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13화 (71권) (1,403/1,794)

템빨 71권 - 1화

“지체했군. 뒷수습을 부탁하겠소.”

“그리드 잘 지내시게. 아무래도 내 신세는 망한 것 같으니 내가 보고 싶으면 그대가 탑으로... 우읍! 웁!!”

그리드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하야테가 비반을 데리고 떠났다.

소리도 없이 뛰어올라 어느새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비반의 호들갑이 무색할 정도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요란하게 난입했다가 볼품없이 패퇴한 무신과 대비되어 더욱 고상하게 느껴졌다.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 본 것은 전부 잊어라.”

...한데 잊으라 한다.

“예.”

템빨국에 충신 아닌 사람은 드물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리드의 최측근이었다.

그리드가 죽으라면 죽고, 잊으라면 잊는다.

메르세데스가 앞장서 대답하자 다른 모두가 예를 갖추며 복창했다.

“...”

피아로와 기사들이 메르세데스를 묘하게 바라보았다.

적기사 시절의 피아로가 데려왔던 소녀.

어느새 숙녀로 성장해 기사들의 왕이 된 그녀의 과거를, 기사들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순수하고 올곧은 아이였다.

재능과 성격 양면에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한데 지금은 사뭇 달랐다.

무신에게 닥치라고 했을 때의 사늘한 음성과 눈빛이 기사들의 뇌리에 완전히 각인되고 말았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 등골이 다시 오싹해졌다.

“대장, 저 아이 저대로 괜찮을까요?”

“음...”

아멜다가 걱정스레 묻자 피아로가 침음했다. 표정이 편치 못했다.

무신을 상대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용기와 신념.

메르세데스 고유의 성질이 그녀 자신을 위기에 빠뜨리는 순간이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거란 근심에서였다.

하지만 조언할 처지가 아니었다.

메르세데스는 의무를 다했을 뿐이니.

반면 자신은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드의 사자임에도, 메르세데스와 달리 그리드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뿐이다.

당시 상황은 하야테... 아니, 기억 안 나는 고인과 제라툴이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자신이 섣불리 나섰다간 오히려 방해가 될 거라고 판단해서 방관했다.

분명히 옳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피아로는 썩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제라툴에게 위축되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메르세데스와 사리엘이 부순 검기의 장막을 돌파한 순간 마주한 제라툴의 존재감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했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현장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메르세데스만 제외하고.

‘나 또한 당연히 나섰어야 옳았던 게 아닐까.’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는 건 순전히 핑계일 뿐, 사실은 겁을 먹었을 뿐이 아닌가.

자칫 만용으로 비치는 메르세데스의 성격이 그녀 자신을 위기에 내몰 거라고?

그게 뭐, 문제라도 되나?

기사와 농부가 주군을 위해 위기에 투신하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을.

‘나는 그 당연한 의무를 외면하였고...’

피아로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사랑하는 부인 베니야루가 손을 꽉 쥐어주었지만 부질없게도 몸이 떨리고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심마에 빠진 것이다.

그의 어깨를 그리드가 힘껏 붙잡았다.

“피아로.”

전투 중에 증명됐듯이 하야테, 제라툴, 메르세데스 등의 인지능력은 전투에 특화되어 발달해 있었다.

반면 그리드의 인지능력은 범주가 조금 더 넓다. 비반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행동했던 게 증거다.

그리드의 인지능력은 전투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아직은 호감이 있는 대상에게 국한되는 능력이지만, 주변 사람들의 변화와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단순히 눈치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사람의 심리와 상황을 추측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몹시 빠르고 정확하다.

깊은 유대를 다진 피아로의 심사를 읽지 못할 그가 아니다.

“쓸데없는 생각 마라. 그대의 판단과 선택은 만점이었다. 자칫 만용을 부렸다간 상황만 더 힘들어졌을 테지.”

“...예, 주군.”

그걸로 충분했다.

피아로의 시야를 좀먹었던 안개가 활짝 개며 혼란이 멎었다.

불신을 지운 그가 의욕을 품었다.

비반의 가르침과 조금 전 전투를 보고 얻은 깨달음을 어서 갈무리하고 싶었다.

그렇다.

피아로는 물론이고 메르세데스와 기사들 전원 아직 비반의 가르침을 체화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배움을 얻고 채 몇 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제라툴이 나타나 작금의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그들에겐 공부를 복기하고 터득할 시간이 부족했다.

열정에 찬 피아로의 눈빛을 읽은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레이단 시절이 떠오르네.’

검성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시절의 피아로.

그때의 그는 눈부시게 빛났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피아로, 기사들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도록.”

무신은 패주했으나 잔당들이 남았다.

숫자가 최소 20만 이상이다.

지상에 강림한 제라툴이 가장 먼저 한 짓이 23만의 추종자를 만든 것이었으니.

거기에 따로 데려온 추종자들도 반드시 있을 터였다.

실제로 삼제가 출현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예.”

전원 힘차게 대답했다.

추종자들과 삼제의 강함을 과거에 몇 차례나 체험하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색이다.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특히 아스모펠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스스로를 마주하게 됐다는 작은 변화만으로 아스모펠은 크게 성장했다.

게다가 조금 전 제라툴과 하야테의 전투에서 벼락같은 영감을 얻었다.

그리드는 보다 직관적으로 알았다.

그에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스탯이 2퍼센트씩 오르고 스킬이 진화했다.’

피아로, 메르세데스, 아스모펠뿐만 아니라 현장의 모두에게 적용된 사항이다.

심지어 로드 친위대도 말이다.

아무래도 최소 준네임드다 보니 재능 보정을 받은 듯했다.

물론 능력에 따른 차등은 있었다.

적기사단 출신들과 로드는 대부분의 스킬 레벨이 1개씩 오르고 주요 패시브 스킬에 수식언이 붙은 반면 그 외 인원은 스킬 경험치가 크게 오른 수준에 그쳤다.

어쨌든 비약적인 발전이다.

무신의 추종자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여태껏 없던 속도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

라인하르트는 평온했다.

무신의 침략을 당한 도시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제라툴의 패퇴가 워낙 빨라서 그렇다.

외곽에 갑자기 출현한 놈은 등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의 장막에 갇혀버렸고, 장막이 걷힌 뒤엔 또 금방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으니.

그 사이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인식할 정도의 소란은 없었다.

<무신의 최후를 그리는 그리드식 전투술>?Lv.고급 5

패시브

무기 착용 시,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이 38퍼센트 증가하고 모든 공격의 명중률이 21퍼센트 상승합니다. 또한 마법의 캐스팅 시간이 11퍼센트 단축됩니다.

★전투 대상이 신일 경우 모든 상승치가 10퍼센트 증가합니다.

★물리 공격력 특화, 혹은 마법 공격력 특화가 가능합니다.

★물리 공격력에 특화 시, 마법 공격력 증가 효과와 명중률 상승효과, 캐스팅 단축 효과가 비활성화 되는 대신 물리 공격력이 15퍼센트 추가로 증가합니다.

★마법 공격력에 특화 시, 물리 공격력 증가 효과와 명중률 상승효과, 캐스팅 단축 효과가 비활성화 되는 대신 마법 공격력이 15퍼센트 추가로 증가합니다.

‘패시브 스킬이 강화된 게 엄청 크네.’

그리드식 전투술에 수식언이 붙었다.

무려 무신의 최후를 그린단다.

메르세데스와 피아로, 그리고 기사들의 마스터리 스킬에 붙은 ‘무신의 패퇴를 목격한’이라는 수식언보다 훨씬 가치 높았다.

광오한 이름만큼이나 효과 상승폭이 엄청났다.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이 5퍼센트씩 오르고 명중률도 10퍼센트나 올랐으니.

전투 대상이 신일 경우 수치가 상승하는 효과까지 더해졌다.

‘사실 제라툴은 천사가 아닐까?’

이사벨과 아슈르 후작 등의 생존이 모두 확인됐다.

제라툴에게 직접적으로 죽은 사람은 적었고 대부분 중상에 그쳤다.

사람들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데미안과 제드노스, 라엘라의 분투 덕분이었다.

그리드의 대응이 워낙 빠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해서 제라툴은 괜히 와서 죽기만 하고 템빨국의 주요 인사들을 크게 성장시켜준 셈이었다.

...죽은 데미안과 제드노스, 라엘라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흠흠...”

제라툴에게 죽은 대가로 2시간 동안 부활 불가, 부활 후 12시간 동안 전투 불가라는 무시무시한 페널티를 입은 플레이어들.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그리드는 하야테의 조언을 상기했다.

극딜이 진리다.

이와 같은 하야테의 가르침은 그리드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드는 추억한다.

메테오가 떨어지는 검을 만들겠노라 꿈꿨던 시절을.

그땐 참 순수했다.

터무니없는 꿈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던 실망감과 깊은 절망감이 생생히 떠올랐다.

...아마 며칠을 우울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땐 젊었지.’

지금도 젊지만 아무튼, 지금의 그리드에겐 브라함이 있다.

순수했던 시절에 꾸었던 꿈이 실제 현실로 다가오는 중이다.

머잖아 메테오는 아닐지언정 디스인티그레이트를 꽂아대는 검을 만들게 될 거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멀지 않았다.

‘이번에 벨리알의 지팡이가 개변이 잘 된 덕분이다.’

벨리알의 지팡이는 본래부터 갓템이었다.

몇 안 되는 ‘필드 드랍’ 신화 아이템으로,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격력과 옵션 양면에서 뛰어난 위력을 자랑한다.

혹시 벨리알은 야탄의 숨겨둔 딸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생길 정도로 벨리알은 엄청난 보물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그 엄청난 지팡이를 개변시키자 추가 된 옵션 또한 대박이었다.

전개하는 마법을 최대 2개까지 증식시키는 옵션.

확률성이라곤 하나, 지력에 비례해 발동 확률이 오른다.

그리드 기준으로 매직 미사일을 쓰면 약 70퍼센트의 확률로 3개의 매직 미사일이 나갔다.

거기에 분사까지 덧씌우면 매직 미사일이 전설의 대마법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위력은 크게 떨어졌지만.

‘전개하는 마법의 등급이 높을수록 효과가 상승한다는 문구가 특히 압권이지.’

공교롭게도 기초 마법밖에 익히지 못한 그리드는 그 옵션의 효과를 체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브라함은 사정이 다를 터였다.

새롭게 태어난 벨리알의 지팡이는 가히 브라함을 위한 무기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다.

‘브라함이 디스인티그레이트를 쓰면 4~5개씩 추가로 나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무리 브라함과 지팡이가 사기라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최소 3개, 최대 4개 정도로 증식할 거라고 봐야 맞겠지.

그렇다.

브라함의 탐욕 단련 프로젝트 속도가 전보다 족히 3~4배 빨라졌단 뜻이다.

늦어도 내년 안에 디스인티그레이트가 깃든 탐욕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그때부턴 극딜이 진리라는 하야테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니, 지금부터 가능하다.’

그리드가 아직 설계 단계에 있는 드래곤 웨폰의 도안을 펼쳤다.

세부적인 옵션들을 고려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드래곤의 어금니라는 궁극의 재료에 위력을 맡기고 유틸성이 뒷받침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그 복잡한 도안을, 그리드가 수정하기 시작했다.

낙월검처럼 심플하게, 편의성과 위력을 증진시킨다.

‘그리고.’

탐욕의 새로운 활용법을 떠올렸다.

탐욕을 이용한 물리적인 마법의 구현.

하야테가 직접 조언했을 정도이니 충분히 효과적이리라.

그리드가 인벤토리에 있는 탐욕을 꺼냈다.

30개의 갓 핸드를 만든 이후 증식하도록 방치 중이던 탐욕.

벌써 6개의 갓 핸드를 추가로 만들 정도의 질량을 쌓은 상태다.

그것을 그리드가 허공 높이 날렸다.

빠르게 솟구친 탐욕 덩어리가 상공 1.5km에서 멈췄다.

딱 거기까지가 통제 가능 범위였다.

그리드와 탐욕의 거리가 1.5km를 초과할 경우 탐욕은 회귀본능에 따라 그리드의 인벤토리로 되돌아간다.

이것도 많이 늘어난 편이다.

의지 스탯이 오를수록 통제 가능 범위도 확장됐다.

‘빠르게 떨어져.’

갓 핸드를 움직일 때는 키워드가 중요하다.

그리드가 입력하는 키워드가 즉 갓 핸드의 의지가 되므로.

꽈아앙!!

지름 80cm의 탐욕 덩어리가 ‘빠르게’, 그리고 ‘떨어진다.’는 의지를 품고 낙하하자 지면이 박살나며 흔들렸다.

탐욕의 질량이 지금보다 클수록, 형태가 검 등의 위협적인 것일수록 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것이었다.

‘앞으로 보관 중인 탐욕은 인벤토리가 아니라 머리 위에 달고 다녀야겠네.’

1.5km라는 거리는 결코 짧지 않다.

탐욕은 물질이라 기척도 적으므로 상대방은 인식하기 힘들 거다.

‘의지 스탯을 꾸준히 단련하는 게 관건이겠군.’

아이템 옵션에 의지 스탯을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생각하며 다시 용광로 건설 작업에 착수하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접속 제한 시간이 2시간 남았다는 메시지였다.

라우엘의 당부를 떠올린 그리드가 로그아웃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