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23화 (1,413/1,794)

템빨 71권 - 11화

Satisfy는 방송계에도 혁명을 일으켰다.

스킬과 마법을 이용한 촬영기법으로 현실에선 도무지 담을 수 없는 장면들을 촬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온갖 영화와 드라마가 현실이 아닌 Satisfy에서 제작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정말 훌륭했지요...』

『저는 감동 받아서 눈물까지 흘렸어요.』

각국 방송사의 중계진이 흥분을 금치 못했다.

무저갱의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목이 잔뜩 쉬거나 얼굴이 엉망이 된 사람이 많았다.

정교한 촬영 기법 덕분에 모두가 목격한 것이다.

전투 직후.

넝마가 된 그리드가 자신의 상처를 숨기기 위해 애썼던 모습들을.

현장의 사람들은 볼 수 없던 그리드의 배려를, 짊어진 자의 책임을 수억 명의 시청자가 목격하고 말았다.

길이길이 회자될 사건이었다.

갓 핸드로 얼굴을 가리는 그리드의 모습을 편집한 영상이 이미 커뮤니티 곳곳에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머잖아 그 장면을 접할 터인데, 아마 대부분 그리드의 팬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드가 최고의 플레이어인 이유는... 단순히 강해서가 아니라 저런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네, 그렇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드와 함께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그리드에게 매번 굽히고 들어가는 하오와 대놓고 부하를 자처한 데미안.

자존심을 내다버린 그들의 모습에 격분해 범국민적인 그리드 안티 행각을 벌였던 중국과 일본도 숙연해졌다.

여태껏 없었던 위기와 위기 속에서 빛난 그리드의 모습이, 인류의 화합을 주도하는 것이다.

***

바알이 드롭한 아이템은 보석 몇 개가 전부였다.

혹시 특별한 기능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죄다 평범했다.

단 1개만으로 사람의 인생을 바꿀만한 가치를 지닌 극상급 보석을 평범하다고 표현하는 건 양심 없는 짓이었지만...

아무튼 바알의 수식언이 붙은 아이템이라거나 부산물, 혹은 신화급 아이템의 드롭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리드가 잡은 바알은 어디까지나 특정 자아의 파편일 뿐.

바알의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보석이라도 준 게 의외일 정도다.

‘근데 경험치는 왜 이렇게 많이 준 거지?’

400레벨을 돌파하고 헬구간이 사라지면서 레벨업이 쉬워지긴 했지만 20레벨 이상의 경험치를 한꺼번에 획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솔직히 의문이었다.

자아의 파편에 불과했던 바알이 이만한 경험치를 줄 자격이 있나?

‘...당연히 있지.’

바알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모든 상황을 떠나서 바알은 비반급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홀로 인류를 몰살할 수도, 구원할 수도 있는 초월자.

그 엄청난 강적을 물리친 것이다.

20레벨은커녕 30레벨이 올랐어도 납득했을 거다.

‘룬에 권능이 깃들지 않은 건 아쉽지만 그것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문제고.’

바알을 잡고 얻은 가장 큰 보상은 레벨이 아니라 격의 상승에 있었다.

무려 2단계나 올랐다.

우선 스태미나 최대치와 회복량이 상승했다.

‘이게 엄청 크다.’

마력 사출기로 만든 인공 감각은 그리드의 부담을 크게 줄여준다.

전투 도중 소모되는 집중력과 불필요한 움직임이 극단적으로 줄었다.

덕분에 스태미나 소모량도 눈에 띄게 적어졌는데 격의 상승으로 스태미나 자체가 강화된 것이다.

‘앞으론 반나절 내내 싸워도 지치지 않을 거야.’

물론 상대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평범한 사냥쯤은 밤새 해도 안 지칠 거다.

게다가 심상도 강화됐다.

‘이건 정확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검을 만든 후.

지혜의 탑에 올라 비반을 상대로 확인해 보면 적당할 것 같다.

화신의 폭풍이 비반에게 일격에 부서지느냐, 아니면 조금은 버티느냐.

그 차이가 굉장히 크게 다가올 터였다.

‘그건 그렇고...’

그리드가 새삼스런 의문을 품었다.

초월의 격.

이건 신이 아닌 초월자를 위한 시스템이다.

한데 왜 나는 신이 되고도 이 효과를 누리고 있는 걸까?

당연히 누려온 힘인 탓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기이한 사건이다.

버그가 아닐지 의심 될 정도로.

그야 당연하다.

신은 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어떤 법칙이 존재했다.

반면 초월자의 궁극엔 신살의 자격이 존재한다.

그리드는 둘 모두에 포함되는 것인데 이게 정상일까?

‘S.A 놈들.’

초월의 격을 기껏 잔뜩 올려놨더니 나중에 가서 버그였습니다, 하고 회수해가는 건...

‘...설마 아니겠지.’

그리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망상을 털어냈다.

여태껏 단 하나의 버그도 없었던 Satisfy에 이제야 버그가 생길 리 만무했다.

신격과 초월의 격의 공존은 지금의 나로썬 알 수 없는 어떤 안배일 가능성이 높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초월의 격이 2개나 오른 탓에 기분이 너무 좋다.

기본적인 격이 높으면 무조건 이득이다. 언젠가 또 다시 ‘격 하락 페널티’를 겪어도 전투력이 어느 정도 보존 될 터였다.

505레벨.

상태창을 연 그리드가 대량으로 쌓인 스탯 포인트를 균등하게 분배했다. 황금비를 망치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였다.

“오오...!”

눈앞에선 기적이 펼쳐지고 있었다.

참혹하게 손상 된 육체가 무색하게도 평온한 표정으로 누워있던 지크의 육신을 투명한 빛이 감쌌다.

몸 곳곳에 새겨진 자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급기야 잘린 팔다리가 다시 자랐다.

성녀가 만드는 기적, <기원>의 작동이었다.

수십만 연합군이 신을 목격한 것처럼 감격했다.

모르이즈 공작은 눈물마저 흘렸다.

루비에게 새삼 감명을 받은 눈치다. 눈이 살짝 돌아간 것이 위험해 보였다. 광신의 기질이 있었다.

‘이러다가 세희도 진짜 신이 될 수도...’

그리드가 아직은 한참 이른 생각을 하는 그때.

저벅.

지크프렉터가 온전한 모습을 되찾은 자신의 육체를 마주보고 섰다.

“역시... 전생의 기억에 혼선이 있는 게 분명하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도리어 반대입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육체가 이렇게까지 뛰어나진 않았었는데 지금은 거의 완벽해 보일 지경인지라.”

“하하.”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크프렉터가 들떠서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페이커만이 의심을 품었다.

‘바알이 지크의 육신을 강화시켰다. 독을 심어놓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단 뜻 아닌가?’

페이커가 염려하듯.

우우우웅-

지크프렉터도 바알을 경계하고 있었다.

점검, 정화, 경계 등의 뜻을 담은 룬어들을 이용해 자신의 본체를 몇 번이고 검토했다.

결과.

‘...훌륭하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바알에게 잠시 대여(?)됐던 지크의 본체는 생전보다 도리어 발달해 있었다. 신체적 단점이 사라지고 완벽하게 가꾸어졌다. 그 외에 수상한 낌새는 전혀 없었다.

지크프렉터가 내리는 결론은 하나였다.

‘바알이 천상과 인류의 전쟁을 유도한 거다.’

그래서 간접적으로나마 우리를 도운 게 아닐까.

아니, 도왔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함정에 빠뜨렸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무저갱을 파괴하여 나의 본체를 찾아내고 강화시킨 시점부터 천상과 인류는 적대할 수밖에 없게 됐으니.

‘인마대전은 그 발판일 뿐인 건가. 원하는 건 뭐지? 신들의 파멸? 인류의 멸망?’

...뭐가 됐든 상관없다.

그리드는 진즉부터 천상과 대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천상과의 전쟁은 지크의 긴 염원이었으니.

바알이 파놓은 함정은 우리에게 도움인 것이다...

짙게 웃은 지크프렉터가 잠들어 있는 본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스아아아아아!!

수십 개의 룬어가 떠올랐다.

마주보고 선 지크프렉터와 지크의 육신을 감싼 채 서서히, 점차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내.

[6악 지크가 부활하였습니다.]

영혼의 전이와 함께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드와 지발을 비롯한 템빨단 입장에선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었으나, 지크프렉터의 정체를 몰랐던 보통 사람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대단하군...”

번츠델과 반용족의 대전사들이 창공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드와 함께 워프 게이트를 타고 무저갱으로 넘어왔던 이들.

그들은 딱히 어떤 명령을 받은 게 아니기에 그리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을 뿐이다.

오랜 관찰 끝에 내린 결론은,

“과연 우리의 신이시다. 멍!”

“왈왈!”

열렬히 충성하자는 것이었다.

홀로 바알을 쓰러뜨린 무력, 제국을 비롯한 여러 왕국을 사실상 발밑에 둔 권력, 전설들과 대천사를 사도로 부리는 것으로 모자라 칠악성까지 손에 넣은 카리스마 등등.

반용족 입장에선 그리드를 섬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놈들이 자꾸 짖는 걸 보니 뭔가 크게 오해하는 듯하군.’

개처럼 짖는 행위가 신을 섬기는 행위라고 착각하는 건가...

얼굴을 감싸 쥔 번츠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는 반용족이 아니라 반견족이라는 오명을 살까 근심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반용족은 개가 되겠노라 맹세했다. 감수하는 수밖에.

***

“내가 치료해주마.”

영겁의 세월 동안 지크를 괴롭혀온 나태의 저주는 육체가 아닌 영혼에 새겨진 것이다.

본체를 되찾았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막 깨어난 브라함이 너무나도 손쉽게 해주(解呪)해버렸다.

동족들을 희생시켜 얻은 연구의 결과를, 되찾은 직계의 힘 덕분에 타인에게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걸까.

눈 감은 지크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의 고생을 곁에서 지켜봐온 지발도 훌쩍거렸다. 그리드도 얼떨결에 울었다... 제일 많이 울었다.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부작용이었다.

괴상하게 쳐다보는 지발의 시선을 느끼고 울음을 그친 그리드가 문득 호기심에 휩싸였다.

지크의 영혼이 본체로 전이되면서 남겨진 몸.

즉,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의 저 텅 빈 육신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 저건 한낱 시체일 뿐입니다. 불태우면 그만입니다.”

지크가 공손히 말했다. 브라함에게 연신 감사를 전한 뒤였다.

“...내가 가져도 됩니까?”

어떤 가능성을 떠올린 그리드가 조심스레 청했고 지크는 흔쾌히 수락했다.

딱! 딱딱딱!

템빨골1이 흥분해서 춤을 췄다.

극검의 허리춤에 매달린 이야루그트도 웅웅 울었다.

***

번헨 열도의 전황은 인류측이 우세했다.

수백 대의 템빨포를 위시한 템빨함대의 화력이 워낙 강력해서였고, 궁성 지슈카와 아프리카의 표범 쿠자라크가 소문보다 더 대단했던 덕분이다.

등지고 선 바다로부터 쏟아지는 포격과 정면을 가로막고 선 연합군의 방벽.

그 틈에 갇힌 지옥군은 계속 주춤거릴 뿐 섣불리 난국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제 슬슬 한계인데.’

제13위 대악마 벨레드.

사실상 혼자 함대의 포격을 막으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리치와 3일 밤낮을 싸운 그의 상태는 온전치 못했다.

이제 퇴각하는 것밖엔 답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버텼다.

가미긴과 바르바토스.

한 자릿수 대악마가 무려 둘이나 투입된 무저갱에서 곧 날아올 승전보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 애초에 본대는 무저갱에 있다.

진즉에 무저갱을 점령했을 본대가 보낸 원군이 슬슬 도착해 적들의 후방을 칠 것이다.

계속해서 공간을 왜곡하며 거슬리게 만드는 이 날파리 같은 해골 놈과, 저 막강한 대포들을 지키는 인어 놈들의 두개골을 곧 묵사발로 만들 수 있다...

그때의 희열을 위해, 벨레드는 수모를 인내했다. 악착 같이 버텼다.

그래서 더욱 더 절망이 컸다.

“뭐...?”

기다리던 원군은 안 오고 적군의 증원이 도착한 것이다.

규모는 무려 10만 이상.

특히 선두에 엄청난 놈이 있었다.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놈인데, 기이한 글자들과 함께 붉게 퍼뜨리는 힘의 파동이 심상치 않았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좁히는 움직임에 초월성이 묻어났다.

‘죽는다.’

직감한 벨레드가 즉시 몸을 날렸다. 진즉부터 의식하고 있던 상공의 포탈을 향해서였다.

쿠와아아아아앙!!

붉은 광선이 벨레드의 하체를 가루로 만들었다. 상체를 아슬아슬하게 삼킨 포탈과 함께 통째로 소멸시켰다. 그대로 구름을 꿰뚫고 솟구치는 기세가 별까지 닿을 듯했다.

쿠르르르르릉─

하늘의 끝에 도달한 광선이 폭발하며 붉은 노을을 만들었다.

하늘 너머 천상까지 물들일 광경이었다.

“...”

“...”

악마들이 얼어붙었다. 이성이 없는 마물들조차 벌벌 떨며 뒷걸음쳤다.

연합군 병사들 또한 경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이후의 결과는 뻔했다.

번헨 열도에서도 인류의 승전고가 울렸다.

[당신의 사도 ‘지크’가 첫 번째 한을 풀었습니다. 지크의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하고 룬어의 활용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전 세계에서 인류의 종말을 목격했던 최강자.

이번 세계의 인류를 지켜낸 그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