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24화 (1,414/1,794)

템빨 71권 - 12화

[번헨 열도를 침략한 지옥군 사령관이 모조리 퇴각하였습니다.]

[번헨 열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 다시 재개될지 모른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두려웠다.

이 휴식이 예상보다 짧아도 버틸 수 있을까.

전쟁이 다시 시작 된다면 그때는 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사라질까.

“에디도 죽은 거냐... 12중대는 너랑 나 빼곤 전멸인 거냐고...”

“우냐. 내가 그래서 병사들하고 가까이 지내지 말라니까.”

“무슨 수로...? 함께 사선을 넘고, 서로 돕고, 웃고, 울었는데...”

“같이 웃고 울지를 말았어야지. 말 자체를 섞지 말고.”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젠장! 내가 놈들한테 몇 번이나 신세를 졌는데!! 반짝이는 눈으로 꿈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겠냐고...”

“...사실 나도 슬프다.”

정녕 승리한 군대가 맞는가.

연합군 진영의 분위기가 우울했다.

대부분 플레이어 때문이었다.

전쟁의 시작부터 끝(죽음)을 각오했던 NPC들과 달리, 플레이어에겐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었다.

NPC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다가가는 죽음의 무게를 전쟁 내내 실감한 후유증을 몹시 크게 겪었다.

“강해지자. 희생자를 한 명이라도 더 줄이려면 우리가 강해지는 수밖에 없어.”

“그래... 꼭.”

밤이 깊어질수록 선명해지는 슬픔을, 비장한 각오로 덮는다.

***

6악.

아니, 이젠 템빨신의 사도라고 불러야 할까.

압도적인 힘으로 벨레드를 패퇴시킨 지크가 번헨 열도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무척 유능한 인물이었다.

곧바로 현황을 파악하고 군대를 재편했다. 번헨 열도의 지형을 백분 활용할 수 있게끔 진영을 새로이 구축했다. 일처리가 빠르고 완벽했다.

수많은 전쟁을 지휘해온 피아로가 보기에도 흠 잡을 곳이 없었다.

‘과연 지크 공이시구나.’

육체를 되찾기 전부터 제국의 배후에서 군림했던 인물답다.

주군의 사도로 선택받을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나보다 백배천배 낫다.’

피아로는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비반에게 얻은 가르침을 체화할수록, 자연경의 경지를 끌어올릴수록 발전할 거란 확신도 있었다.

다만 다른 사도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라고 자평했다.

그건 자학 따위가 아닌 진실이었다.

다른 사도들은 태생부터가 남다르지 않나.

네펠리나는 드래곤이고 지크는 반신이다.

브라함은 베리아체의 직계이고 사리엘은 대천사다.

그나마 인간인 메르세데스에겐 혜안이 있다.

성장 잠재력부터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더.’

흔들리지 말자.

초조함에 휩쓸렸다간 자칫 길을 잃는 수가 있다.

느려도 올곧게 나의 길을 걷자.

막사에서 나온 피아로가 마음을 다스리며 심호흡하는 그때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장신의 사내가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2미터 23센티미터의 신장을 자랑하는 사내였다.

길게 뻗은 팔다리와 탄력 넘치는 근육을 활용해 창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악마들을 도륙했었다.

이름이 분명...

“쿠자라크라고 했지. 귀공의 활약을 인상 깊게 지켜보았소.”

“당신께서 홀로 바알의 권속들과 대악마들의 발을 묶어주신 덕분입니다. 특히 전쟁을 논밭으로 만들어 마물들의 눈과 귀를 속이는 수법이 대단하더군요. 당신이 없었다면 아군의 피해가 곱절은 컸을 테죠.”

아프리카의 표범 쿠자라크.

그는 타인의 호의를 얻으려 괜한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인간관계에 소홀하다는 헛소문이 퍼진 이유였다.

그는 순수하게, 진실 되게 피아로에게 경의를 느꼈다.

그래서 지크가 등장해 벨레드를 패주시킨 시점부터 피아로를 지켜보았다.

지크보다 한 발 먼저 전장에 도착했던 원군.

도착하자마자 소문 이상의 위용을 발휘하여 아군을 도운 영웅이 혹 지크와 자신을 비교하며 의기소침 할까봐 저어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만. 당신께서 벨리알의 한쪽 팔을 날려버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쭉 동경해왔습니다. 저처럼 당신의 등을 쫓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부디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허허... 그대도 농부가 꿈이라는...?”

“아니요. 그럼 이만.”

“...무운을 빌겠소.”

빈 말은 못하는 성격인가.

사뭇 서운한 표정을 짓는 피아로였지만 이내 미소 지었다.

진실 된 젊은 영웅의 격려에 마음의 짐을 덜은 것이다.

***

Satisfy는 커스텀 자유도가 낮은 편이다.

플레이어의 외모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피부, 눈동자, 헤어스타일, 문신, 흉터, 체중은 비교적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는 반면 신장과 골격 등의 ‘타고난 신체조건’은 현실과 무척 흡사하게 적용됐다.

현실에서 팔다리가 없는 사람은 Satisfy에서도 팔다리가 없다, 라는 식의 냉혹한 현실성이 아니다.

Satisfy는 장애와 관련해서는 몹시 관대했다.

다만 골격의 형태와 길이에 한해서 양보가 적을 뿐이다.

신체적 특징이 대인전에서 주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팔이 긴 사람이 짧은 사람과 싸울 때 유리하다는 식의 현실적인 법칙이 Satisfy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었다.

Satisfy는 플레이어의 신체를 재능의 영역으로 해석한 것이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물론 현실만큼 가혹하진 않았다.

Satisfy에는 수많은 직업과 스킬이 존재하니까.

사용하는 무기와 기술에 따라 요구되는 신체적 특징이 달랐으므로,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신체에 맞는 직업군을 선택하는 식으로 신체조건을 유리하게 활용했다.

어디까지나 빡겜러에 한해서다.

랭커를 꿈꾸는 사람이나 신체적 조건을 고려했지 평범한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애초에 신체 조건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상황은 대인전, 혹은 고지능 몬스터와 싸울 때뿐이다. 평범한 사람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쿠자라크.”

오래 전부터 최상급 랭커로 군림해온 쿠자라크의 우월한 신체 조건은 가히 신의 축복이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었다.

“떠나는 거냐?”

카츠.

최근 연달아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며 템빨단의 새로운 간판으로 급부상 중인 인물이다. 레벨 랭킹도 급격히 올라 뱀파이어 종족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은 인물로 손꼽혔다.

그가 진영을 떠나는 쿠자라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송아지처럼 크고 맑은 눈으로 카츠를 빤히 살펴본 쿠자라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카츠가 아니군.”

과거, 쿠자라크와 카츠는 한동안 사냥터가 겹쳤던 시기가 있다.

꽤 자주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카츠는 여긴 내 구역이라며 쿠자라크를 공격했었다.

좋게 말하면 호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금수 같은 녀석이었다.

한데 지금의 카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눈빛부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츠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나도 애가 아니니까.”

“늦게라도 철이 들어서 다행이다. 남은 전쟁 잘 끝내라.”

“정말로 떠나려고?”

“기왕이면 내 힘이 더 절실히 필요한 곳에서 싸우고 싶으니까.”

“하긴...”

부활한 지크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카츠가 가늠하기에 그리드와 동급이거나 살짝 위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가 이곳에 주둔하게 된 이상 번헨 열도는 안전할 터였다.

“잘 가라.”

웃으며 악수를 건네는 카츠를 쿠자라크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인사를 나누고 싶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먼저일 텐데.”

“옛날에 뒤치기 했던 거? 아니 그건 엄청 옛날 일이잖아. 그리고 그때 죽은 건 매번 나였고.”

“강도가 제압당했다고 해서 죄가 없는 건 아니지. 지난 일이라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염병... 미안하다.”

“욕 취소해라.”

“...미안하다.”

하여튼 예전부터 적당히가 없는 놈이다.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타협을 모르니만큼 신뢰할 수 있는 녀석이긴 하지.’

생각하며 정중히 사과하는 카츠였다.

이제 와서 쿠자라크와 친분을 쌓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순히 존경을 표하는 것에 가까웠다.

쿠자라크가 전쟁 내내 보여줬던 활약과 태도가 큰 힘이 됐었으니.

“마음까지 강해졌구나. 무운을 비마.”

미소지은 쿠자라크가 드디어 카츠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그 커다란 손이 카츠에게 묘한 감흥을 선사했다.

‘모두 다 성장하고 있다.’

템빨단은 22억 플레이어 중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약하며 발전해온 플레이어의 숫자와 비교하면 한 줌조차 안 됐다.

여태껏 타인에게 경쟁심만을 느꼈던 카츠가 처음으로 다른 마음을 품었다. 인마대전이 계기였다.

‘너희를 응원한다.’

다 같이 강해져서, 그리드가 짊어진 짐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

진실로 바라는 카츠였다. 상처를 숨기는 그리드의 영상을 접하고 온 차였다.

***

무저갱은 브라함과 메르세데스, 그리고 아스모펠과 극검, 크리스 등이.

번헨 열도는 지크와 피아로, 그리고 지슈카와 카츠, 레가스 등이.

긴밀히 협조하며 진영을 정비하고 악마들의 침략에 대비했다.

게다가 번츠델과 500명의 반용족이 창공을 순회하며 포탈 대량 발생 지점을 경계하고 있었다.

포식이불족발과 휴렌트 등의 실력자들도 주요 거점을 장악한 상태다.

전쟁이 초기와 비교해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방비였다.

‘바사라도 슬슬 준비가 끝나간댔지.’

바사라는 황궁 지하에 머무는 중이다.

황실서고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소환 마법진의 재현을 위해서다.

적기에만 반응하는 소환 마법진이라는데 술자의 적기가 뛰어날수록 효과가 상승한다고 한다. 바사라가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긴다. 이길 수 있어.’

최악의 경우 바알의 본체가 강림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와 힘을 합치면 승산이 있다. 아마도.

물론 피해는 끔찍할 정도로 크겠지만...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덕분에 그리드는 집중할 수 있었다.

성벽처럼 쌓아올린 신의 용광로가 발산하는 열기에 집어삼켜지지 않고 버티며 구젤의 어금니를 제련해나갔다.

이빨이 검게 물들어가는 광경을 보고 설마 실수한 건가 싶어 당황했지만, 다행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구젤의 어금니는 금속이 아니기에 쇳물로 녹지 않았다.

표면이 연소되고 부피를 줄여나가는 식으로 강도가 올랐다. 탈각이라는 표현이 적합해 보였다.

‘여기서 더 단단해진다고?’

감탄을 넘어 경악하는 그리드였다.

지혜의 탑의 결사들이 만든 드래곤 웨폰과 아머들의 수준이 왜 그토록 하찮은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녹지 않는 이빨을 무슨 수로 제련하란 말인가, 하는 식의 걱정 따윈 없었다.

자신의 작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그는 자연히 이해하고 있었다. 템빨신의 기술이 깨달음을 도왔다.

화르륵!!

재가 된 어금니의 표면이 용광로의 화력을 한층 더 키웠다.

순간 발생한 강력한 열기가 용광로를 구성하는 극상급 석재를 모조리 검게 달궜고 일대의 나무와 풀을 시들게 만들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리드의 대장간 창문들은 우그러지다 못해 녹아내렸다. 이어서 외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을 보아 건물을 지탱하는 철골들이 뒤틀리기 시작한 듯했다.

“으윽...”

멀찍이서 대기 중이던 대장장이 장인들이 괴로워하며 뒷걸음쳤다. 그들의 피부는 이미 붉게 익어있었다.

노에와 템빨콘을 소환한 그리드가 장인들을 피신시켰고,

콰르르르르릉!!

급기야 대장간이 폭삭 주저앉았다. 열기를 이기지 못해서였다.

그리드의 작업복은 이미 진즉에 불타 사라졌다. 알몸이었다. 정확히는 베리아체의 내의만 입은 상태가 됐다.

‘이런 미친.’

이거 이대로는 용광로도 박살날 기세다.

어금니의 부산물을 장작으로 삼은 열의 상승이 예상을 초월한다...

쩌적! 쩌저저저적!!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무려 신화급 용광로의 표면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풀무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더 탈각하려는 듯 또 다시 검게 그을린 구젤의 어금니를 노려보며 더 강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질 것 같으냐...!’

그리드는 어렴풋이 느꼈다.

불길이 거세질수록 발광하는 어금니에 깃든 어떤 의지를.

그것은 아마 죽은 구젤의 사념이 아닐까.

존귀한 나의 일부가 누군가에게 굴복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콰콰콰콰콰콰쾅!!

폭발이 발생했다.

신의 용광로의 표면 일부가 박살나며 용광로 내부에서 순환하고 있던 화염이 용솟음쳤다.

화염에 얻어맞은 내성벽 일부가 무너졌고 이때 발생한 후폭풍으로 궁전들이 휘청거렸다.

연못이 증발하고 정원이 불타올랐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으아아아아...!”

그리드의 발달한 청각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라빗의 비명을 포착한다.

하지만 그리드의 풀무질은 오히려 가속했다.

여기서 멈추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멈추지 못했다.

아이린을 포함한 사람들은 라우엘이 진즉 피신시켰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베리아체의 내의마저 너덜너덜해졌을 무렵.

우우우우웅.

부피가 다소 작아진 구젤의 어금니가 투명한 빛을 내뿜었다.

무한대로 나아가는 빛의 흐름이 검게 타들어간 용광로 내부를 발색시켰다. 용광로가 우주가 된 듯했다. 맹렬히 타올랐던 불꽃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진 채였다.

그리드가 집게를 뻗었다.

구젤의 사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굴복한 어금니를 모루 위에 올리고 망치로 후려쳤다.

따아아아아아앙─!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맑은 울림이 그리드에게 상쾌한 전율을 선사했다. 뒷목을 타고 질주해온 어떤 감각이 뇌리를 관통했다.

[구젤의 어금니를 제련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당신의 의지와 심상이 강화됩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