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1권 - 2화
로드는 태생부터 영웅이었다.
육체, 두뇌, 감각, 직감 모든 영역이 타고나길 비범했다.
에트날 명문무가의 후계자가 전설의 씨앗을 받아 잉태한 존재가 평범했다면 도리어 괴사였을 터다.
‘정말, 정말로 굉장한 걸 봐버렸지... 앗, 이런. 떠올려선 안 돼. 아버지께서 잊으라 하셨으니 잊어야해.’
로드는 많은 스승을 두었다.
각 분야 최고의 스승들이다.
당연히 보는 눈이 높았다.
어지간한 일을 보고 겪어도 성에 차는 경우가 드물었다.
부친의 행적을 쫓아 모험을 하면서도 그랬다.
그 지역에서 대단하다 일컫는 인물, 사건, 현상을 마주해도 로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새로운 인연을 쌓는데 의의를 뒀을 뿐이다.
한데 오늘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스승 데미안과 제드노스, 라엘라, 이사벨, 블란드, 베니야루 등등.
로드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템빨국의 실력자들이 제라툴에게 처참히 짓밟혔다.
새로운 차원의 힘이었다.
로드는 생전 처음으로 무력감에 짓눌렸다.
어린 시절 교황청에서 겪었던 위기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두려움에 빠졌다. 절망감마저 느꼈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구나 싶어 부모님께 죄송했다.
낯설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로드의 내면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어떤 본능을 일깨우는 경험이기도 했다.
특별한 건 아니었다.
단순히 생존 본능이었다.
로드가 너무 뛰어난 나머지 여태껏 개화하지 못했던 본능.
지극히 평범한 그것이 깨어난 순간 로드는 파격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죽기 싫다는 열망이 살기 위한 궁리로 직결되며 로드의 사고를 여태껏 없던 방향으로 확장시켰다.
바로 그때 나타난 하야테가 제라툴을 패퇴시키는 신위마저 보였다.
정신과 육체가 각성되어 있는 상태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영감을 받아들인 로드는 급격히 성장하고 말았다.
늘 보아왔던 풍경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고, 늘 마주쳤던 사람과 상황에서 새로운 배움과 발상을 얻었다.
그 모든 변화가 육체와 정신에 녹아들어 더 나은 신위를 발휘하게 만들었다.
‘와, 뭐지?’
무신의 추종자 토벌에 나선 템빨기사단.
기사단은 크게 12개 중대로 나뉘어서 템빨국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중 코크는 로드 중대에 속했다.
로드가 수백 명의 친위대를 거느렸다곤 하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로드의 호위를 맡은 것이다.
여기서 코크는 경악하고 말았다.
로드와 친위대의 실력이 눈에 띄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로드의 변화가 눈부셨다. 고작 며칠 만에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저번 주에 드디어 400레벨을 달성한 코크의 눈에도 결코 수준이 낮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300레벨 안 되지 않았나?’
아니 뭔데?
겁나 멋지잖아!
적을 썰어 넘기는 로드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코크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적에 비해 플레이어 세력이 너무 약한 것 같다고 느끼던 차에 새로운 가능성이 되어준 로드가 마냥 반갑고 기뻤다.
“어, 어? 왜, 왜 갑자기 껴안으세요?”
“응? 그야 왕자님이 너무 예뻐서~”
“으앗! 이러지 마요! 저도 이제 성인이라고요!”
“너 아직 16살이잖아! 내 눈엔 아직 애야! 더 끌어안을 거라고!”
“누, 누가 코크 경을 말려봐라!”
로드가 비명을 질렀지만 친위대들은 나서지 않았다.
코크는 그리드와 십공신 전원의 신뢰를 받는 인물이다.
작위가 있었고 권한은 작위 이상으로 막강했다.
그를 제지하기엔 친위대의 역량이 부족했다.
설령 역량이 있었어도 외면했을 터다.
로드를 품에 안고 뺨을 비비는 코크의 모습이 정겹고 보기 좋았으니.
그렇듯, 소란 속에서도 무신의 잔당들은 빠르게 토벌되어갔다.
대부분 한두 개의 비급을 익혔을 뿐인 추종자들의 수준으론 종횡무진으로 날뛰는 템빨기사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비단 로드뿐만 아니라 기사들의 수준이 너무 크게 올랐다.
특히 메르세데스의 검술이 ‘파멸적’인 위력을 담고 추종자들을 쓸어버리는 광경이 압권이었다. 10개의 비급을 익힌 추종자마저 그녀의 검에 목이 떨어져 죽었다.
여태껏 보여준 적 없던 파괴적인 모습이다.
역대 검성들의 상징인 무쌍검법을 비반에게 직접 전수 받고 새로운 기사도를 쓴 덕분이었다.
제라툴의 공로도 컸다.
***
인마대전의 전황은 치열했다.
적어도 번헨 열도와 무저갱의 전세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팽팽하게 유지됐다.
번헨 열도에선 십공신과 아레스가, 무저갱에선 브라함과 카일이 중심을 제대로 잡아주고 있었다.
도중 몇 번의 위기가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절묘하게 도착하는 원군이 연합군에 힘을 실어줬다.
“어딜!”
크리스가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한 이후.
후방으로 물러난 극검은 시야를 넓게 가져가고 있었다.
악마들 중 ‘암살’에 적합한 특성을 지닌 놈들이 아군 진영에 침입할 때마다 놓치지 않고 저격해 지휘관들을 지켰다.
극검은 자신이 거대한 무언가의 톱니바퀴가 된 기분을 느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새롭게 주어지는 역할이 신기할 따름이었고,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때마다 아군에게 보탬이 된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 중인 연합국 소속 플레이어 대부분이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현재 연합군은 거대한 유기체로 작동하고 있었다.
수천, 수억만 명의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데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전파한다.
국가, 인종, 세력, 종교, 사상, 장소, 시간을 초월해 하나가 된 감각이랄까.
외곽에서 혼자 활동 중인 플레이어조차 자신의 어떤 행동이 전쟁에 어떤 보탬을 줬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고, 큰 보람을 느꼈다.
뭔가에 홀린 심정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에 점차 더 몰입했다.
전쟁의 이면에서 활약 중인 책사들의 공로였다.
라우엘과 사마천을 비롯한 연합군의 뛰어난 책사들이 전황을 조율 중이었다.
그들이 연합국 소속 플레이어와 군대에 부여하는 역할과 임무 하나하나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만들었다.
그런 현상이 반복되고 중첩될수록 적군의 진영은 붕괴됐다.
신산귀모다.
거기에 절묘한 용병술이 보태졌으니 사람들은 여실히 느꼈다.
책사들의 존재감을.
그들에게 경의를 품게 됐다.
라우엘은 죽을 맛이었다.
접속 시간 내내 회의실을 지키며 작전을 짜고, 로그아웃 상태일 때는 접속 중인 책사들과 소통하며 용병술을 부리고...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한데 전쟁은 고작 이틀 차다.
‘이대로는 위태롭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질 거야. 흐름을 바꿀 무언가가 필요해.’
***
로그아웃한 영우는 식탁에 차려진 반찬을 대접에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그리고 밥을 넣어 비비며 TV 앞에 앉았다.
무저갱과 번헨 열도를 중계 중인 채널들을 찾아 화면 여러 개를 동시에 띄워놓고 대충 비빈 밥을 퍼먹었다.
워낙 경황이 없어 밥맛도 없었지만 끼니는 꼭 챙겨야했다. 체력 관리를 위해서다.
‘플레이어가 불리해.’
플레이어에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바로 접속 제한 페널티.
플레이어가 Satisfy에 접속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최대 16시간이다.
만약 이 한계 시간을 풀로 채울 경우 나머지 8시간은 접속 자체가 불가능하다.
Satisfy 내에서 3일 중 하루는 무조건 자리를 비우게 된다는 뜻.
랭커들의 공백 시간이 겹치면 인류는 손가락 빨면서 멸망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라우엘은 랭커들의 활동 시간이 겹치지 않게끔 일일이 조율했다.
또한 접속 제한 시간을 풀로 채우지 말고 2시간을 여유분으로 남겨두라는 가이드를 배포했다.
랭커들의 공백이 겹치는 사태를 최대한 방지하는 한편, 특정 위기 상황에 유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끔 5분 대기조를 꾸린 것이다.
그 대상엔 당연히 영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라우엘의 마음 같아서야 영우의 일정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영우가 접속 제한 시간까지 대장일에 집중해줬으면 하는 게 라우엘의 솔직한 바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우는 플레이어 최고 전력이다.
그가 특정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인류측엔 막대한 손실이 생길 여지가 컸다.
영우도 충분히 이해했다.
어렵사리 찾아와, 괴로운 얼굴로 사정을 설명하는 라우엘에게 기꺼이 협조했다.
“...미친.”
번헨 열도와 무저갱을 중계 중인 수십 개의 채널 중 6개.
각기 다른 구도를 보여주는 그 채널들을 한꺼번에 띄어놓고 시청하던 영우가 끝내 밥 먹는 것조차 잊고 넋을 잃었다.
브라함에게 매료된 것이다.
직계의 힘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막연히 강해졌겠구나 싶었는데,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저건 강해진 수준을 넘어서 차원이 달라진 격이다.
“하하... 다행이네...”
영우의 코끝이 찡해졌다.
홀로 강해지는 자신을 지켜보며 종종 씁쓸한 표정을 짓던 브라함의 모습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정말로 다행이야...”
수백 년 동안 마음고생 많았을 브라함이다.
20년 동안 마음고생 해본 영우는 그간 브라함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쯤 짐작하는 게 가능했다.
드디어 숙원을 이룬 브라함을 보자 자기 일처럼 기뻤다.
“음...?”
커피를 미리 한 잔 마셔둬야 할 듯하다.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영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물 앞에 서있는 화물 트럭에서 내리는 물건들이 심상치 않았던 까닭이다.
“캡슐?”
그것도 2대다.
뭐지? 하는데 툰이 나와 그들을 마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이탈리아에서 툰의 친구들이 찾아왔나?
앞으로 그들과 함께 지내려고 새로운 캡슐을 구입한 거고?
영우가 당장 달려 나갔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우에게 새로운 이탈리아인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캡슐의 주인은 놀랍게도 영우의 부모님이었다.
“너희 아빠가 걱정이 태산이지 뭐니. 사람들이 위기에 빠졌는데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느냐고.”
“험험, 태산까지는 아니고...”
“...그래서 Satisfy를 시작하실 거라고요?”
“응, 이참에 며늘아기랑 손주 얼굴도 보고 싶어서~”
“어허, 말조심 해! 며느리랑 손주를 왜 현실이 아니라 사이버에서 찾는 거냐고!!”
“Satisfy는 또 하나의 현실이거든요? 사이버라니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그러게 여보 어서 정정해요.”
“아니... 아니 난 현실 며느리를 갖고 싶을 뿐이라고...”
“기왕 Satisfy에서 먼저 생긴 거, 현실이랑 Satisfy 양쪽에 다 있으면 좋죠, 뭐.”
“Satisfy도 현실이라니까요?”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운 대화 내용이었다.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화를 나눴다간 손가락질을 당했을 거다.
정신 나간 집안 취급을 받거나 TV쇼에 출현해 장안의 화제가 됐을 터였다. 둘 다였을 가능성도 높고.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요즘 관점에서 봤을 때 영우 가족의 대화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Satisfy에서 혼인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이냐고.
“근데 계정 만드는 법은 아세요?”
“어젯밤에 지슈카랑 같이 캡슐방 가서 계정 만들고 기본 시스템까지 숙지했다.”
“...”
지슈카가 부모님과는 꾸준히 연락해온 건가.
역시 내게 미련이 크게 남은 듯하다.
당연히, 그런 식의 결말은 납득하기 힘들겠지.
수습할 필요가 있다. 기왕이면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건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우리들 관계의 올바른 엔딩을 위해서라면 중동으로 이민을 가는 것도 고려를...
‘헉?’
멋대로 범람하는 생각에 의식을 맡겼던 영우가 흠칫 놀랐다.
지슈카의 감정을 고스란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에게 놀란 것이다.
뭔가, 뭔가가 변했다...
타인의 마음이, 입장이 쉽게 이해되고 수용된다.
Satisfy에서도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 갑자기 이렇다.
‘...뭐지, 이거?’
딱히 특별한 변화는 아니다.
갑자기 초능력을 얻었다거나 하는 만화 같은 전개도 아니었다.
Satisfy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영우는 다만 그 경험들을 토대로 인지능력을 발달시켰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 높게.
그로 인해서 여태껏 어렵게 느꼈던 상황이나 관계에 대해서 해결책을 쉽게 떠올렸다.
스스로의 변화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음... 내가 그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오긴 했지.’
“지슈카가 매일 아침마다 오늘 하루도 파이팅이라고 이모티콘을 보내거든? 그게 벌써 몇 년째다. 어찌나 한결같은지 뭐냐. 허허, 지슈카처럼 예쁘고, 깜찍하고, 신의 있는 며느리를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영우야 엄마는 유라가 좋아. 지슈카는 외국인이라... 아니, 이제 한국인이지만... 어쨌든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조금 정서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어허! 지구촌이 Satisfy로 하나가 된 마당에 인종 차별을!”
“이게 무슨 인종 차별이에요? 이 양반이 어제 칼질 좀 해봤다고 정신줄을 놨나?”
“크음, 미, 미안하오. 내 말이 심했어.”
“영우야 너도 바쁘지? 우리도 바쁘니까 어서 올라가서 쉬어. 호호, 며늘아기랑 손자 실제로 볼 생각하니까 들뜨네.”
“...”
깊이 생각하기를 관둔 영우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께 좋은 아이템을 만들어드려야겠다고 다짐하면서였다.
어쨌든, 인마대전은 세계적인 Satisfy 붐을 일으켰다.
악마와 마물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인류의 모습이 쉬지 않고 방송을 통해 노출되자 어떤 자극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영우의 부모님처럼 인류측에 보탬이 되겠다며 뒤늦게 Satisfy를 시작한 사람의 숫자가 이틀 새 무려 수백만 명이었다.
이쯤 되면 오픈 초기의 유입률과 견줄 만 했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신규 유저 중에도 재능 있는 사람이 많았고, 템빨단을 비롯한 여러 조직들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장은 고사리 손이라도 빌리려는 심정이었다.
미래의 동량을 키우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