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3화
“어째서 갑자기 방향을 돌리신 겁니까?”
염라에게 쫓기는 자가 저럴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번츠델을 한참 뒤에야 따라잡은 하오가 따지듯 물었다.
상대방의 위계가 몹시 높다지만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라인하르트에 거의 도착한 마당에 급히 우회하여 도망친 상황이다.
반용족 로드를 데리고 곧 도착할 거라고 라우엘에게 보고했던 하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순보를 연속으로 사용하느라 크게 지친 번츠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템빨국은 오늘 멸망할 거다. 아니, 조금 전 기파를 보아 이미 멸망했을 수도 있겠군.”
“예?”
하오가 황당해서 반문했다.
번츠델이 갑자기 노망이라도 든 건가 의심했다.
잠시뿐이었다.
번츠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음을 엿본 그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라인하르트에서 무신의 살의를 느꼈다.”
무신 제라툴.
격이 높은 초월자라면 모르기 힘든 존재다.
관념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번츠델은 몇 번이나 무신의 유혹을 받았었다.
꿈에 나타나 비급을 내미는 모습이 무척 신령스러웠는데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껴 매번 거부했었다.
그때 무신이 표출했던 실망감과 분노, 살의는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한데 조금 전.
라인하르트 어귀에서 그때 느꼈던 것 이상의 살의를 감지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은 없다만, 템빨왕인지 신인지가 무신의 역린을 건드린 게 분명하다. 빌어먹을, 우라질. 도대체 무슨 소행을 벌였기에 악마들이 침공한 이때 무신의 분노를 샀지? 역시 신중하지 못한 자다.”
번츠델은 그리드에게 편견을 품고 있었다.
상식과 거리가 멀고 통제가 불가능한, 파격적인 인사로 보았다.
그나마 그리드가 선하다는 하오의 말을 믿고 얼굴이나 한 번 보러 찾아온 것인데, 똥을 밟은 심정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하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라인하르트는 멀쩡하답니다.”
라우엘과 귓속말을 나눈 차였다.
번츠델이 콧방귀 뀌었다.
“연통의 출처가 어디기에 그리 신뢰하는지 모르겠다만 앞으론 되도록 상종하지 마라. 그 연통을 보낸 놈은 장담컨대 후레자식이다.”
“템빨국의 재상이온데...”
“목전에 닥친 멸망을 피하기 위해 나를 끌어들일 심산이로군. 꾀가 얄팍한 걸 보아 수준을 알 만하다. 쯧쯧, 가소로운.”
“진짜 멀쩡하다고 합니다. 무신 제라툴은 패퇴하였고요.”
“뭐? 푸하하핫! 너는 그 말을 믿는 거냐? 사기 당해서 길거리에 나앉기 딱 좋을 놈이네 이거.”
무신은 무적이다.
그 당연한 상식을 모르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템빨국이나, 그 저급한 수작에 고스란히 넘어가는 하오나.
번츠델에겐 둘 다 바보로 보일 뿐이었다.
“쯧, 기분도 풀 겸 술이나 먹자.”
“악마들이 대륙 전역에서 날뛰고 있는 와중에 술이라뇨? 어서 다시 라인하르트로 돌아가시죠.”
“전쟁은 이미 망했어. 다짜고짜 나타난 천상의 무신이 인류를 돕기는커녕 템빨국을 멸망시킨 것만 봐도 돌아가는 사태가 정상적이질 않다. 인류는 필히 패할 거다. 어디가 이기든 우리에겐 큰 영향이 없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지.”
“템빨국 멀쩡하다니까요...”
“푸하하하!”
번츠델이 급기야 배를 잡고 웃었다.
한참 뒤에야 진정한 그가 맹세했다.
“템빨국이 반용족의 협력을 원한다고 했지? 좋다. 앞으로 하루. 내일 템빨국이 멀쩡하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우리 반용족은 템빨국에 협조하는 수준을 넘어서 템빨국의 개가 되겠다.”
“...”
“이제 현실을 알겠지? 어서 가서 술이나 먹자고.”
“...”
도박하다가 길거리에 나앉기 딱 좋을 양반이구나.
하오는 생각하며 내일이 어서 오길 고대했다.
***
“지, 진짜야? 템빨단이 요구를 들어줬어?”
“응!”
“대, 대단해...!”
백요와 흑요 자매는 네임드 랭커다.
어지간한 하이랭커도 그녀들 앞에선 명함을 못 내민다.
정확히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사냥터나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슬그머니 물러나거나 눈을 내리깔 정도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성격이 지랄 맞아서였다.
퀘스트나 목숨을 담보로 주머니를 털어가고, 협박에 굴하지 않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죽음을 선사하고...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가 따로 없었다.
자매가 만약 무리를 이끄는 걸 선호했다면 거대한 도적떼가 창궐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사람들은 자매를 극도로 혐오했다. 노골적으로 기피했다.
자매가 저지른 죄가 워낙 많다 보니 양지에서 활동하는 게 힘든 수준이었다.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가 자매의 수배령을 내렸다.
특히 제국이 자매에게 적대적이었다. 자매가 국경을 넘기라도 하면 추격대를 급파해 끈질기게 괴롭혔다. 법치 유지를 위한 시스템 보정은 사기적인 수준이라 추격대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자매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제국이야 굳이 안 가도 그만이었으니.
하지만 인마대전이 시작되고 사정이 바뀌었다.
무저갱이라는 가장 맛있는 밥상이 제국에 차려진 까닭이다.
아쉬운 대로 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변방에 출몰하는 마물의 수준은 그녀들을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제국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추격대 시스템은 잘만 돌아간다는 점이 아이러니할 따름이었다.
자매는 해결책을 강구했고, 당연히 템빨국으로 눈을 돌렸다.
템빨국엔 제국의 입김이 닿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템빨국이 제국의 상국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자매가 템빨국과 협력할 수만 있다면 제국도 자매를 핍박하기 곤란해지는 것이다.
전황이 인간에게 지극히 불리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자매는 템빨단에 교섭을 요청했다.
전쟁 기간 동안 도움이 될 테니 우리를 써 달라, 굽히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자매는 무저갱이라는 훌륭한 사냥터를 진정으로 원했다.
한데 성격이 문제였다.
템빨국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편지를 쓰던 백요는 어느새 자신의 입장을 망각하고 말았다.
[당신들의 편에서 싸워줄 의향이 있어요. 우리가 상당히 훌륭한 전력이잖아요? 고맙죠? 우리를 원하죠? 그럼 그리드가 만든 레전드리 아이템을 판매 해줘요. 전쟁 기간 내내 당신들 편에서 활약해줄 테니까.]
“어, 언니. 말투가 왜 그래?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 아니었어?”
옆에서 흑요의 태클이 들어왔지만, 백요는 이미 전송 버튼을 누른 후였다.
“아하하... 조졌네.”
이 병신 같은 자존심.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요가 허탈하게 웃었다.
새하얀 전서구가 하늘을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걸로 끝이다.
전서구가 떴다는 건 즉 상대방에게 편지가 도착했다는 의미다.
물릴 수가 없다. 시스템이 그랬다.
...망했다.
템빨단이 이딴 태도에 응해줄 리 없다.
울먹이며 포기하던 차에 ‘알겠다.’는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기뻐서 얼싸안은 자매가 곧장 템빨국으로 달려갔다.
템빨국엔 자매의 수배령이 없었다.
템빨국과 관련해선 사고를 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자매가 템빨단과 적대했던 건 이제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참교육을 몇 번이나 당한 뒤로 템빨단에게 무조건 항복하고 눈 깔고 살았다.
“라우엘! 우리의 제안을 수락한 건 정말이지 훌륭한 선택이야! 마음에 쏙 드네! 똑똑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무저갱에서 활약하고 싶으시다고요? 두 분께 거는 기대가 큽니다. 수속 절차를 밟아놓을 테니 걱정 말고 어서 가서 싸우세요.”
“지, 지금 당장? 아이템 거래는...?”
“당연히 먼저 성과를 보여주셔야 거래도 진행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미치지 않은 이상 템빨단을 상대로 사기를 치겠어? 아이템을 먼저 구입해야 활약도 더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전후를 바꾸려고 하는 의도를 모르겠군요. 수상하네요.”
“전후를 바꾼 건 그쪽... 아, 아냐! 네 말이 맞아! 응, 그치! 우리가 먼저 신용을 보여줘야지! 당장 전쟁터로 고고 할게!!”
“어, 언니, 같이 가...”
백요와 흑요 자매로 대표되는 수만 명의 다크 플레이어들.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활동해온 그들이 뒤늦게 지옥행 급행 열차에 탑승했다.
대부분 템빨단과 거래를 시도했다가 덜미를 잡힌 사람들이었다.
훌륭한 화력으로 어그로를 끌고 화살받이가 되어 주리라.
***
“지크프렉터! 뭐하느냐! 정신 차리거라!!”
코크로 섬.
던전을 무너뜨리고 뛰쳐나온 헬가오와 치열한 공방을 나누던 네펠리나가 다급히 외쳤다.
마법을 발생시켜 자신을 보좌해주던 지크프렉터의 룬어들이 작동을 멈춘 까닭이다.
시선을 돌려 보니 가관이었다.
지상의 지크프렉터가 선 채 잠들어 있었다.
“이, 익! 괘씸한! 선 채 죽어도 부족할 판국에 선 채 자는 건 무슨 경우이냔 말이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나태의 저주가 발동하다니.
대악마급 육체를 빌려 강림한 헬가오의 강함은 혼자서 감당하기 다소 벅찼기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이다.
“그랜드마스터는 나한테 맡기고 전투에 집중해!”
지발이 발빠르게 대응했다.
레이더스에서 내려 방벽으로 세운 뒤 지크프렉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랜드마스터!!”
만약 전투 도중 잠들 거 같으면 우선 퇴각을 시도하는 게 지크프렉터의 기존 행동 방식이었다.
한데 낌새도 없이 잠들어버렸다고?
이런 경우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없...
“...어?”
불길함을 느끼던 지발이 화들짝 놀랐다.
“뭐, 뭡니까?”
잠든 줄 알았던 지크프렉터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개미라도 지나가요?”
진짜 뭐 하는 거지?
땅바닥만 쳐다보는 지크프렉터를 채근하던 지발이 지나간 월드 메시지를 문득 떠올렸다.
[무저갱에서 <봉인 된 칠악의 육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입니다. ‘뒤섞인 세계’에 분노가 덧씌워집니다. 마기의 농도가 짙어지며 악마들이 입는 페널티가 20퍼센트 감소합니다.]
...이런 내용이었지.
헬가오와 싸우는데 집중하느라 한 귀로 흘려 중요성을 망각했다.
“설마, 당신의 육체입니까?”
봉인 된 칠악의 육신.
여기서 말하는 칠악이 ‘칠악성 중 7악’이 아니라 ‘칠악성 중 누군가’를 뜻하는 거라면 6악 지크의 육신일 수도 있는 거다.
“알 수 없다.”
대답하는 지크프렉터의 표정이 괴로워 보인다.
“교감이 너무 약해서 그것이 나의 육체인지, 동료의 육체인지 불확실하다. 차라리 교감이 아예 없었다면 동료의 육체일 거라고 판단했을 텐데 이건 몹시 곤란하군. 불길하다. 나는 혹시 지크가 아닌 건가?”
“...”
싸우다 말고 갑자기 멈춘 이유가 자아 성찰 때문이었다고?
황당함을 느끼던 지발이 이내 지크프렉터라는 인물의 정체를 되새겼다.
그는 6악 지크의 ‘환생’이다.
전생의 기억을 지닌 채로 몇 번의 환생을 거듭해온 끝에 지금의 지크프렉터가 되었다.
6악 지크와 자신이 정말 동일한 인물인가에 대해 의문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났다. 너무 다른 삶들을 경험해왔다.
“만약 무저갱에서 발견 된 육신이 나의 것이라면... 매우 큰 문제다. 내가 나의 본체와 제대로 교감하지 못한다는 건... 지금의 나와 전생의 나는 별개의 존재라는 증거일 테니...”
지크프렉터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그때였다.
“야, 이 멍청아!!”
네펠리나가 꽥 소리쳤다.
“허구한 날 잠만 자더니 뇌가 녹아버린 것이냐! 헬가오의 마력이 섬을 둘러쌌는데도 무저갱에 있는 육체와 교감이 될 정도면 그게 당연히 네 몸이지 누구 몸이겠...! 윽? 응익!? 빠, 빨리! 빨리 와서 도우라구웃!!”
상황이 힘들어지자 눈물마저 글썽이는 네펠리나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해츨링에겐 위엄이 적었다.
지발이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고,
“음... 내가 너무 심하게 동요했군.”
빛을 잃고 죽어있던 지크프렉터의 눈동자엔 생기가 돌았다.
무려 수천 년 만에 육체를 발견한 것이다.
냉정했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했을 거다.
스릉.
지크프렉터가 사하란의 검을 뽑았다.
육체가 부담을 느낄수록 깊어지는 나태의 저주를 경계하느라 룬 마법으로 보조 역할만 담당해온 지크프렉터.
위대하여 그랜드마스터로 추앙 받았던 그가, 사하란을 도와 제국을 건국했을 당시 이상의 힘을 끄집어낸다.
후환을 고려치 않는 전력이었다.
사태를 어서 진정시키고 육체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파직! 파지직!!
붉은 검에 깃든 적기에 지크프렉터의 마력과 검기, 그리고 의지가 섞여 유형화 된다.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하는 기운의 주위로 7개의 룬어가 떠올라 맴돌기 시작했다.
룬어가 교차할 때마다 특정 단어가 조합되었고 단어가 조합됨에 따라 기운은 강해지고, 확장되고, 속성과 마법이 뒤섞여 과열됐다.
콰르릉!!
힘의 파동만으로 섬이 통째로 흔들린다.
화산이 폭발하고 바다는 해일을 일으켰다.
아스가르드에 반기를 들었던 칠악성 중 가장 고강하여 신들의 저주를 산 존재.
이전 세계의 최강자가 진심을 드러낸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발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실력으로 왜 맨날 도망만 다녔냐고.’
정확히 말하자면 ‘잠든 그’를 데리고 내가 도망 다녔던 거지만.
그 슬픈 나날과도 조만간 작별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