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10화
30,556.
그리드의 남은 생명력 수치다.
바알이 흑화를 쓴 뒤로 상승한 속도가 명중률로 직결되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마지막 반격에 피격 당했으면 그 즉시 불사가 터졌겠지.’
타인을 통해서 오래간만에 맛본 흑화의 위력은 훌륭했다.
급격히 치솟은 공격력과 속도에 잠시 적응하기 힘들었다.
다시 갖고 싶어질 정도였다.
‘...불사 상태에 돌입했으면 정말로 힘들어졌을 거다.’
흑화를 쓴 바알이 두려웠던 진짜 이유는 생명력 게이지가 사라졌다는 점에 있었다.
말 그대로 생명력 표기가 없어졌다.
그건 상상 이상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차라리 공포라고 표현해도 좋을 이변이었다.
내 공격이 적에게 얼마만큼의 타격을 입히고 있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
판단에 여러모로 혼란이 왔다.
적의 죽음을, 싸움의 끝을 가늠하지 못하니 스킬 운용 자체가 꼬였다.
그래서 그냥 다 때려 박았다.
브라함이 메테오로 시선을 끌어준 타이밍을 노렸다.
어째선지 무려 9개나 나타난 운석 사이에 탐욕 덩어리를 배치하였고, 바알의 허를 찌른 순간에 낙월검부터 휘둘렀다.
우선 두 팔을 베어버려 방어력을 약화시킨 뒤, 재생하기 전에 무기를 다시 스왑해 궁극기를 쏟아 부었다.
그 탓에 큰 반동을 겪었다. 바알의 재생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반격을 연달아 허용하기도 했다.
한쪽 손으로 바알의 목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충격에 휩쓸려 멀찍이 튕겨나가고 승기를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리드는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단언한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다가 바알이 죽기 전에 불사가 먼저 터졌을 경우 감당 못할 혼란을 겪었을 테니.
이대로 계속 싸워도 되나?
내가 먼저 죽는 거 아닌가?
우선 뒤로 빠져서 회복부터 하는 게 낫지 않나?
등등.
온갖 의문을 느끼다가 사고가 느려져 패배했을 가능성이 높다.
생명력이 안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알의 고유 권능일까.’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이내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바알은 권능을 쓰지 못했다. 육체의 본래 주인인 지크의 권능을 이끌어낸 것이 한계였다.
‘모든 최상위격의 존재들에게 붙는 보정 효과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특정 페이즈부터, 혹은 처음부터 생명력 수치가 표기되지 않는 존재들...
최대 생명력이 급격히 상승해 수치가 물음표로 표기되는 유형의 보스 몬스터완 궤가 다르다.
물음표로 표기 된 게이지는 계속 패다보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법인데, 게이지 개념 자체가 없는 건 마땅한 해답이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를 놈을 죽을 때까지 패는 수밖에 없다.
전투 난이도가 사실상 수십 배는 오르는 셈이다.
‘뭐... 내가 그만큼 더 세지면 된다.’
지금은 이 순간에 집중하도록 하자.
[보상을 정산하는 중입니다.]
바알을 처치한 업적이 몹시 큰 듯했다.
고작 ‘특정 자아의 파편’을 해치웠을 뿐이건만 시스템이 보상을 섣불리 내어주지 않고 신중히 계산중이다.
느낌표를 띄워 감탄과 당황을 표현했던 과거와 달리 어딘가 쌀쌀맞게 느껴지는 태도였지만, 이상하진 않다.
시스템에 사적인 감정은 없을 터다. 사무적인 게 정상이었다.
“...후우.”
바알이 남기고 간 지크의 육신을 살피며 잠시 상념에 잠겼던 그리드.
고작 그 몇 초 동안 호흡을 고르고 회복한 그의 얼굴에서 상처가 흐려졌다.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 즉시,
투쾅!
창공으로 도약했다.
바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지, 아니면 단순히 믿지 않는 건지.
바르바토스의 권속 8마리가 하늘을 질주하며 카일의 뒤를 쫓고 있었다.
카일의 품에 안긴 브라함은 정신을 잃은 채였다.
‘저 양반도 참.’
브라함은 직계의 권능을 되찾았다.
그의 종족은 이제 온전한 뱀파이어, 마족이다.
화신의 폭풍에서 피어난 주작의 불길에 회복되기는커녕 도리어 심한 고통과 피로를 느꼈을 터였다.
심지어 전장에서 며칠을 굴렀으니 몸 상태가 온전치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한데 그 상태로 바르바토스의 수색에 열을 올린 것으로 모자라 굳이 나를 돕다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지공답지 않은 판단력이었다. 명백히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덕분에 불사가 터지기 전에 바알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걱정 끼치지 말라고.’
“하핫... 컥!!”
카일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더 크게 웃던 바르바토스의 권속 몇 놈이 비명을 토했다.
카일이 흩뿌린 전광을 꿰뚫고 나타난 무엇인가에 목과 어깨, 팔과 다리 등을 베여서다.
뒤늦게 그리드를 알아 본 놈들이 경악했다.
“설마 진짜로...!”
“바알이 당했다고?”
기겁하며 한 걸음씩 물러서다가, 이내 우뚝 멈춘다.
잔상을 남기며 은근히 움직이는데 그리드를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다. 여덟이 합을 맞춤에 있어서 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이제 보니 네놈도 넝마구나.”
“제 발로 죽으러 온 거냐? 큭큭!”
한 자릿수 대악마의 권속쯤 되면 위계가 매우 높다.
어디 가서 지옥을 대표하기에 충분했다.
‘더 나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중시한다면, 20번대 지옥의 왕좌쯤은 지금 당장도 노려볼 수 있었다.
그 대단한 놈들에게 그리드가 좋은 먹잇감으로 비추었다.
그만큼 그리드의 상태가 나빴다. 실시간으로 회복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지만 여전히 넝마였다.
바르바토스의 권속들은 그리드의 상태를 정확히 간파했다.
“피하는 게 좋을 듯 하온데...”
순식간에 포위당한 그리드의 곁에 선 카일이 읊조렸다.
시선을 내리 깔고 작게 말하는 폼이 은근히 고아했다. 제국의 유일한 기둥이 된 뒤로 예법 공부에 열을 올려온 눈치다.
‘하긴 카일이면 공작위도 노려볼 만하지.’
태생부터 제국 출신인데다 무력은 제국 최고 수준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예법을 잘 지키며 충성심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대대손손 만인지상으로 군림할 터였다.
흡족하게 여기는 그리드의 뒤통수를 힐끔 엿본 카일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이런 미친... 도망칠 생각이 없는 건가?’
카일은 새삼 예법을 배우지 않았다. 제국에선 여전히 안하무인으로 통했다.
유독 그리드 앞에서 태도가 고아해지는 이유는 단순히 두려워서다.
전 황제를 섬겼던 시절 익힌 예절을 간신히 떠올리며 몸을 사릴 뿐이었다.
“무리하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만...”
여전히 폭음이 울리는 황궁으로 시선을 돌린 카일이 용기를 쥐어짜 말했다.
메르세데스와 아스모펠이 바르바토스의 발을 묶는 동안 어서 도망치자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아니면 나라도 도망치라고 하던가.
그리드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나보고 브라함을 데리고 피하라는 건가? 너희들을 놔두고?”
“...아닙니다.”
질색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카일이었다.
혼자 도망칠 생각은 꿈도 못 꿨다. 그에게 그리드는 항거 불가능의 공포였다.
“이놈만 죽이면 전쟁에 참여한 목적이 달성되는 거 아닌가?”
“먹이가 스스로 입에 뛰어든 셈이다. 기쁘긴 한데 비현실적이라 얼떨떨하군.”
바르바토스의 권속들이 낄낄거리며 살의와 탐욕을 드러냈다. 그리드를 숫제 먹잇감으로 보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XX... 이걸 대체 어째야...’
카일이 점차 난감해하는 그때였다.
서걱!!
그리드를 불시에 덮친 바르바토스의 권속들이 일제히 비명을 토했다.
인공 감각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가 역으로 베인 것이다.
그리드는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았다.
그를 보는 카일과 권속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죽어가는 척 연기했던 거라고?’
오해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 막 정산 된 보상을 토대로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한 그리드.
503레벨을 달성하며 스탯의 5차 각성까지 맞이한 그는 1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카일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위기를 연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시험한 그리드를 보고 과연 악마답다고 느꼈다.
만약 낚여서 배신이라도 했었다간 어떤 끔찍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을까...
“바알을 상대하고도 멀쩡하다니?”
“뭐 저딴 놈이!”
바르바토스의 권속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리드가 추격했다.
바르바토스가 까다로운 이유는 권속과 시야를 공유한다는 점에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하나라도 더 많은 권속을 없애고 싶었다.
또한 마력 사출기의 기능에 더 익숙해지고 싶기도 했다.
개변시킨 마력 사출기의 기본적인 기능은 ‘사출하는 마력에 은사를 섞는 것’이다.
입자 단위로 분해된 은사가 사출기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가 마력에 반응하여 함께 움직인다.
마력에 ‘물리력’과 ‘가변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은사의 길이를 최대한 늘이기 위해 가루로 만들어 마력에 섞은 점이 특히 주효했다. 마력의 부피와 은사의 부피가 비례하게 됐으니.
다만 마력의 부피가 커질수록 은사의 농도가 약해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조차도 이젠 장점으로 승화됐다.
인공 감각의 활용 덕분이다.
팽팽하게 늘어나 그리드 주변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마력에 섞인 은사의 밀도는 매우 낮다. 사실상 순수한 마력에 가까워서 손에 잡히질 않는다.
덕분에 마력과 연동한 그리드 당사자를 제외한 타인은 은사와의 충돌을 인지하기 힘들었다. 작은 먼지에 스친 사람이 먼지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바알은 늦게나마 눈치 챘다.’
더욱 더 한계까지 늘릴 필요가 있다.
마력과 은사의 연동이 끊어지지 않는 선에서, 마력을 최대한 팽창시켜 은사의 기척을 완전히 지워야 한다.
이대로는 언젠가 또 다시 만날 바알에게 처음부터 인공 감각을 들킬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팽창시켜놨던 은사를 필요에 따라 수축시켜 적을 압박하는 용도로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콰작!!
“윽!?”
그리드를 뿌리치기 위해 발악적으로 창을 휘두르던 권속 하나가 당황했다. 자신의 창이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잡힌 까닭이다.
그대로 그리드에게 당겨진 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무슨 힘이?’
푸우욱!!
“크아아아아악!!”
권속의 비명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드에게 난도질당하는 까닭이다.
덕분에 다른 권속들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놈들이 황궁 근처에 도달하자 바르바토스로 추정되는 빛이 튀어나와 권속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리드는 구태여 쫓지 않았다.
20위대 대악마와 비슷한 생명력과 방어력을 지닌 놈들이 순전히 도망만 치는데 모조리 쫓아가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앞서 붙잡은 놈을 확실히 도륙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은사의 통제가 아직은 너무 느려. 꾸준히 연습하자.’
은사를 탐욕으로 대체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리다.
탐욕은 가루로 만든다고 해도 존재감이 엄청날 터라.
[바르바토스의 권속 ‘고가’를 해치웠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고가의 삼지창>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미 보유 중인 바르바토스의 시야가 있어 권속이 보유 중인 시야를 흡수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다음부터 권속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겠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야에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무저갱을 침략한 지옥군 사령관이 모조리 후퇴하였습니다.]
[무저갱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듭니다.]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3일 밤낮 동안 계속됐던 전쟁이 잠시나마 멈춘 것이다.
그리드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낸 연합군 병사들과 플레이어들이 자리에 주저앉고, 드러누워 살아남았음에 감사해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
“내 전생의 기억에 혼란이 있었던 듯하군.”
모든 사태가 끝난 후에야 무저갱에 도착한 지크프렉터.
그가 영겁의 세월 만에 마주한 자신의 육신을 살펴보며 말했다.
“전생의 나는 오체 불만족이었나 보다.”
지크의 육신은 한쪽 팔과 두 다리를 잃은 상태였다.
그리드가 원인이었지만, 그 누구도 차마 진실을 전하지 못했다.
지크프렉터를 애써 외면하며 바알에게 얻은 보상을 검토하던 그리드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무사히 걸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우리에겐 성녀가 있으니까.”
“...음.”
지크프렉터가 드문 미소를 지었다.
긴 세월 동안 환생을 반복하고, 저주에 고통 받으며 감정이 무뎌진 그도 진짜 몸을 되찾게 됐다는 사실엔 기쁜 눈치였다.
“나의 유일한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앞으로 영원토록 당신의 곁에서 오늘의 은혜를 갚아나가겠습니다.”
[당신의 사도 ‘지크프렉터’와 깊은 유대를 다집니다.]
“...”
하필 이럴 때...
지크프렉터의 여태껏 없던 태도가 그리드에게 괜한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그저 먼 산이나 바라보는 표정이 불편했다.
카일과 그렌할 공작을 비롯한 제국민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이었다.
그랜드마스터가 웃는 모습도, 타인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경애를 표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기에.
물론 그 대상이 그리드인지라 충분히 납득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