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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16화 (1,406/1,794)

템빨 71권 - 4화

치열한 공방 끝에 헬가오가 무릎 꿇었다.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대악마급 육신을 확보했다곤 하나, 전성기 시절의 힘을 7할쯤 되찾았을 뿐이다.

후환을 각오하고 전력을 다한 지크프렉터와 네펠리나, 레이더스의 협공을 견딜 수준은 아니었다.

“내가... 바알 그 저열한 것에게 속았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헬가오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썩 아쉬움 없는 표정을 보아 패배에 익숙해진 눈치다.

기가 막혀서 웃은 지발이 정보부에 상황을 보고했다.

템빨단의 브레인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새로운 정보를 순식간에 정리해서 연합군 상층부에 전파했다.

<그랜드마스터, 네펠리나, 레이더스, 헬가오 격퇴 후 무저갱으로 북상>

<무저갱에서 발견 된 칠악의 육신, 그랜드마스터의 것으로 추정>

<그랜드마스터에게 호위 필요>

‘왜 지발이 아니라 레이더스냐?’

취급에 불만을 느끼는 지발이었지만 일일이 따지진 않았다.

미국의 영웅에겐 지켜야 할 위엄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득템 해서 기분이 좋기도 했고.

***

인마대전 이틀 차.

사람들은 끝도 모르고 솟구치는 행복감에 질식 할 지경이었다.

즐길 거리가 차고 넘치는 까닭이다.

채널 어디를 틀어도 전투와 전쟁이 중계되고 기자들은 경쟁하듯 새로운 영웅담을 써내리지 않나.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개전과 동시에 연속 사망하고 접속 불가 페널티를 얻은 플레이어들조차 이제는 상황을 만끽할 정도였다.

맥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방송을 시청하는 재미가 썩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어서 접속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했지만, 시간이 흘러야 해결 될 문제에 집착해봤자 손해다.

-대악마 견제하면서 마물들 쓸어 담는 거 봐라;; 지슈카의 최대 강점은 안 그래도 위치 선정 능력에 있는데 비거리까지 늘어나서 답도 없네.

-악마들 욕한다ㅋㅋㅋㅋ

-어디서 쏘는지도 모를 화살이 계속 날아오니 욕 나올 수밖에...

-저거 대체 뭐 어케 하는 거임? 나 궁수 랭킹 9,573등인데도 모르겠음. 위치 선정 기준이 뭐지? 어떻게 저렇게 안 들킴?

└최상위 랭커가 커뮤에서 논다고?ㅋㅋ

└ㄹㅇ 직업랭킹 1만 위권이면 로그아웃 할 때마다 선상 파티 즐겨야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음?

└아니 뭔ㅋ 그리드는 맨날 우주여행 가나요? 삼천궁녀랑 어울림? 랭커라고 이상한 프레임 씌우지 마셈.

└랭커한테 프레임 씌우는 게 아니라 님이 랭커가 아니라고ㅋㅋ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은 크게 2명이었다.

번헨 열도의 지슈카와 무저갱의 브라함.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인물들이 시청률 경쟁을 벌이는 셈이다.

외모, 실력, 성격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사랑을 받는 두 사람이니만큼 시청자들의 취향이 갈리는 부분은 전투 스타일에 있었다.

적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힘으로 때려 부수는 마법사냐.

적에게 끝까지 모습을 숨긴 채 컨트롤로 괴롭히는 궁수냐.

...마법사의 경우 설명이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시원한 액션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적진 한가운데서 마법을 난사하는 브라함의 파괴력에 환호했고,

전략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지슈카의 운영 전술에 감탄하며 공부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즐기는 건 불가능했다.

-지슈카 로그아웃 준비하는 듯.

-브라함도 지친 거 같다.

접속 제한 시간과 체력의 한계.

플레이어인 지슈카는 둘 모두에 발목을 붙잡혔고 브라함도 체력 문제를 극복하진 못했다.

몬스터가 아닌 이상 휴식은 필수 불가결인 법.

지슈카와 브라함이 전장에서 이탈하자 전황은 다시 치열해졌다.

마물 진영을 밀어붙이던 연합군이 잠시 주춤하더니 양측이 어지럽게 뒤얽혔다.

-사람 너무 많이 죽네.

-플레이어야 죽어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병사들이 걱정이다. NPC는 한 번 죽으면 끝이잖아.

-제국이 입는 피해가 너무 큰 듯. 전쟁에서 이겨도 한동안 복구 못하고 휘청거리겠어.

십공신과 하스터를 비롯한 특급 랭커들과 놀, 스틱세이, 테루찬 등의 네임드 NPC들.

번헨 열도와 무저갱 양쪽에 속속들이 도착한 원군의 활약도 분명히 훌륭했다.

하지만 마법사와 궁수의 정점들을 대신하기엔 부족했다.

대규모 전쟁에서 브라함과 지슈카보다 활약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적의 원군이 대단하다는 점도 문제였다.

거대한 두꺼비처럼 생긴 바알의 권속이 입을 벌릴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파리 떼가 재앙 같은 피해를 일으켰다.

인마대전 3일차.

시청자들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목숨을 바쳐 싸우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며 뒤늦게 Satisfy를 시작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을 정도다.

바로 그때.

-어? 저, 저거...!

-이런 젠장! 기다리고 있었다구!!

새로운 에이스들이 등장했다.

번헨 열도에는 피아로와 싱클레드, 단테, 켄트릭이.

무저갱에는 메르세데스와 아스모펠, 아멜다가.

그들이 브라함과 지슈카의 빈자리를 채웠다.

-미쳤는데? 브라함도 그렇고 그리드 부하들 전보다 훨씬 세졌어.

-그리드 진짜로 든든하겠다.ㅋㅋ

-하루만... 제발 하루만 그리드로 살고 싶다고.

어째서 그리드는 나서지 않는가.

그런 의문이나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이 적었던 이유는 템빨국의 규모에 있다.

그리드는 왕이고, 신이다.

그를 따르는 부하가 저토록 많다.

예전처럼 직접 전선에 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일일이 나설 거였다면 굳이 힘들게 동료들을 모으지도 않았겠지.

사람들은 그리드의 입장을 충분히 납득했다.

***

“...!”

브라함보다 한 발 앞서 퇴각한 가미긴을 대신해 전장을 지키던 바르바토스가 당황했다.

메르세데스에게 쏜 마탄들이 중력에 짓눌려 위력을 잃은 까닭이다.

애초에 상성상 메르세데스가 유리했다.

그녀의 혜안은 마탄을 읽을 수 있으니.

저격을 경계해서 중력 마법을 항시 전개했던 브라함과 비교해서 훨씬 더 효율적으로 중력장을 운영한다.

촤하학!!

느려진 마탄을 모조리 베어 떨어뜨린 메르세데스가 은익을 펼치고 돌진했다.

비행에 가속이 더해지자 몹시 신속했다. 수십 만 마물 군단에게 홀로 돌진하는 기세가 포탄을 연상시켰다.

‘뭐지?’

전장 곳곳의 연합군 인사들이 동요했다.

홀로 적진에 투신하는 메르세데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놀과 크리스 등의 일부 실력자는 그녀가 바르바토스의 위치를 특정한 건가 추측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바르바토스는 수십 킬로미터 바깥에서 저격을 해오는 이레귤러다.

게다가 탄환이 갑자기 생성되거나 지면에서 솟구치는 등, 사격에 ‘궤적’이 없어 저격 포인트를 특정 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가미긴보다 바르바토스에게 희생당한 전사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다.

브라함이 활약하고 있을 때도 바르바토스는 연합군에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악마들이 지슈카를 증오하듯 연합군은 바르바토스를 증오했다.

“메르세데스를 엄호해라!”

크리스는 5분 내에 로그아웃 해야 한다. 예정대로라면 퇴각을 준비해야 옳았다.

하지만 급히 병력을 통솔해 전진했다.

다소 흥분한 듯한 메르세데스의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뭣...?”

메르세데스를 뒤쫓던 크리스가 아연실색했다.

신속을 등에 업은 메르세데스의 검술이 여태껏 본 적 없는 파괴력을 발휘한 까닭이다.

적의 칼과 갑옷을 부수고, 살과 뼈를 가르며.

적진을 일직선으로 관통한 메르세데스의 뒷모습은 어느새 크리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잿빛 기둥의 행렬만이 그녀의 위치를 짐작케 할 뿐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잖아?’

크리스는 패도적인 대검술을 구사한다. 기술보다 힘을 숭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메르세데스의 변화를 누구보다 뚜렷하게 실감하는 이유다.

잠시 굳어 선 그의 귀에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저 멀리.

마물군 진영의 최후방.

바로 무저갱이 있는 지점에서 들려오는 폭음이었다.

***

콰르르르릉!!

바르바토스가 저격 포인트로 사용해온 무저갱의 일각이 무너졌다.

희뿌연 먼지가 일대를 집어삼키며 날카로운 돌조각들이 소용돌이친다.

‘위험한 년이다.’

바르바토스가 직감했다.

마탄의 궤적을 읽고 자신의 위치까지 간파한 상대다.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스르륵...

바르바토스의 몸이 투명하게 바뀌었다.

보호색으로 주변의 풍경과 동화 된 수준이 아니라 모습을 아예 감췄다.

한데.

“...?”

분진을 돌파해온 기사의 시선이 자신을 똑바로 꿰뚫는 게 아닌가?

질색한 바르바토스가 전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권속들에게 다급히 복귀 명령을 내렸고,

‘지금.’

소란을 틈탄 페이커는 무저갱의 심연으로 투신했다.

무저갱을 통로로 삼아 진군 중인 마물 군단과 도중에 몇 번이고 마주쳤지만 존재감을 지워 들키지 않았다.

마물들 틈에 섞인 일부 악마들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의 은신술은 탁월했다.

“크윽...!”

무저갱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면적은 황궁을 통째로 옮겨놓아도 덮지 못할 정도고 깊이는 짐작하는 게 불가능했다.

낙하가 거듭되며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가속력을 얻은 페이커가 그림자 이동술을 전개, 벽에 드리운 그림자로 위치를 바꿔 간신히 정지했다.

절벽에 매달려 주변을 살피는 눈빛이 드물게 초조하다.

‘어디에 있지?’

페이커가 맡은 임무는 무저갱에 나타난 지크의 육신을 확보하는 것이다.

확보에 실패하더라도 위치 정도는 파악해놔야 지크프렉터를 안내할 수 있다.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오직 페이커만 수행할 수 있는 임무이기도 했다.

적들의 어그로를 차단하는 은신술, 무저갱의 규모와 지형을 무색하게 만드는 그림자술, 무저갱을 뒤덮은 어둠을 훤히 들여다보는 시야.

이번 임무에 필요한 자격 조건을 전부 갖춘 사람은 페이커가 유일했으니까.

그만큼 책임감도 강했다.

‘조금 더 내려가 봐야겠군.’

혹 마물들에게 들킬까.

숨죽인 채 절벽에 달라붙어 위아래를 살피던 페이커가 깜깜한 지하로 다시 몸을 날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지하로 투신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담력을 요구했기에, 페이커가 겪는 부담감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후우.”

한계까지 하강하다가 다시 절벽에 붙은 페이커가 참았던 숨을 토했다.

그 탓에 마침 위로 오르던 마물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지만 마비독을 바른 단도를 던져 침묵하게 만들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떨어졌으니 한참 뒤에 추락해 죽으리라.

‘여기서 바로 죽였으면 어그로가 끌렸을 테니.’

페이커는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무저갱을 잠식하는 어둠은 너무 짙어 적응이 힘들다는 ‘설정’이 있지만, 전설 중 가장 뛰어난 감각도를 지닌 란스티어의 안력을 무력화시킬 정도는 아니다.

‘여기도 없나.’

내부를 샅샅이 살펴본 페이커가 또 한 번 투신했다. 시선이 닿지 않았던 지점까지 떨어진 뒤 절벽에 붙어 관찰을 재개했다.

그렇게 수십 번을 반복했다.

언젠가부터 시간의 흐름을 잊고, 감각마저 무뎌져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과업을 수행했다.

늘 그래왔듯이.

“...!”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페이커가 티끌처럼 작은 점을 발견했다.

모든 것이 어둠에 물든 무저갱에서 홀로 붉게 빛나는 점이었다.

홀리는 게 당연하다.

페이커는 점을 향해 하강했고 먼지처럼 희미했던 붉은 점은 점차 크기를 확대했다.

두근!

페이커의 얼굴이 굳었다.

두근!

페이커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두근!!

터질 듯이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하강의 소음마저 집어삼킨다.

‘이럴 수가.’

점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불길함.

그로 인해 떠오른 최악의 가정을 애써 부정하던 페이커가 끝내 절망한다.

여태껏 본 그 무엇보다 강력한 마기를 품은 붉은 점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바알의 자아 파편>

그것이 붉은 점의 정체였으며.

점이 향하는 방향엔 절벽의 틈새에 봉인 된 지크의 육신이 있었다.

[귓속말이 불가능한 장소입니다.]

[길드 메시지를 이용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페이커의 추락이 가속한다.

빠르게 더해지는 중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전신의 뼈마디가 고통을 호소했고 충혈 된 두 눈은 튀어나올 듯 했지만, 의식을 뚜렷하게 유지했다.

‘육신을 없앤다.’

판단이 추락의 속도를 아득히 상회한다.

행동은 섬전처럼 연계됐다.

그럼에도 막지 못했다.

페이커가 전심전력을 담아 투척한 단도가 붉은 점에 닿기 전, 붉은 점은 이미 지크의 육신에 스며들었다.

덥썩!

지크의 육신을 없앨 각오로 던졌던 단도는 붙잡히고 만다.

지금 막 눈을 뜬 육신의 손에.

“쓸 만한 걸?”

바알.

육신의 머리 위로 떠오른 이름이었다.

영겁의 세월 동안 절벽에 못 박혀 있던 몸을 끄집어내 움직여본 놈의 시선이 위로 향한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이 출현하였습니다.]

[절대적인 악의를 느낍니다. 상태이상 공포, 쇠약, 중독, 화상, 출혈에 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악의에 왜곡 된 지옥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웁니다. 암흑 속성 내성이 0퍼센트로 고정되고 격이 크게 훼손 됩니다. 항시 약점 노출 상태가 됩니다. 집중력이 크게 하락하여 명중률이 감소하고 스킬과 마법의 캐스팅 시간이 대폭 증가합니다. 저항 불가.]

[악의에 왜곡 된 절대신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웁니다. 당신이 쌓아온 업적 전부가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각종 칭호로 발생하는 능력치와 스킬 등이 모조리 봉인됩니다. 저항 불가.]

[지옥 달이 바알의 통제에 놓입니다. 지옥 달의 시선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번쩍!

하얗게 질린 페이커의 머리 위로 붉은 광선이 떨어졌다.

무저갱에선 까마득히 느껴질 뿐인 지상의 하늘.

그곳에 떠올라 있는 지옥 달이 쏜 광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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