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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21화 (1,411/1,794)

템빨 71권 - 9화

고통은 기억되는 것이다.

한 번 각인되면 쉽게 떨쳐낼 수 없다.

“...하나도 안 아파.”

한참을 캡슐에 앉아 손가락을 주무르던 지슈카가 옅게 웃었다.

연사를 반복할 때마다 중첩되는 손가락의 통증.

그건 궁성이 감내해야 할 최악의 페널티였다.

살이 뭉개지고, 근육이 파열되고, 뼈가 갈리는 고통을 전투 내내 느껴야하는 것이다.

실제 고통과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팠다.

무엇보다도 심리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시위를 당기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이 고통이 현실로 돌아간 뒤에도 기억으로 남아 자신을 밤새 괴롭힐 거란 사실을 알기에, 그녀는 때때로 도망치고 싶었다.

물론 진짜로 도망친 적은 없다.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고통을 호소하지도, 티를 내지도 않았다.

한데 그리드는 자신의 고통을 알아줬다.

지옥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새로운 골무를 선물해줬다.

다만 튼튼할 뿐인 골무.

손가락을 두텁게 감싸준 그것엔 그리드의 따뜻한 배려가 담겨있었다.

‘...나를 늘 지켜봐준 거구나.’

그리고 믿어줬다.

이런 투박한 골무로도 활약할 수 있을 거라고.

“좋아, 힘내자.”

잠시 감동을 만끽하던 지슈카가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캡슐 앞에 떠올라 있는 홀로그램 속.

중계 중인 방송에서 그리드가 활약하고 있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모습이 멋졌다.

예상대로의 활약이었다.

그리드가 지슈카를 믿듯, 지슈카도 그리드를 믿는 것이다.

‘안심하고 싸워.’

번헨 열도는 내가 끝까지 지킬 테니까.

결의하며, 바나나우유 맛 칼로리 바와 매운 닭 맛 견과류를 으적으적 먹어치운다.

한국인의 입맛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비록 왜곡 된 입맛이긴 했지만.

아무튼 영양분을 보충한 그녀가 다시 캡슐에 누웠다.

***

제8위 대악마 바르바토스는 죽음을 관장한다.

대상을 ‘시야’에 넣을 수만 있다면 거리와 지형지물을 무시하고 저격이 가능하므로 사신으로 통했다.

실제 신앙의 대상이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형 집행 능력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으니.

지옥의 망령들에게 집어삼켜져 자아를 잃고 신에 버금가는 힘을 얻은 슈트리오 따위완 다른, 악마들의 염원으로 진짜 마신이 되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레라지에가 활약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수백 년 전.

번헨 열도에서 무패 신화를 쓰고 돌아온 레라지에가 새로운 우상으로 대두되지만 않았어도.

바르바토스는 악마들의 숭배를 독차지하며 신격을 쌓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무슨...’

황궁 내부, 바사라 황제의 침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장소를 새로운 저격 포인트로 삼은 바르바토스가 동요했다.

그리드가 자신의 저격을 계속 피하고, 막았으니까.

바알과 싸우면서도 그랬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것이다.

‘바알이 대충하는 거로군?’

자연히 이어지는 귀결이었다.

바르바토스는 바알의 파벌에 가깝지만 바알을 신뢰하진 않는다.

자신이 그리드의 신격을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고의로 훼방 놓는 거라고 여겼다.

세상에 저런 개새끼는 둘도 없을 거라며 욕설을 짓씹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니라고?’

바알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일그러진 것을 확인했다.

오싹...!

태어나 처음 겪는 전율이 바르바토스의 척수를 경련시켰다.

***

출렁!

은사의 상단부가 크게 요동치며 신호를 보내왔다.

바알이 쇄도해오는 과정에서 은사에 스친 것이다.

덕분에 그리드는 초월경이 발동하기도 전에 바알의 출현 위치를 파악했다.

이미 겪어 본 바알의 권각술과 성격을 출현 궤도에 대입시켜 다음 공격을 예측했다.

사고의 속도와 수준이 완전한 천재의 영역에 진입한 순간이다.

꽈창!!

“...하핫!?”

공격이 막힌 것으로 모자라 반격을 당한 바알이 실소했다.

표정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손상 된 신경이 얼굴 근육을 망가뜨렸을 뿐이다.

스카악!

그리드의 검이 가속했다.

정확히는 가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장에 의해서다.

마나와 혈기, 그리고 투기를 겹겹이 두르고 급격히 늘어난 검이 바알의 어깨를 베어버림과 동시에 바르바토스의 저격을 차단했다.

‘쉽다.’

그리드의 감상이었다.

천재들의 전유물로 여겨온 감각과 직감을 템빨로 구현한 여파다.

5미터 간격을 두고 공전 중인 서른 개의 갓 핸드가 은사를 토대로 전달하는 정보가 그리드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정확히 어떤 공격이 어떤 형태로, 또한 어떤 방향에서 날아오는지 알려주는 감각.

그건 초월경이나 혜안과 사뭇 달랐다.

위협이 다가온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 위협의 ‘형태’까진 상세히 읽지 못하고 반사 신경을 올려주는 초월경.

‘눈으로 봐야’한다는 선행 조건이 붙는 혜안.

그 능력들은 필시 대단했지만, ‘반경 5미터를 상시 지배하는 감각’과 비교해서 편의성이 떨어진다.

채챙! 채채채채챙!!

꽈르르릉!!

수평으로 기운 검이 아래로 떨어지고 위로 솟구친다.

사선을 그리다가 천둥처럼 갈라졌고, 선회 도중에 기이하게 멈췄다. 예고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일정 수준의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육체를 적극 활용해 검무를 의외의 타이밍에 쓰는 탓이다.

깊이 궁리하고 체계를 세운 검술이 아니었다.

감각이 전달해오는 정보에 실시간으로 대응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까다로웠다.

우아하게 나아가다가 기습적으로 떨어지는 등, 나름의 규칙성을 지녔던 그리드의 검무가 불가사의한 무언가로 변했다.

‘정말로 재미있는 놈이다.’

덜렁거리는 왼팔을 부여잡은 바알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몇 분의 공방을 나누고서야 그리드가 인공적으로 만든 감각의 영역을 간파하고 벗어난 것이다.

‘탑의 결사보다 강해졌어.’

바알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감탄이 서렸다.

고작 몇 분 만에 다른 존재가 된 그리드를 신기하게 보았다.

지크의 육신을 얻었을 당시.

바알이 스스로를 점검하길 ‘상급 결사의 수준’이었다.

다만 상단전만큼은 본체와 비견되니 지옥 달을 운영할 수 있었고, 이쯤 되면 인계에서 한동안 마음껏 즐기겠다고 판단했다.

한데 의외로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한동안 즐기기는커녕 지금 당장 운명이 결정되게 생겼다.

‘견줄 대상이 없다.’

그리드의 재능을 역대 천재들과 비교해 본 바알이 내린 결론이다.

바알은 여태껏 무수히 많은 세계의 탄생과 멸망을 보았다.

그 과정에서 별보다 많은 천재를 목격하고 체험했지만 그리드가 으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다.

그 마드라도 족히 수십 년을 더 살았어야 용살이나 신살의 자격을 논했을 터인데 눈앞의 놈은 마드라가 죽었을 당시보다 젊다.

‘드디어 마지막 세계가 도래했나. 진짜로?’

“시간 끌어봤자 무의미해. 어서 권능이나 써라.”

바르바토스가 또 눈치 없이 쏜 저격을 검으로 쳐낸 그리드가 재촉했다.

바알을 도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리드는 다만 이 순간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전투의 흐름을 완벽히 통제하고 한계를 부수는 재미가 짜릿했다.

부담은 없었다.

본래 감각을 벼르는 행위는 집중력을 크게 소모하지만 그리드의 감각은 인공적인 것이기에.

템빨로 구현한 것이니 집중력의 소모가 적었다.

초월경에만 의지할 때보다 훨씬 더.

실제로 스태미나 소모량이 급격히 떨어졌다.

바알과 처음 1분을 싸웠을 때보다 이후 7분을 싸우며 소모한 스태미나가 적었다.

“권능이랄 것은 없고.”

피식 웃는 바알의 두 눈이 붉은 마력을 피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피부에 갑주처럼 둘러져있던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과거 그리드의 흑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변화였다.

지크의 육신이 악마화 됐다. 떨어질 듯했던 팔이 빠르게 재생했다.

“나로썬 이 정도가 한계다.”

현재 바알은 특정 자아의 파편일 뿐이다.

바알의 권능을 구사하거나 지옥을 소환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지옥 달을 통제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 즉, 권한의 문제였다.

바알은 지금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망시킬 정도는 아닐 거다.”

동풍이라도 불어온 걸까.

바알의 몸에 넘실거리는 마기가 흔들렸다.

파장이 컸다.

마기가 흔들린 방향의 반대편에서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제국의 강병들을 육성해온 연병장 7개가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그 경로상에 있던 그리드의 모습도 사라졌다.

“어...”

그리드가 나타난 후부터 지금까지.

라우엘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을 후퇴시키고 있던 템빨단원들이 석상처럼 굳었다.

저 멀리에서 갑자기 폭발이 발생한다 싶더니 그리드의 테마곡이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리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당했...

추측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

바알이 선 자리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리드의 테마곡이 다시 재생됐다.

바알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검정색 선이 되었다.

그 위로 주황색 선이 얽히고설켰다.

두 선이 충돌할 때마다 한 발 늦은 천둥소리가 울리길 반복했다.

“그리드!!”

황궁 쪽에서.

드문 격정에 사로잡힌 브라함의 외침과 함께 마법이 쏘아졌다.

거대한 해일이 여러 색으로 물든 하늘을 집어삼켰다.

쿠화하하학!!

검정색 선이 점이 되어선 부피를 키우자 해일이 소멸했다.

바알의 실수였다.

그가 해일을 막는 동안 하늘에선 운석이 떨어지고 있었으니.

하늘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했던 해일이 시선 끌기 용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런...!”

반트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10개의 운석을 소환하며 아무래도 무리를 크게 한 건지, 테라스에 나와 있던 브라함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필 그때 궁전 내부에서 폭발이 발생하며 브라함을 지상으로 추락시켰고, 전류에 휩싸인 카일이 다급히 그를 뒤쫓는 광경이 보였다.

그 뒤로 행렬을 이룬 여덟 마리의 악마 모두 <바르바토스의 권속>이라는 수식언을 지녔다는 점이 절망적이었다.

콰쾅! 쿠콰콰쾅!!

궁전 내부에서 연달아 울린 폭발과 함께 황궁의 일각이 무너졌다.

정황상 메르세데스와 아스모펠이 바르바토스와 격전을 벌이는 듯했다.

“빌어먹을!”

반트너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남은 병사들을 무사히 퇴각시키는 게 그의 임무였지만, 이대로 떠나면 평생 후회할 거란 생각에 처음으로 임무를 외면했다.

“어이! 같이 가!”

“저희도 함께입니다!”

“너, 너희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려 본 반트너가 감격했다.

템빨단원들은 물론이고 연합군 전원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아군 병력을 사지로 내몰게 된 셈이지만, 반트너는 아무래도 좋았다. 뜨거운 전우애에 휩쓸려 이성을 상실했다.

그러다가.

쩌정! 쩌저저저저정!!

너무 이질적이라 소름 돋는 소리를 들었다.

흠칫 놀라 상공을 바라보자 꽁꽁 언 운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브라함이 마지막 한 줌의 체력까지 쥐어짜 쿨타임을 초기화하고 전개한 메테오가 한낱 얼음덩어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건 지크의 권능인데 쓸 만하군. 레베카가 친히 내린 힘다워.”

수십 개의 룬어가 형성한 문자가 바알을 휘감고 있었다.

절망적인 광경에 이어서.

쩌저저저저저정!!

얼음이 된 운석들이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단 하나의 운석만 제외하고.

“...!”

두 눈을 부릅뜨는 바알의 면상을, 얼어붙은 모습 그대로 떨어진 운석이 짓뭉갰다.

10개의 운석 중 유독 작았던 그것은 금속이다.

그리드의 의지가 담긴.

“우오오오오!”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 바알을 그리드가 추격했다.

낙월검이, 연살화극락이, 오십만대적검이, 낙룡극살파가, 신격에 이은 초연살파극이 바알을 난도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드의 팔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리고 급기야 검을 쥔 손목이 뚝 끊어졌지만, 그리드는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바알의 발악적인 반격에 얼굴의 절반과 가슴이 뜯겨나가도 이를 악 물고 버텼다.

꺼져가는 의식을 빛돌이가 발하는 섬화로 일깨웠고,

갓 핸드를 불러들여 자신의 손목을, 허리를, 어깨를 지탱하게 하였으며,

“왼쪽이다냥!!”

“어깨를 조금만 더...!”

노에와 랜디를 눈으로 삼아,

푸우우욱!!

기어코 검로를 연결시켰다.

“끄...흑흑! 크하하하학!!”

비명인지 웃음일지 모를 바알의 외침이.

쿠우우우우웅!!

지상에 추락함과 동시에 뚝 멎었다.

“...”

거짓말 같은 결과여서, 아무도 이 상황을 믿지 못했다.

잠자코 누워있는 바알을 바짝 긴장한 채 경계했다.

침묵 속에 그리드가 움직였다.

철컥!

신격의 연쇄로 합체 상태를 유지 중이던 두 자루 검을 해체해 인벤토리로 되돌렸다.

넝마가 된 상체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망토로, 뭉개진 얼굴 반쪽을 갓 핸드로 가린 채다.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어서였다.

짊어진 자의 책임이다.

영웅의 자세였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의 자아 파편이 소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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