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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20화 (1,410/1,794)

템빨 71권 - 8화

총 수십만 회의 격발이 만든 재앙.

폭우처럼, 태풍처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광선의 세례를 목격한 시청자들은 연합군의 궤멸을 예측했다.

곧 펼쳐질 참상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눈을 감고 귀를 막거나 채널을 돌린 사람이 꽤 많았다.

한참을 심호흡한 그들이 뒤늦게 눈을 떴다. 채널을 되돌렸다.

“헙...”

헛숨을 들이킨다.

전장 곳곳을 훑듯이 비추는 카메라 시점을 원망하면서였다.

처참히 파괴된 땅, 흙더미에 파묻힌 병장기, 호수를 이룬 핏물, 주인을 잃은 살점과 뼈의 조각들...

전장의 참상은 예상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잡화점의 라임 씨와 대장간의 펄슨, 평소 성격은 재수 없지만 챙겨줄 땐 또 확실히 챙겨주곤 했던 영주...

지난 수 년 동안 Satisfy를 살아가며 쌓아온 인연들이 덧없이 사라질 거란 생각에 슬프고 두려워졌다.

앞으로의 Satisfy는 지난날의 Satisfy와 전혀 달라서, 조금도 즐거울 것 같지가 않았다.

다음엔 조금 더 유명한 지역으로 모험을 떠나자며, 그날을 위해 어서 레벨을 올리자고 의욕을 냈던 동료들도 차츰 Satisfy를 떠나지 않을까...

“...어?”

저마다 다른 인연을, 이유를 떠올리며 우울해하던 사람들.

슬픈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그들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뒤늦게 인지했다.

전장에 오케스트라라도 대동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순간 화면이 움직였다.

장엄한 음악에 맞춰 천천히, 넓게 시야를 확장시킨다.

초토화 된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의외의 존재들을 비춘다.

예상과 달리 멀쩡히 살아있는 연합군 병사들이었다.

그들 전원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환희에 찬 얼굴로, 음악을 집어삼킬 기세로 환호하며.

“...!”

시청자들이 슬슬 눈치 챘다.

전장의 참상을 장식한 흔적들은 대부분 마물들의 것이었음을.

마침 병사들의 시선을 좇아 하늘을 향해 치솟은 카메라가 누군가의 뒷모습을 비추었다.

아스라이 번지는 그의 색은 노을이었다.

마기에 물들어 우그러진 검은 하늘을 밝히는 태양이었다.

“미...친...”

전율하고, 환희하며.

사람들은 영웅의 존재 이유를 깨달았다.

***

‘슬슬 움직이나.’

잠시 민망해하던 그리드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바알의 웃음이 뚝 멎었음을 확인하면서다.

과한 긴장은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몸과 정신을 이완시킨다.

‘어느 정도 수준일까.’

그리드는 바알의 자아 파편과 싸워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참고로 삼기엔 부족했다.

당시의 바알은 아그너스에게 빙의했던 반면 지금의 바알은 지크의 육신에 빙의했으니까.

비교가 불가한 것이다.

지크는 양반의 상위 개념이다. 진짜 반신이다. 마땅한 업적과 숭배를 쌓아 신에 도달해가던 존재였다.

‘우선 속도를 통해 가늠해야겠지.’

그리드는 지난 며칠 동안 밀도 높은 삶을 살았다.

비반과 대련하고 제라툴과 하야테의 전투를 목격하면서 황금 같은 경험을 쌓아올렸다.

덕분에 자신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했다.

음속까진 거의 확실하게 반응하지만 초음속부턴 어렵다.

초월경의 감각 극대화가 발동해도 ‘알아도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공격을 인지는 하는데 피할 순 없는 식이다. 완전히 직감에 의지해야했다.

바알의 속도가 제라툴처럼 ‘상시’ 음속을 돌파할 경우 그리드에게 승산이 적단 뜻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바알의 실력을 그리 고평가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봐야 비반급일 거라고 봤다.

바알이 절대신(야탄)의 직계인 점을 고려하면 제라툴과 동격이라 해도 무방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탄생 배경에 불과하니까.

제라툴에겐 신의 지위가 있는 반면 바알은 대악마일 뿐이다.

바알이 탄생했던 시점의 격은 제라툴과 같았을지 몰라도, 인간들의 신앙을 통해 꾸준히 격을 쌓아왔을 제라툴과 동격을 유지했을 가능성은 없다.

아직 본 적 없는 제1위 대천사.

바알의 대척점은 딱 그 정도다. 아마도.

‘심지어 본체도 아니고 이곳은 인계다.’

세상이 섞였을지언정 순수한 지옥과는 다르다. 바알은 크게 약화된 상태다.

결론은.

‘승산이 높아.’

찰나지간에 이루어지는 판단이다.

마침 바알이 그리드를 평가했다.

“무르익었구나.”

과거 지옥에서 조우했을 때와 완전히 상반되는 평가였다.

“신이 될 자격을 갖추고도 인간에 머물렀던 시절과 비교하면 제대로 구실을 하겠는 걸. 체파르데아 녀석이 호들갑을 떤 이유를 알겠다.”

세상은 이번 전쟁의 원흉이 바알일 거라고 믿는다.

아무렴 지옥 전체가 인계를 침공해왔으니.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전쟁을 일으킨 건 체파르데아다.

그리드를 죽이고, 그리드의 모든 것을 빼앗아 격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이유로.

바알은 그런 체파르데아를 마음대로 하게 놔뒀을 뿐이다.

“...”

그리드가 짐짓 놀랐다.

자아의 파편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특정 성격만 발현되는 까닭인지 바알의 말투가 지옥에서완 크게 달랐다. 다소 경박해서 바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투쾅!

대화는 길지 않았다.

어서 이 무료함을 달래고 싶다는 듯이, 바알이 곧장 그리드에게 쇄도해왔다.

꽈창!!

‘비반급. 하지만 살수를 쓰는데다 디버프까지 있어서 훨씬 더 까다롭다. 변수는 권능과 지옥 소환인가.’

그리드는 단 한 번의 충돌을 통해서 바알의 수준을 파악했다.

지크의 육신은 언젠가 지크프렉터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고, 바알은 그 완벽에 가까운 육체를 한계까지 활용했다.

더군다나 온갖 디버프를 유발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그중 상당수를 저항했지만 몇 가지엔 영향을 받았다.

초월의 격이 몇 단계 떨어져 초월자의 피부 등의 효과가 사라졌고 몇 개의 칭호가 봉인됐다.

그나마, 혹은 당연히 신격은 유지됐다.

덕분인지 항시 약점 노출과 집중력 하락 디버프는 면했다는 점이 긍정적이었다.

봉인 된 칭호도 대부분 초중반에 얻은 것들이었다.

신이 되고 얻은 칭호, 혹은 신이 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칭호들은 건재하게 유지됐다.

아마도 바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악의.

그것에 의해 왜곡 된 지옥과 야탄의 어렴풋한 의지로는 신의 위엄을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

뚜둑!

그리드의 턱이 비스듬히 꺾였다.

빛살처럼 뻗어진 바알의 장권에 의해서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피했는데 턱을 스치고 말았다. 1만 5천의 데미지를 입었다.

손해는 아니었다. 퇴보를 밟은 시점에서 꽂아 넣은 살(殺)이 바알의 가슴을 관통하며 수십 배의 데미지를 입혔으니.

선혈이 낭자했으나 지크의 육신을 걱정하진 않는다.

수천 년을 봉인되고도 멀쩡했던 육체가 쉽게 소멸할까?

육체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바알의 자아 파편이 먼저 소멸할 거라는 게 그리드의 판단이었다. 확실한 근거와 Satisfy의 특징, 여러 경험을 토대로 내린 결론을 그는 신용했다.

만약 일이 잘못 되도 괜찮다.

‘세희가 있으니까.’

빠각!

갑옷에 바알의 주먹이 꽂혔다.

그리드는 반격을 위해 맞아줬다. 3융합 검무로 응수했다.

하지만 그리드의 칼은 바알에게 닿지 못하고 위로 솟구쳤다.

바알이 올려 찬 발에 손목을 얻어맞아 궤적을 잃은 탓이다.

가슴을 내준 게 패착이었다. 몸이 뒤로 밀려서 리치가 짧아졌다.

반면 바알의 발차기는 최단의 경로로 쏘아진 까닭에 그리드를 속도 싸움에서 압도했다.

‘이 새끼.’

실실 웃는 바알의 면상을 본 그리드가 깨달았다.

놈은 무술을 익혔다.

보통의 대악마와 달리 본능대로 싸우거나 권능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체계적인 권각술을 구사했다.

갑옷을 때렸던 주먹을 곧장 펼쳤던 움직임을 돌이켜 보면 유술에도 일가견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갑옷이 조금이라도 우그러졌다면 그 틈새로 손을 밀어 넣어 낚아챘을 테지.

스카악!

솟구쳐 오른 검을 극(極)을 써 내리찍듯 회수하는 그리드의 왼 손에 붉은 기파가 넘실거렸다. <혈류 파동>의 전조였다.

콰르륵!!

극을 회피하려던 바알의 몸이 휘청거렸다.

혈류 파동이 일으킨 충격파의 연쇄가 균형을 상실시킨 까닭이다.

본체였다면 모를까, 지크의 육신은 물리적인 상태이상에 완전히 저항하지 못했다.

놈의 어깨를 극이 가르자 솟구친 선혈이 그대로 칼날의 형태를 갖춘 뒤 폭발했다.

혈검 분쇄로 완성되는 콤보였다.

그리드는 쉬지 않고 아이템 합체를 전개했다.

무아검에 염룡검을 합쳐 다음 공격에 실리는 위력을 극대화시켰다.

이어지는 검무는 초연살파극.

여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2초 내에 이뤄졌다.

한 발 늦게 발생한 폭발음과 절삭음이 어지럽게 뒤얽힌 채 지상에 전달됐다.

사방팔방으로 난무하는 충격파와 형형색색의 스킬 이펙트가 충돌하고, 분절되며 하늘을 수놓는 광경에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차원이 다른 싸움이었다.

일부 방송사가 생중계를 포기했다.

1초 전의 상황을 백배, 천배 느리게 되돌려 보며 전투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식으로 전문성을 강조했다. 시청률이 수직 상승했다.

꽈르르르릉!!

초연살파에 적중당하기 시작한 바알이 전황을 뒤집는 수를 썼다.

상단전이 극도로 발달한 지크의 육신의 이점을 살려 의지를 표출하고 화신의 폭풍을 잠재웠다.

그래도 기세가 죽지 않는 초연살파극의 위력에 감탄하며 새카만 마기를 피부에 겹겹이 둘렀다.

“쿨럭!”

아직 초연살파극의 동작을 실천 중인 그리드가 피를 토했다.

갑옷 틈새로 파고든 바알의 수도가 그리드의 배를 개복하고 내장을 쥐어뜯고 있었다.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믿기지 않는 수준의 고통과 그에 비례하는 막대한 데미지가 그리드를 경악시켰다.

초연살파극의 전개가 끝나자마자 발악적으로 순보를 쓴 그가 복부에 붕대를 감으며 물약과 지혈제를 복용했다.

그러면서 바알을 경계했는데, 놈은 그리드를 따라 붙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고 서있었다.

입 모양을 보면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기색이었다.

‘정신 분열증이라도 겪나?’

저놈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리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알에게 쇄도했다.

순보와 검무, 순보와 무패왕의 검술을 시간 차 없이 교차 전개하여 바알의 사방위를 찔렀다.

비반에게 선보였던 비기를 훨씬 더 밀도 높게 구사하는 것이었다.

피하고, 베이고, 반격하는 바알의 이가 꽈드득 갈렸다.

“멈추라고 했다.”

그리드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저격을 준비 중인 어떤 개자식에게 하는 경고였다.

경고가 무색하게도 저격이 행해졌다.

퍼엉!!

갑자기 나타난 마탄에 적중당한 그리드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진 채 추락하듯 떨어지는 모습을 보아 충격이 큰 듯했다.

‘빌어먹을.’

지상에 떨어지기 거의 직전에야 간신히 멈춰 선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그는 전장 어딘가에 바르바토스가 도사리고 있단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갓 핸드와 노에, 랜디, 뱀파이어들을 넓게 확장 배치시키고 주변을 경계하게 만든 이유가 놈의 저격에 대비해서였다.

아무래도 초월의 격이 바알의 공격을 읽는데 소모되고 있다 보니 저격까지 동시에 인지하고, 대응하는 건 힘들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다만 문제는 갓 핸드와 부하들이 마탄의 기척과 궤적을 읽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쥐새끼는 우리한테 맡겨라.”

브라함이 메르세데스, 아스모펠, 카일에게 눈짓한 뒤 사라졌다.

바르바토스를 수색하기 위함이었다.

지공답게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현재 바알은 달과 나란히 섰다고 착각이 들 정도로 높은 고도에 올라있었다.

거기까지 닿을 마법은 지극히 한정되는데 브라함과 카일의 상태는 아직 온전치 않다. 효과적인 저격을 행사하기 힘들었다.

가까이 접근해서 싸우는 방법도 있지만 바알의 속도와 기술을 감당 못하고 도리어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을 확률이 높았다.

동급, 혹은 상위 실력자와 근접전을 펼치는 건 마법사에게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브라함의 경우 직계의 힘을 되찾았지만 근접 전투 기술을 익힌 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바알과 싸우느니 바르바토스를 찾아 저격을 못 하도록 막는 편이 차라리 그리드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저는 주군과 함께 싸우겠어요.”

메르세데스는 브라함의 부름을 외면했지만.

“네가 있어야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르바토스의 권속들이 한데 뭉쳐있기도 해서 브라함 공과 카일만으론 위험할 거고.”

“...”

아스모펠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다만, 떠나기 전 그리드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주군 혼자서 버티실 수 있나요.”

빤히 올려보며 묻는 모습이 귀엽다. 무표정으로 태연을 가장하지만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려서 왠지 겁먹은 다람쥐를 연상시켰다.

저도 모르게 웃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브라함을 도와주면.”

“맡겨주세요.”

그제야 메르세데스도 브라함의 뒤를 쫓아 사라졌다.

그리드의 몸이 서서히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까.’

초월의 격의 공격 인지 능력이 바알에게 소모되는 순간 날아오는 바르바토스의 저격...

눈과 감각으로 파악하기 힘든 공격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벨리알의 힘으로 분신을 만드는 건 무의미하다.’

그래봤자 32위 대악마의 권능이다. 검성의 초감각조차 분신을 간파하는 마당에 바알과 바르바토스의 감각을 속일 확률은 없다.

베리드의 힘으로 <자동 연성>을 사용하면 투사체를 자동으로 막아주지만 지속 시간은 1분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끝으로 혜안을 빌리는 건 메르세데스를 약화시켜서 위험하다. 바르바토스를 수색하기 위해선 메르세데스에게 혜안이 필요하기도 했고.

‘가만...’

그리드의 뇌리에 은사가 스쳤다.

개변한 마력 사출기가 사출하는 마력에 은사를 섞어 물리력과 가변성을 가미했었다.

촤르륵!

그리드가 서른 개의 갓 핸드를 모조리 곁으로 불러들였다. 마력 사출기로 사출한 은사를 갓 핸드들의 손가락에 엮었다.

육안으로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안 그래도 희미한 은사가 마력과 혼합되어 한없이 투명에 가까웠기에.

스스슥.

갓 핸드들이 그리드로부터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녀석들의 손가락에 묶인 은사가 팽팽하게 당겨질 때까지.

그리드의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서른 개의 갓 핸드에 의해서 직선으로, 사선으로 교차한 은사가 그리드를 중심에 둔 채 흐릿하게 빛났다.

그때.

거미줄의 하단부가 출렁였다.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은사로 만든 레이더에 걸린 것이다.

그리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초월의 격에 의지할 것도 없이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 저격을 회피했다.

명백한 진화였다.

바르바토스에게 욕설을 뇌까리던 바알이 반색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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