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17화
전 흑마법사 랭킹 1위.
플레이어 최초로 악마가 된 로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그녀가 야탄의 종으로 활동했을 당시 야탄교가 몹시 힘든 상황이었음을 높이 평가 받았다.
종종 바퀴벌레 취급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드와 템빨단을 적대하고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대악마 후보까지 올랐으니... 베라딘보다 훨씬 나은 실력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화르륵!
로제가 악마가 되고 얻은 권능은 정신계에 간섭하는 마력과 지옥의 업화다.
크게 특별할 건 없다.
일부 악마들의 사기적인 권능과 비교하면 오히려 초라했다.
그나마 위안인 점은 흑마법사 시절에 쌓아올린 마법들을 고스란히 계승했다는 점.
덕분에 플레이어의 수준은 가뿐히 초월한다.
‘악마라고 해서 다 바보는 아니라 다행이야.’
전쟁터로 변한 번헨 열도.
인간들을 학살하며 질주하는 로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악마와 인류의 전반적인 실력 차이를 고려한 전방위 침략 작전.
대륙 전역에 33,333개의 포탈을 동시다발적으로 생성해 마물과 마족들, 또한 소통이 안 되는 일부 대악마들을 유도하고 번헨 열도와 무저갱에선 주력들이 양동을 펼친다...
이 작전은 극히 소수의 인간을 견제하기 위해 수립된 것이다.
지옥 전역에 악명을 떨친 그리드와 그의 사도들, 그리고 유라와 최근 급부상하기 시작한 루비, 크라우젤...
선봉대의 통솔을 맡은 제13위 대악마 벨레드는 그 한줌도 안 되는 인간들의 힘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데 모이지 못하도록 전장을 확대했다.
대부분의 악마와 상당수의 마물이 인간보다 강하므로 실행할 수 있던 작전이다.
고작 인간들을 상대로 무슨 작전까지 세우냐며 조롱하고, 반발하는 악마들이 많았지만 무의미했다.
벨레드는 광란의 왕.
늘 화가 나있는 그의 폭력성은 정상의 범주를 넘어섰다. 동족이라도 거침없이 죽여 버렸다.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악마들에게 가장 원초적인 법칙이자 공포로 다가갔다.
반론은 금세 사그라졌고, 작전은 보다시피 강행되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역시 이기는 싸움이 재미있다니까?’
번헨 열도를 지키는 인간 세력은 발할라를 주축으로 삼은 연합군이었다.
병력이 수십만으로 상당했지만 지옥군의 숫자는 그 이상이었다.
경계해야 할 네임드 NPC는 11명의 검호급 기사와 2명의 대마법사.
하이랭커는 고작 50여 명.
그들 중 악마와 1대1로 우위를 점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 한 명.
‘통솔하는 병력에 비례해’ 강해지는 군신 아레스가 연합군의 총사령관이라도 맡은 건지 압도적인 무용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심지어 엄청난 템빨까지 자랑했지만 24위 대악마에게 발이 묶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진 못했다.
죽은 네비로스의 후임으로 24위 권좌를 차지한 대악마였다. 신예로 전임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는데 아레스를 상대로 우위를 점했다.
아레스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연합군 병사들이 죽어 나갈수록 약해지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로제는 여유가 넘쳤다.
앞세운 마물과 마족들이 적의 마법과 화살을 막아준다. 강력한 악마들의 틈에 섞여 일방적인 학살을 행사한다. 안정감마저 들었다.
특히 플레이어를 죽일 때는 오싹한 쾌감을 느꼈다.
타인이 피땀 흘려 쌓아올린 경험치와 아이템을 손쉽게 약탈하는 것이다.
타인의 노력을 짓밟고, 희생시켜 성장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악마가 된 보람이 있다고 할까.
자신을 비난했던 위선자들에게 되갚아주는 기분이라 통쾌했다.
‘사람마다 가는 길이 다른 법이잖아. 내 길도 존중 받아 마땅하다고.’
자기들도 악마가 될 수 있었으면 됐을 거면서.
가식쟁이들 같으니.
“로제...!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보면 몰라? 악마잖아?”
죽는 순간까지 비난을 퍼붓는 플레이어를 일부러 참혹하게 죽인 로제가 손끝에 묻은 피를 핥았다.
악마는 인류를 식량으로 삼는다는 설정 때문일까.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가 그녀에게 온갖 버프를 부여했다.
생명력과 마나가 회복되는 건 기본이다.
“꺄핫! 최고야! 정말 최고라고!!”
여태껏 몰랐던 전능감이 황홀하다.
신세계에 발을 들인 감각이다.
신이 된 그리드가 느꼈을 쾌감은 이보다 수백 배 더 컸겠지?
그가 과연 망가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로제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내가 확신하는데 그리드는 조만간 폭군이 될 거야.’
여태껏 귀족의 작위를 얻은 플레이어 상당수가 권력에 도취되어 타락했다.
그들과 비교하면 그리드는 정말이지 성인군자나 다름없었지만... 그 위선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까?
신이 되어 차원이 다른 힘과 권력을 얻었으니 그리드도 조만간 남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어서 보고 싶네. 점차 변해가는 그리드에게 휘둘리며 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
너무 기대된다.
그때가 되면 내가 그리드의 배에 탈 수 있지 않을까.
황홀하게 웃던 로제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전쟁의 무대가 되고 있는 번헨 열도의 초입.
그 뒤편에 펼쳐진 수평선에서 수십 척의 군함이 나타났다.
멀리서 봐도 화려하고 거대한 군함들이었다.
소속을 과시하는 듯했다.
드넓은 대양에도 자신들의 적수는 없다는 듯이.
악마의 안력으로 군함에 걸린 기를 확인한 로제가 납득했다.
‘템빨국의 해군이구나.’
세이렌으로 움직인 동향을 포착했었다. 코크로 섬으로 회군하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눈치다.
마침 정면의 지평선에서도 새로운 병력이 나타났다.
깃발의 종류가 다양했다. 연합군의 원군이다.
선두에 있는 템빨단원들과 발할라의 장군들이 눈에 띄었다.
‘지옥 원정팀도 복귀한 모양인데 상태가 안 좋네... 삼장군의 대장격인 럭이 부재에다가 십공신은 레가스랑 폰... 그리고 지슈카가 전부인가?’
이곳에 있는 대악마만 다섯이다.
하이랭커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악마가 수백이었다.
고작 저 정도 전력으로 이들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진심으로?
가소로워 콧방귀 뀌는 로제의 뇌리에 스산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전장의 모든 악마들에게 전달되는 벨레드의 사념이다.
““전열을 유지하고 군주들은 해안을 방비해라.””
‘굳이 해군을 경계한다고?’
로제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평선을 등진 채 달려오는 적의 원군 중엔 명색이 전설이 있다.
궁성 지슈카 말이다.
그녀야말로 현재 전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였다.
로제가 알기로 템빨국 해군엔 딱히 강한 인물이 없었다.
솔져라는 하이랭커가 그나마 최고 전력.
군인이라는 직군 자체가 다소 폐쇄적인 경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명성이 매우 낮다.
30위대 대악마에게 초살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한데 벨레드는 해안가에 전력을 집중하려하고 있었다.
지슈카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설사 수인족 왕이 참전했어도 큰 위협은 아니야. 전열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조언하고 싶은데.’
말을 꺼내는 즉시 머리가 박살날 거다.
벨레드는 너무 흉포해서 상대하기 꺼려졌다.
로제가 우물쭈물하는 그때였다.
화르륵!!
지슈카의 상징이 하늘을 뒤덮었다.
동쪽 신의 환영이 전장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자 섬을 둘러싼 바다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 지독한 열기는 전조에 불과했다.
곧 불의 비가 쏟아졌다.
위력이 과거와 차원이 달랐다.
특히 적중률이 사기적인 수준이었다.
각종 지형지물로 엄폐물을 만들고 마물을 방패로 삼아도 몸 어딘가에 반드시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고통에 얼굴을 구긴 로제가 어떤 전문가의 분석을 떠올렸다.
그리드의 시야 범위 스킬과 지슈카의 시야 범위 스킬을 비교했던 분석이다.
그는 지슈카의 시야가 인공위성을 닮았을 거라고 추측했었다.
당연히 허황된 해석이라고 믿었다. 망상에 가깝다고 치부했다.
한데 막상 겪어보니 전문가의 분석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를 신뢰할 수 없던 시대는 이제 정말로 끝난 것이다.
““저것도 템빨신의 사도인가? 지뢰가 양쪽에 심어져 있었군...””
벨레드조차 지슈카의 융단폭격을 좌시하지 못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엔 정확성과 파괴력이 너무 뛰어났다. 전황을 뒤엎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파마의 화살에 의해 내부가 진탕됩니다.]
[마기가 흩어집니다. 육체와 마력이 마기의 수혜를 입지 못하게 됩니다.]
[마기가 다시 회복할 때까지 모든 능력치가 소폭 하락합니다. 마법과 스킬 사용에 문제가 생깁니다.]
[방어력이 소폭 하락합니다. 회복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이게 무슨...!’
종족이 악마로 바뀐 로제의 외모는 전반적으로 날카로웠다.
덩달아 눈매가 사나워졌는데, 이 순간 인간 시절과 별반 차이가 없을 만큼 동그랗게 변했다.
지슈카의 화살이 몸에 박힐 때마다 중첩되는 상태이상에 경악해서다. 급소마다 집중적으로 전개해놨던 마력 실드가 제멋대로 흩어지고 있었다.
“마물들이 힘을 못 쓴다!”
“지금이다! 몰아붙여!!”
패색이 완연했던 연합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지슈카가 내린 불의 비 덕분에 상처와 체력을 회복한 그들의 몸놀림이 날래고 과감했다.
반면 지옥군은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렸다.
급이 낮은 마물과 마족들은 잿더미로 산화하거나 중상을 입고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주들은 대열을 지켜라. 해안은 내가 맡겠다.””
결국 벨레드가 직접 나섰다. 전장 가운데 잠자코 서서 지휘하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아공간에서 창을 꺼내 쥐었다.
동시에 권능을 발현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불의 비가 일제히 멈췄다.
거짓말 같은 광경이었다.
재생 중인 영상을 그대로 정지시킨 듯했다.
주인 없는 물건을 조종하는 권능.
주인의 손을 떠난 투사체도 당연히 그의 권능을 피해갈 수 없다.
과거 그리드의 검기가 그런 식으로 공략 당했었다.
투콰콰콰콰콰쾅!!
정지했던 장면이 역재생 된다.
허공에 멈춰있던 불의 비가 일제히 포물선을 그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전장 곳곳에 숨어 전쟁을 중계 중이던 기자들과 스트리머들이 얼어붙었다. 시청자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잠시 넋을 잃은 것이다.
그 탓에 시청자들은 불의 비가 다시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만 보았다. 반대편까지 도달해 연합군의 원군을 초토화시키는 장면은 소리로만 유추했다.
투쾅-!
벨레드는 해안가로 몸을 날렸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 킬로미터를 건너뛰었다.
동트기 직전의 새벽인 타이탄과 달리 석양에 물든 번헨 열도.
황금색 바다를 미끄러지며 다가오는 수십 척의 군함을 홀로 마주보고 선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화에 차 일그러져 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게 가라앉은 상태다. 폭급한 성정을 인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신중하게 만드는가...
로제를 비롯해 지성을 갖춘 악마들 모두 의문에 빠졌다. 평소와 다른 벨레드의 모습을 토대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설마 그리드가 온 건가?”
기자들과 스트리머들이 기대감을 품었다.
크게 무저갱과 번헨 열도로 나뉜 전장.
둘 중 그리드가 출현하는 지역이 많은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꽈아앙!!
벨레드가 창을 힘껏 내리쳤다.
석양에 물들어 금처럼 빛나던 해수면이 반으로 갈라지며 새카만 속을 드러냈다.
수십 척의 군함이 위태롭게 흔들렸고, 충격파를 정면에서 얻어맞은 네 척의 군함은 산산이 조각나 침몰했다.
초전박살.
그리드에게 패배를 안겼던 거물답게 위력적인 무력행사였다.
-어? 저거 뭐임?
할 말을 잃고 있던 시청자들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요동치는 파도 너머에 고요히 도사리고 있는 붉은 안광이었다.
그것이 단순한 불빛이 아닌 안광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이유는, 벨레드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안광이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방송국 카메라들과 스트리머들의 시점이 급격히 확대됐다.
그리고 포착했다.
어느새 벨레드의 등 뒤에 나타난 붉은 안광의 주인을.
새카만 로브를 걸친 이였다.
언뜻 드러나는 백골에 기이한 마법진과 주술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 탓인지 위압감이 상당했다.
리치.
소위 언데드의 왕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전장에 난입한 순간이었다.
대악마와 나란히 선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워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의 원군 같았다.
착각이었다.
벨레드의 창이 리치의 안면을 관통했다.
아니, 리치가 남긴 칠흑의 잔광을 관통하고 흐트러뜨렸다.
리치의 위치가 10미터 후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질적인 장면이었다.
이동했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으니까.
““네게서 언젠가 맡았던 냄새가 난다. 내게 사냥 당했던 인간. 지금은 템빨신이 되었다지. 놈의 사도들은 면면이 대단하다 들었는데 한낱 리치도 있을 줄은 몰랐군.””
[주군을 논할 땐 예의를 갖추어라...]
시청자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언데드답지 않게 위압적인 풍채와 모든 행동에 검은 잔영을 남기는 화려한 이펙트.
거기에 섬뜩한 음성까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저 리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극점 마법의 학센, 혹은 메아리 마법의 제시카...
전설적인 거물들을 떠올린 시청자들이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그때.
쿠콰쾅!!
전장 한복판에 떨어진 화살폭격에 의해 폭풍이 휘몰아쳤다.
리치가 깊이 눌러 쓰고 있는 로브가 펄럭이며 벗겨졌다.
그러자 드러나는 이름은 ‘템빨골2’였다.
-아...
손에 땀을 쥐고 있던 시청자들이 일제히 탄식했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
아스가르드.
“사람들이 나를 부른다.”
황금 구름 위에 앉아 명상 중이던 무신 제라툴이 몸을 일으켰다.
지상으로 내려갈 명분은 충분했다.
전쟁에 휩쓸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힘.
그 힘의 형상이 바로 무신이다.
예로부터 전쟁과 기아는 제라툴을 자유롭게 만드는 가장 훌륭한 원동력이었다.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 기회였다.
“하지만 그 전에... 가짜 신부터 징벌하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