를 구현하며.
“...”
몇 날 며칠이 흐르는 동안 그리드는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용광로 외벽이 완전히 붕괴되었고 대륙 각지에선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그리드는 오롯이 자신의 세계에 집중했다.
굴복하고도 간헐적으로 발작하며 그리드의 손길을, 불꽃을 거부하는 구젤의 어금니와 교감했다.
놀라운 점은, 제작 과정에서 <템빨신의 지배>스킬과 <탈리마의 수치>가 매우 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다.
<템빨신의 지배>Lv.1
만물의 창조자이자 지배자를 자처하는 신의 권한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일시적으로 지배합니다.
지속 시간은 기본 1초이며, 의지 스탯이 높을수록 지속 시간도 증가합니다.
지배 지속 시간 동안 대상 물건에 ‘파괴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스킬 적용 대상:인식하는 물건. 최대 2개. 의지 스탯 1,000당 1개 추가.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아이템을 ‘빌려 쓰는’ 덕공 계열 스킬과는 결이 다르다.
‘에고 아이템’에 명령을 내리는 탈리마의 수치와도 차원이 달랐다.
템빨신의 지배는 ‘만들어진 물건’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여기서 말하는 영향력이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파괴를 제외한 모든 권한의 행사... 막말로 무궁무진한 효용성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그리드의 손에 제련 된 구젤의 어금니 또한 만들어진 물건에 속했다.
놈이 발작할 때마다 그리드는 지배권을 행사해서 제압했고 스킬이 쿨타임일 땐 탈리마의 수치를 이용했다.
만약 이런 수단들이 없었다면 어금니를 검으로 만드는 과정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검의 형태로 가꾸려 할 때마다 본질을 잃지 않겠다는 듯 날뛰어 댔으니.
‘에고가 너무 강해.’
탈리마의 수치와 비할 바가 아니다.
염룡검의 반응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탈리마의 수치가 반항할 때면 으름장을 놓곤 했던 염룡검이 구젤의 어금니를 상대론 쥐 죽은 듯이 잠자코 있었다. 몹시 경계하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염룡검은 염룡 트라우카의 ‘일부’가 아닌 ‘숨결’로부터 탄생한 자아였으니까.
탐욕과 하나가 되어 신검이 되었다곤 하나, 구젤의 어금니(일부)를 상대론 근본적인 격이 떨어졌다.
트라우카가 구젤보다 상위룡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따앙! 따앙! 따앙!!
그리드의 망치질이 점차 정교해졌다.
드디어 순종적으로 변한 어금니를 천천히, 섬세하게 단련해나갔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있던 결을 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곡선은 완만하게 유지한다.
형태에 담긴 의도를 이해시킨다.
이해를 통해 교감을 강화하고 의지를 싣는다.
비로소 빛나는 도(刀)의 형태를 이뤘을 때, 탐욕으로 만든 손잡이를 결합시켰다.
아직 완성은 아니다.
더욱 날카롭게 벼려야한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긴장하는 염룡검의 기척을 읽은 그리드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이건 너희를 버리기 위한 과정이 아니야.”
구젤의 도가 독보적인 위력을 자랑할지언정 그리드는 기존 신검들을 버릴 생각이 없다.
구젤의 도를 만들며 얻은 깨달음을 신검들의 다음 개변 때 녹여낼 계획이다.
그리드가 새로운 신검을 만들며 원하는 결과는 전반적인 진화.
선별 과정 따위가 아니었다.
따앙! 따앙! 따앙!!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구젤의 도를 제작하는 기간 동안 그리드는 총 3회의 접속 제한 시간에 걸렸다.
장장 9일에 가까운 시간을 제작에만 매진했단 의미다.
동료들의 배려가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템빨단원들과 사도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굳이 그리드가 나설 필요 없도록 악마들의 침략을 저지했다.
레라지에와 함께 지옥에서 활약 중인 유라와 크라우젤의 공로가 특히 컸다. 가미긴의 영혼 보관소를 약탈해버렸으니.
덕분에 그리드는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거기에 템빨신의 지배와 탈수까지 활용하여 예정보다 훨씬 이르게 신검을 완성시켰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템빨신 그리드의 신물(神物)이 출현하였습니다.]
[템빨신의 신화가 강화됩니다.]
[템빨신교 교인들의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하고 아이템 착용 시 발생하는 페널티가 소폭 감소합니다.]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소식이었다.
다만.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30 상승하였습니다. 대륙 전역 명성이 1,000 올랐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드래곤 웨폰을 제작하였습니다. 칭호 <드래곤 슬레이어?>를 얻습니다.]
[템빨신교 교인들과 세상 모든 대장장이들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천상의 신들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석상룡 구젤의 아들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일부 드래곤이 상황을 재미있게 지켜봅니다.]
“...???”
그리드에게만 보이는 알림창의 내용은 마냥 달갑지 못했다.
신들의 경계야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니고 충분히 예상했던 범주지만, 드래곤이 반응할 줄이야?
‘최악의 경우’로 가정했던 사태가 현실로 닥쳐온 것이다.
하물며 구젤의 아들이라니?
‘어그로 잘못 끌렸는데?’
...뭐 어쩔 수 없다.
결과를 뻔히 알았어도 감수해야 했던 일이다.
드래곤 웨폰을 만들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드래곤이 무섭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만약 드래곤이 출몰하면 지혜의 탑이 개입할 명분이 서니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칭호까지 얻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뒤에 붙은 물음표가 심히 거슬리긴 하지만... 어찌됐든 모든 칭호를 통틀어 최상위격일 가능성이 높다.
“...!”
새로운 신검과 칭호의 상세 정보를 확인하려던 그리드가 흠칫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꽃처럼 받친 여성이 있었다.
그리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짓는데 정신이 아찔해졌다. 말 그대로 여신이었다.
베니스.
그리드는 그녀를 알고 있다.
금전의 신이자 태양 마차의 주인.
마차에서 헥세타이아의 모루와 망치를 구매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를 접했던 경험이 있다.
“정보를 팔러 왔답니다. 당신에게 무~~척 큰 도움이 될 정보를요!”
반짝이는 별빛을 품은 눈동자에 악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