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19화
‘서, 설마 못 이기나?’
로제의 시선이 해안가로 향했다.
템빨골2를 상대로 벨레드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벨레드가 템빨골2보다 약해서가 아니다.
당연히 벨레드가 훨씬 더 강했다.
다만 문제는 템빨골2의 공간 왜곡 능력에 있었다.
쉬지 않고 위치를 바꿔가는 통에 벨레드가 유효타를 넣지 못했다.
그 틈에 템빨골2가 소환한 해골 병사들은 전선으로 진입해 마물들을 해치는 중이다.
상륙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포격을 날리는 템빨국 함대도 위협적이었다.
한때 신드롬을 일으켰던 템빨포.
유니크 등급을 기준으로, 포격 지점에 ‘4만 5천의 고정된 스플래시 데미지’를 입히는 수백 대의 대포가 벨레드는 물론이고 전장을 난타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주류 클래스로 소외받았던 수천 명의 포병 플레이어들이 템빨국을 만나 물 만난 고기마냥 날뛰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벨레드의 권능이 템빨포의 위력을 상쇄시킨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벨레드라고 해도 권능을 항시 발동시킬 순 없어서 포격을 전부 차단하진 못했다.
또한 포격에 신경 쓰느라 파마의 기운이 깃든 지슈카의 화살 세례엔 대응하지 못했다.
물론 벨레드도 바보는 아니었다.
포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몇 번이나 함대를 노리고 원거리 공격을 행사했다.
하지만 수인족 왕이 문제였다. 수인족 병사들과 함께 바닷속을 헤엄치다가 벨레드의 공격이 날아올 때마다 파도를 일으켜 위력을 반감시키는 식으로 훼방을 놓았다.
파괴의 잔재는 솔져가 이끄는 해군들이 몸으로 막기를 반복하며 어떻게든 포병들을 보호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적군의 조합이 완벽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적의 원군은 계속해서 증원되고 있었다.
급기야 템빨단 최강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유페미나가 전장에 합류했다.
심지어 울족으로 구성된 템빨마법사단을 이끌고 말이다.
울족의 공주 또한 네임드로 유명세를 떨치는 실력자였다.
로제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암중에서 모략을 짜 작금의 전황을 만들었을 라우엘이 웃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자 화가 솟구쳤다.
““이놈들이 정녕...!””
화살과 포탄으로 이루어진 융단폭격에 마법 폭격까지 추가되자 벨레드의 얼굴도 대춧빛으로 물들었다.
분위기를 보아 머잖아 2페이즈에 돌입할 눈치였다.
아직 그리드나 그의 사도들이 등장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려 13위 대악마가 병력에 찍어 눌리는 비정상적인 광경을 보면서 로제는 직감했다.
‘이거 진짜 지겠는데?’
기껏 악마가 되고도 패배부터 맛보는 건가?
한 번쯤은 이겨 보고 싶었건만...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린 로제는 타인을 원망하지 않았다.
기껏 전쟁을 일으키고도 전력에서 밀리는 지옥군도, 자신을 적대하며 앞길을 막아선 연합군과 플레이어들도.
로제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자신이 매번 패배와 실패만 거듭하는 이유?
결국 자신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고 판단했다.
갈 길이 멀게 느껴졌다.
‘아 몰라. 언젠가 한 번쯤은 이겨보겠지.’
다만 그 순간이 지금은 아닐 뿐.
심지어 전쟁 기한은 아직 32일이나 남았다. 기회는 많다.
당장은 패배를 받아들인 로제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임은 즐기는 것이라는 본질을 떠올리자 머리가 상쾌해졌고 몸놀림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어떤 깨달음의 영역이었다.
그녀가 발현하는 마법의 수준이 한 차원 높아졌다.
발현 속도가 미세하게 빨라졌고 조합의 효율성이 급격히 상승했다.
수십만이 얽혀있는 전장에서 눈에 띌 정도였다.
그게 문제였다.
광범위로 분산되어 떨어지던 지슈카의 화살이 일순 한 점으로 집중됐다.
여태껏 없던 위력을 품고 단 한 명, 로제를 노리고 쏘아졌다.
무려 다섯의 대악마와 수백의 악마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이다.
로제 입장에선 어처구니없는 불상사였다.
하지만 웬걸.
그녀는 기뻤다.
‘나,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 수도?’
여태껏 몰랐던 자신의 잠재력에 만족하며 화살에 꿰뚫리고, 선혈을 흩뿌리며 무너지는 그녀의 시야가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바로 그때.
[바알의 권속들이 원군으로 참전합니다.]
[지옥군의 사기가 크게 오르고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무저갱에서 <봉인 된 칠악의 육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입니다. ‘뒤섞인 세계’에 분노가 덧씌워집니다. 마기의 농도가 짙어지며 악마들이 입는 페널티가 20퍼센트 감소합니다.]
‘XX.’
하필 내가 죽었을 때 이딴...
기껏 미소 지었던 로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매는 웃는데 눈매는 사나워 기괴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새롭게 출현한 악마와 마물들이 그녀의 시체를 짓밟고, 뒤덮었다. 허망하게 잿빛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
같은 시각, 라인하르트.
템빨국은 예상보다 빨리 열린 전쟁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계획한 것보다 3배 이상 많은 기술자를 소집해 용광로의 건설을 서둘렀다.
그리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 템빨국이다.
거국적인 도움 덕분에 그리드는 새로운 신검의 설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창조 스킬을 사용했다.
어쩌면 두 번 다신 얻지 못할 드래곤의 어금니를 재료로 만드는 검이다.
창조 스킬을 아낄 계제가 아니었다.
설계도의 여부가 아이템 제작 속도에 영향을 끼치는 점도 고려해야했다.
그리드는 빨리 무기를 만들고 전쟁에 참여하고 싶었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전쟁의 상황이 그를 다소 초조하게 만들었다.
특히 브라함이 걱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다른 사도를 파견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사리엘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건 여전히 위험성이 높았고, 메르세데스와 피아로는 검탑에서 수련 중이었다.
포털이 집중적으로 열린 지역들을 찾아다니며 적군을 궤멸시켰던 지크프렉터, 지발 듀오와 네펠리나는 코크로 섬으로 이동했다.
여태껏 ‘마족’의 육신을 빌려 출몰했던 헬가오가 처음으로 대악마급 육신을 뒤집어쓰고 출현했다는 급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세계의 경계가 무너진 것이 어떤 영향을 끼친 듯했다.
놈이 섬을 탈출해 활개를 칠 경우 난감했기에 미연에 퇴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상황이 생길 것 같다.’
인마대전이 열리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한데 벌써 곳곳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새로운 신검을 만든 뒤에 전쟁에 참여하려고 했던 그리드의 계획은 욕심으로 그칠 공산이 컸다.
“...?”
유대를 맺고 있는 브라함의 상태를 주시하며 작업에 집중하던 그리드가 문득 석상처럼 굳었다.
무저갱과 번헨 열도 양측에서 적의 원군이 쏟아져 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탓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부 대악마가 포탈을 통해 나타났다는 소식이 뒤따랐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도무지 욕심을 부릴 상황이 아니다.
우선 진정하자.
냉정하게 생각해서, 새로운 신검이 없더라도 지금의 나라면 안정적으로 활약할 수 있다...
마음을 추스른 그리드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뱀파이어 도시의 영주 놀, 뱀파이어 군단을 이끌고 무저갱에 원군으로 참전. 영주의 권한으로 플레이어에게 퀘스트를 부여하고 군대를 꾸린 것으로 추정>
<발할라 소속 봉드레, 전 7대 길드 소속이었던 플레이어들을 설득해 번헨 열도에 참전>
<레이단 영주 크리스, 최소한의 방위 병력을 남기고 출정. 목적지는 무저갱>
<버서커 랭킹 1위 아스카, 블랙테디와 함께 사병을 이끌고 남하 중인 것으로 파악. 번헨 열도로 향하는 듯>
<백요, 흑요 자매가 협상을 요구.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 구매 권한을 조건으로 템빨국 소속 원군으로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힘>
<대진 그룹 소속 랭커 50명 무저갱에 원군으로 참전>
<중부에 진입한 야탄교 행렬, 대기 중이던 포식이불족발에게 유인당해 미로 던전에 구속>
<아크 왕국에서 학살을 벌인 정체불명의 데스나이트 아프리카의 표범에게 격침. 표범 남하. 목적지 번헨 열도로 추정>
<중부에 출현한 33위 대악마 휴렌트와 조우. 전투 돌입. 휴렌트 선전. 손등에 룬 확인>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했던 로이먼 무저갱 도착. 하스터도 함께 참전>
<대륙 전역에 잠입 중인 템빨 그림자단, 서부에서 아그너스의 출현을 확인. 페이커가 아그너스 격살>
<진 그룹 소속 랭커 180명 남부에서 카츠에게 합류. 카츠 번헨 열도로 남하>
<타이탄에서 대규모 메스텔레포트 발생 확인. 대현자 스틱세이의 것으로 추정. 동대륙에서 8만 이상의 원군을 지원받은 듯>
<일부 포탈 파괴 확인. 지옥에서 활동 중인 유라와 크라우젤의 영향으로 추측>
<성녀의 남하 행렬 규모가 계속 확장 중인 것으로 확인. 원인불명>
새로운 소식이 밀어닥쳤다.
내용은 다양했고,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덕분에 그리드는 한동안 잊었던 사실을 상기했다.
혼자가 아니다.
나의 지난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었다...
감격에 손마저 떨린다.
안도하며 미소 짓는 그의 등골이 이내 오싹해졌다.
<템빨국 전역에 대규모 무신의 추종자 출몰. 아군 학살 중>
<파트리온 요새에 삼제 출현. 성벽 붕괴 확인. 아슈르 후작 생사여부 불명>
<라인하르트 근교에 신원미상의 적 출현. 제드노스, 라엘라 사망. 부활 응답 없음>
<템빨신교 궤멸. 데미안 사망. 부활 응답 없음. 이사벨 생사여부 불명>
<블란드와 베니야루, 농민들과 함께 원군으로 출정>
<로드 왕자, 300명의 여자친구와 원군으로 출정>
“...!”
앞선 소식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소식이 범람했다.
그리드는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곧장 하늘 위로 날아올라 외성벽을 시야에 담고 순보를 썼다.
그와 동시에.
[칭호 <최초의 아빠> 효과로 ‘로드’의 위기를 감지합니다.]
[<최초의 부성애>가 발동합니다. 20초 동안 이동속도가 80퍼센트 상승하고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로드!!”
그리드의 얼굴이 악귀흉살처럼 일그러졌다. 시야를 확대해 로드의 위치를 파악하고 곧장 순보를 썼다.
“...!”
위치가 바뀌자마자 공격이 날아왔다.
여태껏 체험해본 적 없는 무게가 깃든 공격이었다.
피하는 게 좋다고 직감하지만, 등 뒤엔 로드가 있다.
꽈아아앙!!
“끅...!”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낸 그리드의 몸이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았다.
원치 않게 무릎을 굽힌 그가 이를 갈며 상대방을 노려봤다.
무신 제라툴.
있어선 안 될 존재가 뒷짐을 쥔 채 서있었다.
그리드의 검날 위에 얹어놓은 종아리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내 공격을 막아...? 치우 그 저급한 가짜의 인정을 받을 만하군.”
“네놈...!”
그리드의 두 눈이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제라툴의 등 뒤로 펼쳐져 있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이사벨과 블란드, 그리고 교인들과 농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질린다.
이성을 잃은 그리드가 버프 스킬을 곧바로 몸에 둘렀다.
하지만 그가 나설 기회는 없었다.
“내가 그대를 찾아왔던 이유가 뭔지 방금 기억났지 뭔가.”
툭.
그리드의 어깨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한 권의 책이었다.
정성들인 필체로 <망자 언어 해독본>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그거 받고 물러나게.”
탑의 결사 비반.
본래 세상에 나서선 안 될 존재가, 검기를 온전히 드러낸 채 만인 앞에 나선다.
얼굴엔 짙은 혐오와 노기가 서려있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망령이 들었다 하더니, 과연 하야테 님의 말씀이 옳았구만.”
검기의 장막이 펼쳐졌다.
비반과 제라툴을 세상과 유리시키는 장막이었다.
“그리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살아가시게.”
마치 마지막 인사 같아서, 그리드는 장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