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5화
“...!”
페이커가 즉시 반응했다.
위에서 떨어진 힘의 파동을 감지함과 동시에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 탓에 광선은 페이커의 어깨를 스치는데 그쳤지만, 무색하게도 2만의 데미지를 남겼다.
피격 범위와 저항력, 방어력 등을 무시하는 고정 데미지였다.
더 큰 문제는, 쏟아지는 광선의 숫자가 빗줄기를 연상시킨다는 점에 있었다.
‘이 무슨.’
쿠콰콰콰콰콰쾅!!
회피 동작을 연계하는 페이커의 감각이 한 발 늦게 눈치 챈다.
이 광선의 근원은 보다 높은 곳에 있음을.
지옥 달이 바알의 통제에 놓였다는 알림창을 상기하며, 그는 확신했다.
‘달의 저격.’
안 된다.
이대로 바알이 지상에 올랐다간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드와 라우엘의 삶과 노력이 모은 수십만의 대군이 허망하게 스러질 것이다...
이를 악 문 페이커가 셈해보았다.
자신의 실력으로 바알을 없앨 수 있나?
불가능하다. 이길 확률은 무조건 0퍼센트다.
단순히 발을 묶는 건 몇 분이나 가능할까?
1분 20초 이상은 가능성이 매우 낮고, 1분 40초 이상은 기적의 영역이며, 2분 이상은 불가능하다.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하는 순간 불사 상태에 돌입할 거라는 극단적인 가정 하에 내린 결론이다.
그럼에도 최소 1분은 높은 확률로 버틸 거라고 장담한다.
란스티어의 스킬은 상대적이기 보다 절대적인 측면이 강해서다.
상대의 수준과 관계없이 최소한의 활약이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운영 능력이 뒷받침 됐을 때의 이야기지만, 페이커에겐 자격이 있다.
‘살생부를 작성하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거다.’
승산 없는 싸움에 살생부를 소모하면서까지 시간을 벌 가치?
차고도 넘친다.
무저갱을 조준하고 광선을 폭격하는 지옥 달의 모습을 통해 이변을 감지했을 아군이 대책을 마련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니.
‘게다가.’
현재 무저갱은 마물 군단의 가장 큰 진군로다.
무저갱의 끝에 지옥의 입구가 도사리고 있다.
마물과 악마들은 그 입구를 통해 무저갱으로 진입하여 지상으로 기어오른다.
광선의 경로상에 무수한 잿빛 기둥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다.
비처럼 쏟아지는 달의 광선이 마물들을 학살하고 있단 뜻이며, 그 기행은 페이커가 죽기 전까진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바알을 보라.
마물들의 비명과 폭음을 연주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저 놈은... 소문대로 미쳤다. 적아의 구분이 없다.
“이건 거추장스럽군.”
과연 반신의 육체라는 걸까.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었음에도 생기가 넘치는 지크의 육신.
이것에서 엿볼 수 있는 세월의 흔적은 눈부신 금발뿐이다.
발 아래로 수 미터 이상 길게 늘어지는 머리칼.
땅을 밟으면 망토처럼 끌릴 터였다.
싹둑.
칼날 같은 마기가 머리카락을 자른다.
흡족한 표정으로 회전하는 바알의 움직임을 따라 허리까지 내려온 금발이 물결쳤다.
그제야.
“근데 너 끈질기구나.”
바알의 시선이 페이커에게 향했다.
페이커는 회피 동작을 되도록 크게 연계하여 광선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한 마리의 마물이라도 더 저승길 동무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짝짝, 바알이 박수 쳐주었다.
“참으로 인간다운 짓거리다. 사는 세월이 짧아서일까. 너희들은 개죽음을 병적으로 싫어하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남기려 한다.”
기다란 눈매가 호선을 그린다.
누구라도 반할 아름다운 미소다.
하지만 다소 부자연스럽다.
아무리 활짝 웃어도 얼굴에 주름이 생기질 않는다. 육신의 본래 주인이 미소를 몰랐던 듯하다.
“나는 너희들의 그런 점이 썩 좋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부정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감상하다 보면 무료함이 싹 가시거든.”
“...그게 이번 전쟁을 일으킨 이유인가? 네 변덕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발버둥치는 모습을 감상하며 즐기려고?”
“굳이 이유를 대야 한다면, 그런 거 같은데? 왜? 꼽냐?”
“쓰레기 새끼가...”
페이커가 드물게 욕설을 뇌까렸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침착했던 그가 분노를 숨기지 못할 정도로 바알의 악의는 저열한 것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순수 악.
그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존재는 지옥에서도 드물다.
“후우...”
페이커가 심호흡했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숨을 길게 모았다.
평정심을 되찾아감에 따라 동작이 점차 정교해진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3개의 광선을 회피하고, 한 번의 회피로 4개의 광선을 유도하는 식이다.
페이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광선의 숫자가 점차 더 늘어났고 그에 비례해서 마물들의 비명소리가 커졌다.
이제 무저갱은 어둠이 아닌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만큼 많은 마물이 광선에 죽어갔다.
“흐음.”
바알은 개의치 않았다.
페이커에게 재롱을 감상하며 육체를 점검했다.
이전 세계 최강의 인간이 연마하고 사용했던 몸.
격이 몹시 높다.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바알의 입장에서 반신은 하찮은 것인지라, 지크의 육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크게 기대하진 않았었다.
며칠 갖고 놀기 좋을 장난감이겠거니 치부했었다.
한데 정작 얻고 보니 수준이 상당했다.
거대한 마나핵과 골격의 형태가 생전 지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죽도록 단련했군.’
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품었었기 때문일까.
인간의 한계를 몇 번이나 넘어선 육신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뇌였다. 황당할 지경으로 발달해서 온갖 관념을 손쉽게 받아들인다.
쉽게 말해 이해와 계산이 빠르고 정신력이 강하다.
덕분에 지옥 달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지옥 달을 통제하는 건 본신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는데.
무릉도원의 신선들이 상단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집착하는 이유가 이해 될 정도다.
“이러니까 아스가르드 놈들이 바짝 쫄았지.”
신들과의 전쟁에 지크가 참전했다면, 놈은 전쟁 내내 발전했을 것이다. 하급 신 몇 놈은 죽였을 수준까지.
장담하며 실실 웃은 바알이 육체의 조정에 들어갔다.
마나핵 가득 마력을 밀어 넣어 팽창시킨 후 한꺼번에 연소시켜 수축시키길 반복한다.
무저갱의 무한한 마나와 제1위 대악마의 술식을 활용한, 실로 무식한 연공법이었다.
꽈득! 뿌드득!!
골격에도 변형을 주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자의 육체인지라 완전치 못한 부분들을 가꿨다.
팔다리의 길이가 늘어나고 대퇴부와 손가락의 형태가 조금 바뀐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신체의 밸런스가 극도로 좋아졌다. 환골탈태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다.
“...!”
그림자술을 전개하여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마물 군단을 한데 모으고, 광선을 유도해 일망타진하던 페이커가 불현듯 경악했다.
구석에서 혼자 낄낄 거리는 바알의 기운이 한층 더 강해진 것을 느낀 까닭이다.
그렇다.
지크의 육체가 생전과 비교해도 강력해졌다.
바알이기에 가능한 시도였고, 지크의 육신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변화였다.
“자, 놀아볼까.”
“못 보낸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바알의 앞길을 페이커가 가로막았다.
이미 살생부를 작성한 후였다.
1분 59초간의 장렬한 전투 끝에,
쏴아아아...
새롭게 솟구친 잿빛의 기둥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
‘좋아. 잘 되고 있어.’
세상에 둘도 없을 초대형 용광로.
작은 요새를 연상시키는 규모인데 건설 속도가 무척 빠르다.
이제 곧 완성될 듯하다. 예정보다 하루 이상 빠른 속도였다.
‘모두 최선을 다해준 덕분이다.’
드워프 케를과 수많은 기술자들.
용광로 건설을 도운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들의 훌륭한 기술과 빛나는 노력 덕분에 행운이 몇 번이나 뒤따랐다.
작업 도중 패시브 스킬이 작동하면서 건설 속도 상승 효과 등이 꾸준히 발생한 것이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이 한때 확률적으로 발동하는 스킬이었던 것처럼, 건축가들의 스킬 또한 운의 영향을 받는 부분이 있었다.
운빨X망겜인 것인데... 운빨에서 승리했다.
‘내 행운 스탯이 영향을 준 부분도 있겠지.’
아무래도 건설의 주체는 나니까.
그리드가 마지막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축성하듯 쌓아올린 벽돌들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10톤의 백린목을 수용할 정도로 거대한 내부를 다시 한 번 점검한 뒤,
심혈을 기울여 짠 구조의 균형을 재차 가늠한다.
케를의 보조를 받으면서였다.
3일 밤낮으로 함께 일한 두 사람의 호흡은 하나가 되어있었다.
교감을 거듭하며 유대를 쌓았다.
[<신의 용광로>의 건설을 완료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신화급 건축물을 건설하였습니다!]
[최초 업적 보상으로 신화 등급 건설 보상이 대폭 상향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0, 대륙 전역 명성이 5,000 상승합니다.]
[건설 참가자들의 제작 관련 스킬 레벨이 1 상승합니다.]
[드워프 ‘케를’의 장인 건축 기술이 전설 등급으로 승급하였습니다.]
[전설의 건축가가 등장하였습니다!!]
“와우.”
“허억...”
그리드는 환희했고, 케를은 졸도했다.
피로가 크게 누적 된 상태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탓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워낙 나이도 많으니...
“귀해진 분이다. 어서 의무실로 모셔라.”
“예!”
케를을 챙긴 그리드가 용광로의 기능을 살펴보는 그때.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며칠을 고대했던 만남이 드디어 성사됐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의복을 걸쳤다.
동대륙 제일의 재단사가 진상한 남색 비단 옷이다. 아랫단이 발목까지 내려오고 소매가 넓은.
양반들이 애용하는 도포와 비슷한데 뒤트임과 끈이 없다. 어디까지나 걸치는 용도였다.
화려한 자수와 맞물려 자칫 방자해 보이는 디자인이지만, 그리드의 지위를 고려하면 그마저도 멋이 된다.
전투 관련 기능은 없다.
대신 위엄과 매력 스탯을 크게 올려주기 때문에 예복으로 삼기 좋았다.
‘선물 받은 옷만 벌써 30벌은 넘은 듯한데.’
실로 다양한 국가에서 옷을 진상하는지라 형태도 다양하다. 아무래도 문화와 유행이 나라마다 다르다보니 의복의 양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드야 좋았다.
상황과 기분에 따라 다른 옷을 입는다는 건 여러모로 유용했으니.
심지어 그 옷 한 벌, 한 벌의 가치가 현금으로 수천만 원을 호가했고.
‘이 옷들만 잘 챙겨놔도 평생 굶어 죽을 일은 없겠어.’
***
반용족.
몸속에 흐르는 번헬리어의 피 한 방울을 자랑으로 삼는 일족.
그 한 방울의 피로 말미암은 호전성을 명예로 여기는 그들을 세상은 ‘상위종’으로 분류한다.
인간 학자들조차 반용족의 우월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헉...”
“저게 반용족...”
라인하르트가 바짝 얼어붙었다.
육체가 강건하고 사나운 기도를 두른 반용족의 행렬에 위축된 사람이 무척 많았다. 피부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용의 비늘이 압권이었다.
“템빨국? 제국의 교섭마저 거부했던 우리가 이런 변방의 소국에 직접 방문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람.”
“우릴 보고 벌벌 떠는 인간 놈들의 꼬락서니를 봐라. 대륙의 주인을 자처하는 것들이 저 모양 저 꼴이니 마물 따위가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지.”
“인간들이 대륙의 주체가 된 건 어디까지나 숫자가 많아서니까.”
반용족들의 언행엔 거침이 없었다. 대로를 가로지르는 도중 마주친 수많은 인간들을 노골적으로 업신여겼다.
번츠델과 나란히 선두에 선 하오가 몇 번이나 주의를 줬지만 콧방귀만 뀔 뿐이다.
하오를 때려죽이려는 반용족도 있었다. 괘씸하다는 이유였다.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한 하오가 한숨 쉬며 입을 닫았다.
‘이게 반용족의 본질이다.’
악룡의 피를 이은 종족.
광적일 정도로 호전적인 성격을 고치는 건 불가능하다.
천하의 그리드라도 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진 못할 테지.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번츠델이 이상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니... 번츠델의 협조를 기대해볼 뿐이다.
‘개가 되겠다고 했으니까. 어디까지나 비유에 불과하겠지만 최소한 동맹 협정은 맺을 거다.’
생각하던 하오가 걸음을 멈췄다.
내성문 앞에 라우엘이 친히 나와 있었다.
“큭큭큭, 반용족 여러분의 뜨거운 피가 저의 심장에 도사리고 있는 검은 용을 자극하는 군요...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쟤 뭐라는 거냐?”
“저게 이 나라의 높으신 분?”
“더럽게 약한 놈이 용은 무슨...”
“쯧, 수준 참 알 만하군. 로드는 왜 굳이 이 나라를 방문한 거지?”
반용족을 대표하는 25명의 대전사들이 불만을 표출했다.
로드 번츠델에게 불신을 품고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이들조차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번츠델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반용족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반용족을 우물에 가둔 당사자가 바로 자신과 역대 로드들이니까.
묵묵히 무리를 이끈 그가 궁전에 입장했다.
“환영한다.”
왕좌에 비스듬히 앉은 사내가 일행을 반겼다.
안 그래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던 반용족 전사들이 울컥했다.
같잖은 인간들의 왕이 감히 자신들을 내려 보며 하대하였기에.
“하, 참 나. 어이가 없으려니. 벌레들한테 왕 취급 받으니까 자기가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줄 아나?”
하오가 말릴 틈도 없었다.
번츠빌.
당대 로드와 같은 혈통인 그가 황금빛 이름을 과시하며 왕좌를 향해 돌진했다.
그랬다가.
“...!”
역광에 가려져있던 그리드의 모습을 뒤늦게 확인하고 석상처럼 굳는다.
마침 역광이 걷혔다.
창 너머의 석양이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고 그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 미친...”
그리드의 위엄에 압도당한 반용족 전사들이 주춤거렸다.
드래곤의 아가리에 투신한 심정으로 로드의 눈치를 살폈다.
두려움에 떠는 부하들의 시선 속에서,
저벅.
힘차게 한 걸음 내딛은 번츠델이 소리쳤다.
“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