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18화 (1,408/1,794)

템빨 71권 - 6화

‘전설을 의도적으로 육성하는 게 가능할까.’

케를의 성장이 그리드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물론 케를은 옹(翁)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이가 많다. 드워프 기준으로도 노년이었다.

장인으로 지내온 세월만 족히 백 년 이상일 테니, 전설이 될 자격을 이미 충분히 갖췄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가 나타난 건 그리드와 작업한 뒤다.

‘케를 혼자서는 쌓지 못했던 경험치를 내 덕에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 템빨신의 기술을 보고 얻은 배움과 신화급 작품의 완성을 도우며 얻은 깨달음이 클 테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전설을 의도적으로 육성하는 게 정말로 가능하다면, 앞으로의 양상이 크게 바뀔 것이었다.

‘앞으론 작업할 때마다 보조를 꼭 둬야겠어...’

당장 드래곤 웨폰을 만들 때부터 장인들과 함께 해보자.

물론 지엽적인 부분만 돕게 할 거다. 작품에 영향이 없을 만큼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겐 큰 경험이 되겠지.’

“반용족 로드가 도착하였습니다.”

“음.”

마침 들려온 목소리가 그리드의 상념을 깨웠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전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시대를 초월하는 강자를 목격하였습니다.]

투기.

강력하고 흉포하여 통제가 힘든 기운이다.

술식과 기술,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이루고 이적을 행사하는 마나, 오러, 검기 등과 달리 조화를 추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무신 제라툴이 쓰는 걸 보고 ‘아, 그래서.’라고 내심 납득했었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경향이 컸다.

어디까지나 본질이 그렇다는 거다.

주황빛에 스며든 그리드의 투기는 잠잠했다. 감히 날뛰지 못했다.

그리드가 품고 있는 무한의 검기와 신격에 의해서다.

번츠델을 보고 벼락처럼 발광하는 적자색의 투기는 평소와 같았다.

일정 수치로 유지되며 그리드에게 적절한 자극만을 선사했다.

‘반용족 로드...’

그리드가 감탄했다.

역삼각형으로 발달한 상체를 중심으로 고목처럼 뻗은 팔과 다리.

2미터에 육박하는 장신과 대비되게 짧고 두꺼운 목.

그 목에 철갑처럼 두른 용의 비늘...

번츠델의 육체는 그야말로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끝이 치솟은 두꺼운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그의 인상을 더욱 굴강하게 가꿨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꺾이지 않을 듯했다.

거기에 높은 초월의 격까지...

‘등을 맡기면 든든하겠다.’

자연히 떠오르는 생각에 그리드가 짐짓 놀랐다.

첫 만남부터 이런 감상을 느끼다니.

여태껏 수많은 실력자들을 만나온 그리드가 봤을 때도 번츠델의 수준이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헬레나가 로드의 자리를 빼앗겼을 만 해.’

카오스 산맥에서 토벌했던 빈 수레와 번츠델을 비교하는 그리드의 눈빛에 짙은 호감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제가 저들을 처형해도 되겠습니까.

드물게도 염룡검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덤벼드는 반용족 전사를 향해 노골적인 살심을 표출했다.

*용족과 조우 시 <일회용 절대방어> 활성화. 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용족을 상대로 공격력 20퍼센트 상승.

*용족 처치 시마다 염룡검의 공격력이 1 상승. (영구 적용)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닌 염룡검은 기본적으로 용족에게 적대적이었는데, 도리어 저쪽에서 먼저 자극하자 참기 힘든 눈치였다.

그리드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어질 전개를 알았기 때문이다.

“헉...”

뒤늦게 그리드의 모습을 확인한 반용족 전사.

번츠빌이라는 이름을 지닌 놈이 사색이 되어선 뒷걸음쳤다.

염룡검이 나설 필요도 없이 서열 정리가 끝난 것이다.

반용족은 호전적인 종족답게 강자를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리고 상대가 강할수록 더욱 더 강한 호전성을 불태웠으나,

어디까지나 ‘싸움’이라는 개념이 성립 될 때의 이야기였다.

개죽음을 자처할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아쉽습니다...

염룡검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드는 염룡검의 마음을 이해했다.

비룡과 반용족으로 대표되는 용족 몬스터는 개체수가 무척 적다.

거의 멸종위기종으로 취급 될 정도다.

게다가 반용족은 깊은 산속 어딘가에 꽁꽁 틀어박혀 지냈고, 비룡은 펫으로 선호되는지라 수렵 경쟁이 치열했다.

둘 다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다.

한데 앞으로 반용족은 아군이 되게 생겼다.

동맹 협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싸울 일이 없었다.

염룡검 입장에선 아쉬울 수밖에.

“미, 미친...”

그리드에게 겁먹은 반용족들이 오들오들 떠는 가운데.

저벅.

번츠델이 한 걸음 내딛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리드를 노려보는 모습이 첫인상만큼이나 강렬했다.

그리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서열 정리는 하고 가야겠지.’

사실 호전성은 그리드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았다.

온갖 초월적인 존재들과 싸워온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신에게 검을 겨눌 채비를 갖추고 있지 않나.

반용족은 개죽음을 두려워하기라도 하지, 그리드는 개죽음마저 감수한다.

죽음으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플레이어의 불합리한 특성을 이용해 여태껏 수많은 강자들에게 도전해왔다.

‘번츠델.’

너의 수준은 어느 정도냐.

양쪽 팔목과 두꺼운 목에 철갑처럼 두른 그 용의 비늘은 나의 검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리드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멍!”

번츠델이 짖었다.

“...?”

그리드의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사람들의 당황 속에서 번츠델이 소리쳤다.

“무신을 패퇴시킨 위대한 템빨신이시여! 당신의 고절한 무위에 나, 번 아무개가 깊이 탄복 했소이다! 당신을 반용족의 유일한 지주이자 신으로 섬기며 충실한 개가 될지니!! 부디 우리를 거두어주시기를!!”

“...!”

“...!”

번츠델은 일족을 상대로 과묵하다. 마음을 터놓은 하오 정도를 제외하면 일족과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

일족의 안전을 핑계로 일족을 우물에 가둔 죄책감 때문이다.

그 탓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반용족 전사들이 아연실색했다.

왕좌의 인간.

몹시 고강하다 싶더니 신이었다고?

하물며 무신을 패퇴시킨?

이렇게 된 이상...

“멍! 멍멍!!”

“왈왈! 크르르! 왈!!

“컹~!”

반용족이 다양한 개소리를 내었다.

신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왜 하필 개 짖는 소리를 내는 건진, 그들 본인조차 몰랐다.

신을 섬겨본 적이 없기에.

그들은 다만 로드를 보고 배웠을 뿐이었다.

“전하.”

그리드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라우엘이 다급히 말했다.

“출정해 주셔야 할 듯합니다.”

***

“대열을 정비해라! 어서! 방패병 뭐해! 당장 전열을 갖춰!!”

세라, 리본, 젤다르크, 호류.

이들의 공통점은 체다카 길드 출신이라는 점이다.

십공신이나 그에 준하는 초네임드 랭커들과 비교해서 다소 부족하지만 템빨단의 명성에 걸맞은 실력자들이었다.

특히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개인의 활약에 치중하는 템빨단원들 사이에서 병력의 지휘를 도맡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휘관으로서의 기량이 출중해졌다.

지르칸, 미하라, 아셀라스 등의 자이언트 길드 출신원들도 마찬가지다.

크리스의 심복인 그들은 템빨단에 합류하기 전부터 대규모 인원을 통솔했던 경험을 살려 병력을 기민하게 통솔했다.

거기에 토반의 카리스마와 연합군 장군들의 보조, 그리고 십공신과 놀의 무력이 보태진 덕분에.

“좋아! 대열을 유지하면서 퇴보해라! 서두르지 마! 천천히!!”

마물들과 어지럽게 얽힌 채 싸우던 연합군 병사들이 신속하게 대열을 정비했다.

전열로 나서 방벽을 세운 방패병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금씩, 착실하게 뒤로 물러났다.

지휘관들은 여전히 지옥 달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만 개의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하늘 위에 떠오른 불길한 달.

보기만 해도 섬뜩한 그것이 갑자기 무저갱으로 시선을 돌리고 광선을 쏘아대기 시작하고 처음 몇 초간.

지휘관들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저갱을 기어오르던 마물 군단이 뭉텅이로 소멸하는 광경을 보고 긍정적인 현상으로 해석했을 정도로 혼란을 겪었다.

그러다가 몇 초 뒤에 깨달았다.

지옥 달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는 순간 재앙이 닥칠 거란 사실을.

군대를 급히 통솔해 방진을 짜고 뒤로 물리는 이유였다.

불과 몇 분 만에 수십만의 병력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수준이라, 각국 방송사의 해설진이 난리법석을 떨었고 시청자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템빨국 지휘관들의 역량이 뛰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의 찬사와 환호는 곧 침묵으로 바뀌었다.

지독히도 끔찍한 이유에서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출현하였습니다.]

[절대적인 악의를 느낍니다. 상태이상 공포, 쇠약, 중독, 화상, 출혈에 걸립니다.]

[악의에 왜곡 된 지옥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웁니다. 생략.]

[악의에 왜곡 된 절대신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웁니다. 생략.]

[지옥 달이 바알의 통제에 놓입니다. 지옥 달의 시선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

버근가?

마물들이 퍼붓는 포화를 견디며 후퇴하던 연합군 플레이어와 시청자들이 일제히 같은 의문을 품었다.

무려 지옥의 정점이 출현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아서였고,

상상 해보지 못한 고강도 디버프가 한꺼번에 밀어닥쳤기 때문이며,

바알의 생김새가 예상과 전혀 달라서였다.

크고 흉측한 악마를 연상하곤 했었는데 금발의 매끈한 미남자가 나타났다.

대악마는커녕 천사를 연상시킨다.

“어...”

연합군 지휘관들의 머리가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명령은 내리고 있었다.

퇴각, 퇴각, 퇴각...

반사적으로 같은 외침을 반복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뼈와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인내했던 훈련 덕분에 정예 중의 정예로 거듭났던 이들이, 거짓말처럼 오합지졸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알로 인해 발생한 디버프가 너무 치명적이었다. 공포에 절은 뇌에 발목이 잡혔다.

급기야 전열이 무너지고 마물들의 난입을 허용했다.

<바알, 지크의 육신을 강탈>

<무저갱에 바알 출현>

<무저갱 전군에 퇴각 명령. 지옥 달의 시선을 경계하며 후퇴할 것>

새로운 정보가 한 발 늦게 쏟아졌다.

페이커가 부활 즉시 올린 보고가 드디어 전파 된 것이다.

“바아아알!!”

공포에 완전히 굳어버린 탓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사들.

그 틈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놀의 외침이었다.

어머님을 추방하고 혈족에 나태의 저주를 내린 원흉을 향한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베리아체의 자식인가.”

지옥 달을 등지고 서서 지상을 굽어보던 바알이 반응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작은 미소가 번졌다.

“덤벼.”

“...!”

짧게 뱉으며 손을 까닥이는 언동에 품위가 없다.

지옥의 정점이라는 위계에 어울리지 않아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 탓에 잠시 움찔하는 놀이었지만, 이내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마물 군단을 돌파했다.

전장을 가로지르며 가속을 얻고 하늘 위 바알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작은 두 손에 맺힌 핏빛의 마력이 위협적으로 소용돌이치며 바알을 겨냥했다.

“죽어!!”

“베리아체가 말년엔 퇴물이 됐었나?”

놀에 대한 감상이었다.

시시하다는 듯이 손을 휘저은 바알의 동작 한 번에 놀의 마법이 파훼되었다.

하지만 놀의 쇄도는 여전했다.

새로운 혈마법을 즉시 연계하며 바알에게 도달해갔다.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애초에 놀은 단신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의 마법과 능력은 ‘돕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

꽈창!!

바알에게 접근함과 동시에 마기에 난도당하고 발에 차인 놀이 맥없이 추락해 지면에 처박혔다.

하필 적진 한가운데로 떨어진지라 수백 마리의 마물들에게 순식간에 덮쳐졌다. 그 작은 몸을 물리고, 뜯기고, 베이고, 찔리면서도 바알을 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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