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15화
“브라하아아암!!”
우어어어어어...
사방팔방에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지하에서 스며나온 수천, 수만의 영혼 병사가 흐느끼는 소리였다.
놈들이 창칼을 거머쥐거나 마법을 쏘며 돌진해오는 가미긴의 주위를 감쌌다.
가히 군단의 진격이었다.
“개떼냐...”
손에 땀을 쥔 채 브라함을 응원하던 극검과 기사들이 뒷걸음쳤다.
카일과 공작들도 긴장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영혼 군단의 기세가 흉흉했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하나하나가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정예였다.
‘전격에 저항력을 갖췄을 정도인가.’
실험적으로 날린 공격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을 확인한 카일이 퇴로를 물색했다.
영혼은 물질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격이 아예 안 통할 가능성도 상정했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다.
‘내 공격이 통하고 말고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저 괴물을 상대론 승산이 없어.’
카일은 브라함을 그리드만큼이나 두려워한다.
그의 한쪽 팔을 뺏어간 당사자가 정확히는 브라함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브라함이 가미긴에게 전혀 승산을 엿보지 못하고 있었다.
카일은 눈치 채고 있었다.
‘가미긴은 여태껏 브라함을 단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다.’
공격을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긴 하다.
브라함의 마법 연계가 가미긴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을 정도로 훌륭했으니.
하지만 마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게 상식이었다.
카일은 브라함의 마나가 머잖아 고갈될 것을 알았다. 그야 그럴 게 전설의 대마법과 대단위 마법을 쉬지 않고 연발하지 않았나.
‘반면 저 괴물은 계속해서 재생한다.’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멀쩡한 저 하체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이상 승산이 없다.
혼자라도 무사히 도망치는 편이 낫다...
카일이 생각하는 그때였다.
“나의 아들아!!”
뇌전지체인 카일의 감각에도 빠르게 느껴질 정도로 가속해오는 가미긴의 외침이 물결을 일으켰다.
전장을 가득 메우고 몰려오던 영혼 군단이 일제히 흐릿하게 변모하는 듯싶더니 날카로운 예기가 전장에 휘몰아쳤다.
수천, 수만 개의 영혼이 전부 인간의 형상을 버리고 무기로 탈바꿈한 여파였다. 하나 같이 끝이 날카로운 창과 칼로 변한 그것들이 해일이 되어서 브라함을 덮쳤다.
카일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미긴의 의도를 읽은 것이다.
저 괴물은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리한 생물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숫자가 많은 영혼의 무구들.
그것들이 전장의 모든 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브라함이 텔레포트나 블링크를 쓸 좌표를 내주질 않았다.
그 상태로 오직 브라함에게 쏘아지는 것이다.
실드 연계를 강요해서 마력을 빠르게 고갈시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음...”
출렁이며 다가오는 거대한 무구의 해일을 홀로 마주보고 선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사색을 방해 받은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어떤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 놓였다는 사실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프로즌 템페스트.”
파작.
“...?”
파괴의 연쇄로 발생한 불길과 영혼의 무구들로 뒤덮인 전장.
열기와 살의에 물든 전장은 살을 태울 듯 뜨거운 상태였다.
한데 카일은 갑자기 손끝이 시린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달빛에 산란하는 빛의 파편들이 카일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카일은 빛의 굴절이 굉장히 불규칙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굴절을 유도하는 물질이 워낙 다양한 형태를 지녔기 때문이다.
어느새 일대를 가득 매운 그것은 빙정(氷晶)이었다.
별조차도 끌어내렸던 대마법사의 의지가 상층운을 내려앉힌 것이다.
“잠시 가만히 좀 있어봐라.”
혀를 찬 브라함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젓자.
쩌적! 쩌저저저저저저적!!
지상까지 가라앉은 냉기가 한없이 차갑게 식으며 휘몰아쳤다.
그의 전방위로 쇄도해오던 영혼의 무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얼어붙었다. 거대한 해일의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전장을 불태우던 불길들과 처참히 무너지고 있던 도시의 잔해들도 마찬가지였다.
극검과 기사들, 카일과 공작들의 신세도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양 그대로 얼고, 멈췄다.
당장 타이탄만 그런 게 아니다.
대륙 각지에 흩어진 채 활동 중인 사람들과 마물들까지 전부 얼음이 되었다.
[전설적인 대마법이 발현되었습니다.]
[극의에 오른 마법이 세계를 동결시킵니다.]
“후우.”
브라함이 토하는 뿌연 숨결이 멈춘 세상을 홀로 떠돈다.
그것이 시선을 끌어줘서 다행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브라함의 두 손을 아무도 엿보지 못했다.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깨달음을 손에 넣기 직전이다.
저 미친 악마를 쓰러뜨리기 위해선 뇌리를 저미는 영감들을 정리하고 공식으로 치환하여 계산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할 듯하다.
얼어붙은 가미긴의 몸이 벌써부터 이변을 보이는 중이다.
튼튼한 네 다리의 근육들이 움찔, 움찔 경련하고 있다.
저놈의 두 다리가 곧 들어 올려지는 순간, 놈의 시간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할 터다.
그대로 쏘아져, 나의 가슴을 짓밟을 것이다.
대마법의 연속되는 사용으로 인해 마력의 순환이 0.05초 느려졌다. 그마저도 심상세계를 불러일으킨다는 가정을 세우고 계산한 시간이다.
아마 이대로는 방어도, 회피도 힘들다.
‘...어쩔 수 없지.’
사람들 앞에서 피 흘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썩 내키진 않다만, 가미긴의 실력을 인정해야 한다.
뼈가 뭉개지는 대가로 다리 4개를 가져가도록 하자.
브라함의 사고가 가속했다.
당장 끝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찰나 속에서 머릿속 영감을 공식으로 치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부.
극히 일부라도 좋다.
불완전하게나마 새로운 마법의 편린을 발현할 수 있다면 저놈의 튼튼한 다리를 날려버릴 수 있다.
“...”
두 눈을 감고 있는 브라함의 짙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꺼풀이 쉴 새 없이 흔들려서다.
꽈드득...
브라함의 턱 선이 미세하게 치켜 올라갔다. 이를 악 물어서다.
쩌엉!
브라함의 귀가 미세하게 꿈틀댔다. 소음을 감지해서다.
가미긴이 다가오고 있다.
마침 찰나가 끝났다.
[빛의 여신 레베카가 권능을 발휘합니다. 얼어붙었던 모든 만물이 거짓말처럼 수복됩니다.]
파사사사삭...
얼어붙었던 영혼 무기들이 그대로 재가 되어 흩어졌고, 전장을 뒤덮었던 불길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사람들의 인지능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대륙 곳곳에서 활동 중인 모든 생물들의 어안이 벙벙해져선 두 눈을 깜빡였다.
그 한 번의 깜빡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단해애!!”
가미긴은 브라함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세상이 수복되기 전에 먼저 움직였던 놈이니 당연하다.
높이 들어 올린 앞발을 내리 꽂았다.
그 간단한 행위만으로 중력을 무겁게 만드는 듯한 풍압이 발생하며 브라함이 딛고 선 지면을 폭발시켰다.
브라함의 심상이 파괴됐다.
브라함의 심상은 뱀파이어 시절부터 쌓아올린 것이라 뱀파이어의 권능을 되찾지 못하는 이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주르륵.
브라함의 눈과 귀, 입과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지팡이 끝에 구체를 이룬 마력이 명멸하고 있었다.
너무 빠르게 선회하여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체였다.
“퍼니쉬먼트.”
──!
파멸이라는 개념이 소리가 된 것 같았다.
설명하기 힘든, 들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굉음이 진동했다.
가미긴의 발굽에 가슴이 짓뭉개진 브라함의 뼈와 심장이 부서지고, 터지며 발생한 파열음보다 소름 돋고 끔찍했다.
그 소음에 이어지는 것은,
“끄아아아아악!!”
몸부림치는 가미긴의 비명이었다.
자신의 앞다리 하나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그녀가 창백한 피부를 자색으로 물들였다.
“네 영혼...! 네놈의 영혼을 영원히 잔인하게 고문할 거야!!”
“약했나...”
악마의 모성애는 참으로 하찮은 것이었다.
브라함을 보듬어주겠다던 다짐을 그새 버린 가미긴이 표독한 눈으로 브라함을 노려보았다.
그 살의와 분노에 호응하듯 지하에서 새로운 영혼들이 스며나왔다.
앞선 영혼 군단과 마찬가지로 숫자가 족히 수천, 수만이었다.
세상에 죽음을 맞이했던 영혼이 어디 한둘이겠나.
게다가 영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다.
없앤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잠시 윤회의 강에 머물다오는 개념이다.
가미긴의 군단은 막말로 무한했다.
심지어 이번에 그녀가 소환한 영혼 중엔 앞서 브라함의 메테오에 산화했던 옛 영웅들의 영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새 윤회의 강을 다녀온 것이다.
“꺼져! 다 꺼지라고, 이 개새끼들아!!”
극검이 질주했다.
이야루그트는 진즉에 역소환 되어 없건만,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단지 브라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칸이 죽었을 때의 그리드를 곁에서 보았다.
그리드에게 그런 아픔을 두 번 다신 주고 싶지 않았다.
“우아아아아아!!”
철컥! 철컥! 철컥!
발검과 납검의 소리가 계속해서 반복됐다.
직업 특성상 연속 공격 시마다 페널티를 입는 극검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영혼 군단을 베어나갔다. 부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왼팔을 대신해 입에 칼집을 문 모습이 귀신같았다.
그를 뒤따르는 공작들과 적기사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전진하는 그들에게 귀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 뭐야 미친...
-서, 설마 이대로 다 죽는 건...
-그럴 리가 없음. 브라함은 무적임.
-하지만 지금 브라함이...
영혼 군단은 끝이 없었다.
조금 전까진 눈처럼 하얬던 셔츠를 붉게 물들인 채 매직 미사일만 난사하는 대마법사.
입에 문 칼집에서 검을 뽑다가 급기야 오른팔까지 부러지자 태권도 품새를 잡고 발차기를 날리기 시작하는 검사.
소중하게 키워온 동물들이 모조리 죽자 피눈물을 흘리며 야수로 변신하는 맹수왕.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끝없이 몰려오는 영혼들에게 붙잡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불사왕.
갑옷에 박힌 영혼의 창과 칼날에 고슴도치가 되고도 거목처럼 버티는 기사들.
기껏 구출되어놓고 다시 전장으로 달려와 싸우는 플레이어들과 병사들.
어렵게 물색해놨던 퇴로를 외면하고 전기를 뿌리며 한탄하는 기둥.
끝으로...
“하하! 하하하핫!!”
...어느새 완전히 회복된 다리를 자랑하듯 선보이며 웃는 대악마.
『아아...! 아아!! 강합니다...!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아오, 씨발! 접속 제한 페널티 X 같네!!
-아니 다른 인간들 다 어디서 뭐하냐! 브라함 죽는다고!!
한 자릿수 대악마.
여태껏 몰랐던 절대적인 존재의 강함을 실감한 사람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며 눈물을 글썽이거나 욕설을 토했다.
플레이어가 아는 최고의 실력자들이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이 끔찍한 현실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절망 속에서.
“브라함.”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는 전장에 크지 않은 목소리가 똑똑히 스며들었다.
고혹적인 음성이었다.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조차 한 순간 가슴이 흔들릴 정도였다.
“나, 다시 잠들 거 같거든. 그러니까 그냥 너한테 돌려줄게.”
또옥...
넝마가 된 브라함의 정수리에 한 방울의 피가 떨어진다.
처참하게 망가진 심장으로 스며드는 피였다.
두근!
수백 년 동안 쇠약해져 있던 심장이 힘차게 맥동한다.
“네 힘.”
태초의 3악.
제3위 대악마 베리아체의 피가,
[당신의 사도 ‘브라함’이 직계의 권능을 되찾았습니다.]
이 순간 다시 브라함의 혈관을 타고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