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16화
두근!
참혹하게 뭉개졌던 심장이 다시 박동한다.
수축과 이완이 지난 수백 년과 다르게 빠르고, 힘차다.
심장이 수축하는 순간 전신의 혈맥이 일제히 맥동했다.
급류를 타듯 빠르게 순환한 혈액이 심장을 소용돌이 삼아서 빨려 들어갔다.
브라함의 정수리가 오싹해졌다.
전신의 혈액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 심장이 그것을 다시 토해내자 마력과 피가 뒤섞인 탓이다.
피와 마력의 일체화.
일체화를 통한 강화.
수백 년을 잊고 지냈던 쾌감이 그의 뇌리를 구멍 뚫듯 관통한다. 의식을 전에 없던 수준으로 각성시켰다.
“하아...”
황홀경에 빠진 브라함이 깊은 숨을 토했다. 홍옥 같은 눈동자의 초점이 잠시 흐릿해졌다.
얼굴에 묻은 피와 대조되어 더욱 하얗게 보였던 두 뺨에 희미한 홍조가 물들자 시청자들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쾌락에 취한 브라함의 모습이 상상해본 적 없을 정도로 요염해서다.
상황을 중계해야 할 각국 방송사의 앵커가 얼굴을 붉힌 채 넋을 놓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두근!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브라함은 수백 년 동안 갈망해온 감각을 만끽했다.
심장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할 때마다 일체화되는 피와 마력.
그로 인해 강화되는 마력과 육체의 변화를 하나부터 열까지 놓치지 않고 음미했다.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감각.
이건 마약이다. 오로지 선순환만 존재하는.
어머니께서 낳아주신 완벽한 육체와 마력을 연구 끝에 강화시켜 얻은 특권이다.
브라함은 자신이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수많은 동족을 희생시켜 연구해 얻은 값진 결과물을 다시 누리게 되었음에 기뻤다.
원치 않게 실험체가 되어 죽었던 놈들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그 쓸모없는 놈들이 여태껏 살아있었어 봤자 전혀 도움이 안 됐을 터이니. 죽어서나마 도움이 되었음에 감격하며 기뻐할 테지.
파지직!
광증에 가까운 오만에 휩싸인 브라함의 머리 위로 전류가 휘몰아쳤다.
대단위 전격 마법 기가 라이데인의 전조다.
한데 전광의 상태가 기이했다.
푸르고, 노랗게 명멸하지 않고 붉게 물들었다.
직계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인간으로 전락한 뒤 공부해온 마법과 이 순간 되찾은 직계의 힘이 혼합되어 마법의 성질 자체가 바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도하면...’
의식의 각성 상태다.
브라함의 두뇌는 여태껏 없을 정도로 활성화 되어있었다.
초월의 영역이었다.
되찾은 권능과 마법을 합일시켜 새로운 술식을 실시간으로 떠올리는 수준이다.
파지직!
극검과 카일, 공작들과 기사들, 병사들과 플레이어들.
영혼 군단과 싸우며 전장 곳곳에 고립된 그들의 주변에 물감처럼 뿌려진 피가 일제히 전격을 머금는다.
본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기가 라이데인이 피를 매개삼아 역방향으로 솟구쳐 올랐고 그에 휩쓸린 영혼 병사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마리로즈.”
믿기지 않는 이적을 행사한 브라함이 상공에 올라있는 여인을 부른다.
굳이 고개를 들어 올려보진 않았다. 시선을 가미긴에게 고정시켜두었다.
가미긴을 경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현재 그는 전장에 흐르는 마나와 대지에 뿌려진 혈액 전체를 자신의 감각으로 삼고 있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가미긴의 행동을 관측하는 게 가능했다.
그럼에도 마리로즈가 아닌 가미긴을 주시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마리로즈를 올려 보기 싫어서다.
설령 마리로즈가 신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가 올려 봐도 좋을 대상은 세상에 단 둘.
낳아주신 어머님과, 새 삶을 준 그리드뿐이기에.
“썩 꺼져라. 오늘은 네 공로를 치하하여 순순히 돌려보내 주마.”
마리로즈는 어머니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여 낳은 딸이다.
처음부터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물며 브라함은 그녀에게 모든 힘과 권리를 빼앗겼다.
그러므로 더욱 더 원망하고 증오했다.
그녀로부터 힘을 돌려받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브라함은 확신한다.
이 감정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거라고.
“너무 건방지게 굴지는 마렴.”
마리로즈는 점차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에 저항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형제가 그새 기가 살아서 떠드는 모습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불쾌하진 않았다.
어머님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혹 앞뒤 분간 못하고 덤벼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본분을 망각할 정도로 미친 거 같진 않았으니.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대로 등 돌려 떠나려하는 그녀에게 브라함이 뇌까렸다.
“나는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로 나태의 저주를 극복했다.”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내가 너보다 낫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다.
수백 년 전엔 저런 태도를 마냥 가소로이 여겼었다.
한데 지금은 제법 그럴 듯하다. 하찮게 여기기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노력이라기 보단 광기지. 혈족을 희생시켜서 거둔 성과잖니.”
다소 감정적으로 대하게 된다.
당장 돌아가 관에 눕히고 싶은 몸을 어떻게든 추슬러 대꾸하게 되었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 챈 브라함이 환희에 찼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에 설 수도 있음을 깨닫고 패를 꺼냈다.
“내가 힘을 되찾았으니 네 저주도 해결해줄 수 있다.”
하니 꿇어라.
평생토록 너를 좀먹어온 그 지독한 저주를 제발 해결해 달라고,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해라.
그런 뜻이 담긴 눈빛을 보내는 브라함을.
“...그 이상 지껄였다간 죽일 거야?”
마리로즈가 노려보았다.
잠이 달아난 것처럼 사늘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살기까지 느껴졌다.
“...?”
예상치 못한 반응에 브라함이 당황했다.
잠시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고민조차 없잖은가.
다소 이해가 안 됐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리로즈는 평생토록 나태의 저주에 시달렸다.
속된 말로 영혼을 팔아서라도 저주를 떨쳐내고 싶을 터였다.
어쩌면 영겁 동안 계속 될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를 이토록 매몰차게 차버릴 줄은 몰랐다.
‘평생 고통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손아귀에서 놀아나긴 싫다 이건가?’
브라함이 쯧, 혀를 찼다.
그가 던진 미끼에 마리로즈가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진실은 마리로즈 당사자밖에 모를 것이다.
콰르르릉!!
붉은 번개의 연쇄가 전장을 헤집고 있었다.
마리로즈가 안개로 흩어져 사라진 시점엔 이미 전장의 모든 인간들이 위기에서 구출됐다.
인간들을 둘러싼 채 공격하던 영혼 병사들이 모조리 번개에 불타 사라졌다.
가히 기적이라 부를 만한 광경이었다.
“허억... 허억...?”
죽는다. 이대론 진짜로 죽는다.
내가 죽는 건 괜찮다.
브라함을 구하지 못하고 죽는 게 문제다.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부들부들 떨던 극검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경 5미터 이내가 공터가 되어있었다.
지면으로부터 솟구치는 붉은 벼락의 숲 때문이다.
두려움을 모르고 덤벼드는 영혼 병사들이 숲에 들어설 때마다 잿더미로 흩어졌다.
“이건...?”
카일인가?
극검이 시야를 넓혔다.
자신과 똑같이 정체불명의 벼락 세례에 도움을 받고 있는 인간들이 곳곳에 보였다.
카일도 그중 하나였다.
카일의 떨리는 시선을 쫓아가 보니 브라함의 뒷모습이 있었다. 진즉 넝마가 됐었는데도 굳건히 서있었다.
찢겨나간 셔츠 사이에 드러나는 등이...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가미긴의 말발굽이 분명 저 등을 꿰뚫고 튀어나왔었다만...
“어...?”
상황을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극검이었다.
하지만 몸은 진즉에 똑바로 일으켰다.
템빨단원들의 가장 큰 특징은 변수에 잘 적응한다는 점이다.
시도 때도 없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벌이는 그리드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온 덕분일 것이다.
“후우.”
전투 중에 골절 약을 먹어둔 덕분에 오른 팔은 회복됐다. 왼팔도 거의 다 붙어간다.
대신 생명력이 고갈되기 직전이지만 쉴 때가 아니다.
가미긴이 브라함을 노려보며 뒷다리를 구르고 있었다.
돌진하기 직전의 황소 같았다. 말 주제에.
‘내가 지킨다.’
브라함의 마법은 평범한 마법과 궤가 다르다. 장거리 텔레포트를 블링크 쓰듯이 쓴다.
잠깐의 틈만 생겨도 브라함은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
거기까지 아는 이상 극검은 지체하지 않았다.
번개의 영역을 벗어나 화살처럼 쏘아졌다. 스스로 적진에 투신했다.
내구력이 바닥난 갑옷을 꿰뚫고 살을 베는 영혼 병사들의 창칼을 무시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저 멀리 서있는 가미긴에게 못 박혔다.
그의 두 손은 칼집과 칼자루를 거머쥔 채 떨어지지 않았다.
제4위 대악마.
인계 페널티가 무색하게도 세계관 최강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놈.
놈에게 돌진하면서도 극검은 위축되지 않았다.
단 한 번.
그 한 번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살과 뼈를 영혼들에게 내어주며 정신을 오직 손끝에 집중했다.
‘할 수 있다.’
템빨국의 십공신은 만인이 우러러보는 자리다. 늘 주목을 받는다. 언제, 어디서나 갑작스럽게 자격의 증명을 요구 받았다.
당연히 노력해왔다.
이 자리를 욕보이지 않게끔 피토하는 심정으로.
질주하는 극검의 몸이 점차 아래로 기울었다. 급기야 턱이 지면에 쓸릴 정도였다.
그 탓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등이 영혼들의 칼과 창에 찔리고, 연신 발에 차이는 안면이 일그러졌으나 가속을 멈추지 않는다.
‘발도, 낙호교(落虎嚙).’
극검의 손끝에서 섬전이 튀어 올랐다.
다만 소리는 없었다.
칼집을 쥔 왼손의 엄지로 코등이를 퉁겨 가속력이 더해진 칼자루를 뽑는 과정이 워낙 쾌속했다. 소리가 쫓을 속도가 아니었다.
“...!”
갑자기 나타난 ‘베리아체의 딸’과 그녀로 인해 분위기가 바뀐 브라함.
어떤 위험을 느끼고 브라함을 경계하던 가미긴의 감각이 처음으로 극검에게 쏠렸다.
호랑이의 기세를 품은 무형의 검기를 감지하고 반응한 것이다.
초월적인 감각 탓에 발생한 불상사였다.
콰자작!
브라함에게 단숨에 달려들기 위해 추진력을 모았던 가미긴의 몸이 극검에게 쏘아졌다.
본능의 영역이었다. 가미긴 본인이 가장 당황했다.
갑자기 커진 가미긴의 몸이 시야 전체를 가득 메우자 극검이 웃었다.
회심의 일격이 놈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광경을 보고 기뻐서 그런 게 아니다.
시야의 가장자리에 있던 브라함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이었다.
‘됐...다.’
브라함이 무사히 도망쳤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대로 멸망하게 될 타이탄의 사정이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백성은 이미 피난했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살아남은 이상 추후에 반드시 복수하고 복구할 수 있다.
코앞에 직면해온 가미긴의 발굽을 마주본 극검이 마음을 놓았다. 진즉부터 각오했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브라함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그랬다.
“주제넘다.”
극검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텔레포트를 써서 도망친 줄 알았던 브라함이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서있었으니까.
심지어 브라함은 가미긴의 앞다리를 두 손으로 거머쥐고 있었다.
한 손에 다리 하나씩을 꽉 붙들어 쥔 채 풍압만으로 지면을 폭발시키는 무게를 견뎌내는 중이었다.
“엥?”
극검이 자신도 모르게 바보 같은 신음을 흘렸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당연하다.
브라함은 전설의 대마법사.
그의 스탯은 지력에 편중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몸이 느리고 약했다.
검성과 싸워선 절대로 못 이긴다고 스스로 고백했었을 정도다.
한데 그가 가미긴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순수한 파괴력만 놓고 보면 검성의 검술에 전혀 밀리지 않을 제4위 대악마의 공격을, 맨손으로.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 번 다신 함부로 나대지 마라.”
가미긴이 아닌 극검을 향한 경고였다.
그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대단히 어색했다.
뿌드득!
브라함의 셔츠가 팽창하더니 터져나갔다.
가미긴의 두 다리를 거머쥐고 있는 손등에 울퉁불퉁 솟아난 혈관과 팔뚝의 미려한 근육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직계의 육신.
베리아체로부터 지고한 혈통을 물려받은 육신이다.
거기에 대마법사의 근력 강화 마법과 혈액의 순환을 이용한 육체 강화 술식이 더해졌으니 괴력난신이라는 표현에 과장이 없다.
“이, 이노오오옴!!”
너무 놀라 질색하는 가미긴의 몸이 하늘 높이 붕 떠올랐다.
브라함에게 집어던져지며 중력 마법의 영향까지 받은 여파다. 신체 부위마다 다르게 전달되는 중력에 섣불리 적응하지 못하고 볼품없이 허우적거렸다.
키이잉!
브라함의 붉은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각성된 의식으로 체내의 혈액을 운용해 마나핵의 손실 부위를 복구한다. 일시적으로 마비됐던 주술 회로들을 강제로 회복시켰다.
앞서 사용한 마법들의 쿨타임을 인위적으로 없앴단 뜻이다.
대가가 커서 내상을 입고 말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지공의 계산능력이 직계의 회복력을 신뢰했다.
“퍼니쉬먼트.”
새빨간 구체가 쏘아졌다. 파멸의 형상이었다.
제4위 대악마의 하체가 갈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