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12화
제4위 대악마 가미긴이 출현하기 전.
“얼마나 대단한 검사이기에 우리를 제치고 탑주가 된 거야? 거 참 기대되네.”
“주군께서 결정하신 사항일세. 혹 무례하게 굴진 말게.”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비롯한 전 적기사단 출신들이 검탑을 오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지위가 높은 자들이었다.
피아로는 대장군이자 식량농업부장관, 아스모펠은 대장군이자 치안부장관-테러를 진압한 공적을 인정받았다-, 싱클레드와 아멜다, 그리고 켄트릭과 단테 또한 장군직과 기사단장, 검술 교관 등을 역임했다.
제국에서 중용됐던 인물들답게 템빨국에서도 활약하는 것이다.
그들이 오직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행차하는 광경은 진귀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당연히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어. 그래도 자격이 있는지 정도는 확인해 봐야 할 거 아니야?”
“...”
싱클레드의 의견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였다면 감히 주군의 안목을 의심하는 거냐고 한 소리 했을 피아로와 단테도 침묵했다.
그리드가 신이 되었다지만 그건 무수히 많은 업적들과 고절한 무력을 쌓아올린 덕분이다. 완전무결한 존재가 됐다는 뜻이 아니다.
애초에 신이란 완전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
여러 신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피아로와 단테는 근심했다.
“확실히... 전하께서는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고우시니 타인도 자신과 같을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으시지.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신뢰하신다네.”
“맞아요, 맞아. 싱클레드를 순순히 거둬주신 것만 봐도 말 다했죠.”
“아멜다, 너 진짜 많이 컸다?”
검탑의 정상은 30층.
템빨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다.
가파른 나선형의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기사들의 발걸음을 지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어느새 정상에 오른 일행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그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정체 모를 검탑주.
그자가 혹여 그리드 전하의 호의를 등에 업고 설치는 망종이라면... 합당한 처벌을 내리리라.
“들어오게.”
문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외로 젊었다. 끽해야 피아로 또래의 중년 같았다.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운 싱클레드가 웃으며 이를 갈았다.
“들어오게? 허허, 저 건방진 친구가 초면부터 반말질이네.”
“진정해라, 싱클레드. 아직 초면조차 아니다.”
“맞아. 여긴 검탑이잖아. 우리를 수련생쯤으로 오해하고 저러는 거겠지.”
“좀 더 면밀히 관찰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일행이 검탑주를 의심하는 건 저열한 텃세가 아니다.
템빨국 외부 출신 중에 검탑주를 맡을만한 인재가 없어서였다.
현재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검사’의 이름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나열한다고 해도 그중 우리보다 고수가 있을까?
백번 양보해서 크라우젤이 있다지만 저자는 크라우젤이 아니었다.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끼눈을 뜬 싱클레드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자,
“어서 오게.”
검탑주 비반이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검성.
기파는 평범하다.
그에게 기운을 갈무리하는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 쉬웠으니.
“어이, 당신 누구...”
다짜고짜 따지듯이 외치던 싱클레드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피아로가 제지해서였다.
“고인을 뵙소이다.”
피아로는 우선 예의를 갖췄다. 첫눈에 비반의 정체를 알아 봐서가 아니라 ‘그리드가 임명한’ 검탑주이므로 최소한의 존중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 비반의 태도는 달랐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인사는 됐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세.”
비반이 검탑주로 지낼 시간은 고작 일주일에 불과하다.
그동안 검탑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가르침을 사사하는 게 비반의 역할이었다. 그리드가 친히 부탁했다.
하물며 세상이 악마들의 침략으로 어지러운 상황 아닌가.
비반은 1분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탑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많은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언행이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흐흐, 성격 마음에 드네? 사실 나도 당신이랑 인사나 나누러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었거든?”
싱클레드가 성큼 나섰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정확히는, 일행 중 누구도 그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일행의 목적은 검탑주의 자격을 확인하는 것이었기에.
검탑주의 실력을 확인할 겸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나서는 싱클레드를 막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쿠왕!
지면을 박찬 싱클레드의 몸이 가볍게 쏘아졌다.
당연히 쾌속했고 움직임에 탄력이 있었다. 해면 위로 뛰어오르는 날치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퍼지는 기파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살기가 유형화된 기파였다.
살기투법.
싱클레드의 기질에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진탕시키고 찢어발기는 기운이다.
그 날카롭고 강력한 기운을,
콰드득!!
손을 쑤셔 넣어 헤집은 비반이 흐트러뜨렸다.
그대로 뻗은 손으로 싱클레드의 핏대 선 목을 움켜쥐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부부터 부수는 살기라. 공격이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겠군. 훌륭해. 보기 드문 자질이야. 살아온 세월이 험난하여 도리어 단련되었는가.”
쿠당탕!!
비반이 말하는 동안 한 바퀴 회전한 싱클레드의 몸이 바닥에 등부터 꽂혔다.
“???”
천장을 바라보는 싱클레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속내를 감추는 게 고수의 덕목이거늘 경악을 대놓고 드러냈다.
어찌 충격을 숨기겠나.
황금기의 적기사단에서 무력으로 한 손에 꼽혔던 자신이 한 수에 제압당했는데.
“...!”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두 눈도 부릅떠진 상태였다.
단테가 낮게 읊조렸다.
“저건 요행 따위가 아닐세.”
본 적 없는 고수다.
모두가 깨닫는 순간.
“...내가 사실 박투술엔 약하거든?”
언제 메어 꽂혔냐는 듯이 벌떡 일어난 싱클레드가 검을 뽑아 쥐었다.
흥분은 가라앉혔다.
당연하다.
싱클레드는 바보가 아니다. 그 또한 비반의 실력이 진짜라는 걸 눈치 챘다. 냉정해질 필요를 느꼈다.
“제대로 다시 간다?”
기사 중에 호승심 없는 자는 드물다.
그중에서도 싱클레드는 전투 자체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정체불명의 고수를 통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깨달은 그는 기뻤다. 자신의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지 확인해볼 기회라고 여겼다.
고개를 끄덕인 비반이 자신 역시 검을 뽑았다.
“오게.”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싱클레드가 바로 공격에 나섰고 비반은 가볍게 제압했다.
비반은 결코 봐주지 않았다. 전력을 드러냈다.
템빨검탑주.
고작 일주일짜리 지위에 불과했으나 그는 이 자리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검을 논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검성이 검을 가벼이 휘두르는 일은 없다.
“컥...! 쿨럭, 쿨럭!!”
코등이에 목젖을 찍히고 주저앉은 싱클레드가 괴로워서 발작했다.
채 5합도 버티지 못했다.
납검한 비반이 조언을 건넸다.
“그대에겐 살의가 무기이지. 하여 대놓고 살의를 드러내는 거겠지만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일세. 오히려 정돈하는 편이 좋아. 살의를 정제할수록 더 확실한 무기로 활용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연검을 연마해보게. 차츰 익숙해질수록 빠르게 강해질 테니.”
“쿨럭... 끅... 조언 감사합니다.”
싱클레드가 아픈 목을 간신히 쥐어짜 대답했다. 곧바로 일어나 다시 덤빌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공손한 태도였다. 딱히 의식한 게 아니라 자연히 그렇게 됐다.
비반의 검술에서 깊은 묘리와 세월을 엿본 까닭이다.
“저, 저도요! 저하고도 싸워줘요!”
아멜다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거수했다.
기사이며 지리학자이기도 한 그녀는 이 거대한 원형방의 지형을 이미 모조리 파악해놓은 상태였다.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대상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자신에게 유리해질지 계산을 마쳤다.
“오게.”
비반이 허락했다. 검파 위에 손을 얹은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발검술?’
아멜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해서 움직였다. 상대방이 발검할 각을 주지 않았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기며 방패를 집어던졌다.
그녀는 싱클레드와 달리 고지식하지 않다. 상대가 검사랍시고 검으로만 맞붙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와 기술을 동원해서...
“...!?”
방패가 비반의 시선을 끄는 동안 예정된 경로를 따라 움직이던 아멜다가 철퍼덕 쓰러졌다. 포즈가 죽은 개구리를 닮았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방패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여파였다.
켄트릭이 침음했다.
“검 한 자루로 저런 묘기를...”
조금 전 비반은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칼집을 살짝 들어올려 칼날의 극히 일부를 노출하고, 마침 날아온 방패와 그 칼날을 충돌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충돌의 반동으로 인해 역으로 되돌아간 방패가 아멜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방패에 깃들어 있던 아멜다의 오러가 무색하게도 방패를 공처럼 튕긴 것이다. 심지어 원하는 방향으로.
“에...? 에에? 나 방금 기절한 거야? 진짜야?”
“그대가 익힌 심법은 그대의 체질에 적합하지 않네. 기가 제대로 축적되질 않아. 그러니 공격이 가벼운 걸세.”
“앗... 고조부님 때부터 대대로 내려온 심법인데...”
“선대의 기술을 계승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선대가 그대에게 재능과 체질마저 고스란히 물려주는 건 아니잖나.”
“네에...”
“그대는 차라리 마탑을 방문해보게. 마나와 상성이 좋아 마나의 축적 원리를 응용하면 진일보할 수 있을 걸세.”
“네에...!”
아멜다도 공손해졌다.
“제게도 가르침을 주십시오.”
켄트릭이 나섰다.
그는 황금기 적기사단의 선봉을 맡았던 인물이다.
홀로 적진을 돌파해 적장의 목을 베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게 특기였다.
“오게.”
비반은 쉬지도 않고 켄트릭을 상대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와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켄트릭의 용맹함 뒤에 숨은 본질을 대번에 간파했다.
쩌엉!!
“...!!”
“그대의 검에 암검의 흔적이 남아있군. 암살자 출신인가?”
“그게... 맞습니다. 어린 시절 납치되어 유년기 내내 암살자로 교육 받았지요. 하지만 다행히 구출되어 실제로 암살자 활동을 해보진 않았는데... 어찌 알아 보셨는지...”
켄트릭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의 그가 쓰는 검술은 유년기에 배운 암살자의 검술과 전혀 달랐다.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심지어 유년기에 배운 검술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한데 어떻게 흔적을 알아본단 말인가?
나조차도 몰랐던 흔적을...
“습관처럼 미세하게 남아있다네. 아마도 자넨 1대1승부와 단기결전에서 활약해왔겠지.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 이긴 경험도 많을 테고.”
“마, 맞습니다...”
“그걸 무기로 삼도록 하게. 이제 와서 다시 암검을 배우라는 게 아니야. 그래서야 본말전도일세. 그대의 무의식에 남아있는 기술을 수면 위로 꺼내는 방식으로 접근해보게나. 하면 지금의 검술과 자연히 섞이며 진화할 터이니.”
“예, 감사합니다!!”
비반은 검탑주의 소임을 다했다.
아스모펠과 단테와도 성심껏 검을 나눴다.
아스모펠은 정확히 16합을 견뎠고 단테는 17합을 견뎠다.
단테가 아스모펠보다 강해서가 아니다.
신격을 쌓았다지만 그의 종합적인 전투력은 여전히 아스모펠과 싱클레드보다 아래였다.
하지만 단테에겐 연륜이 있었다. 검술의 위력을 떠나 기술만 놓고 보면 일행 중 최고였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와 싸워도 버틸 수 있단 의미다.
제국 검법의 초석을 다지고 적기사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인물다운 활약이었다.
“음... 그리고 그대는...”
단테에게 체력과 근력을 기르는데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하며 검에 더 큰 힘을 싣는 방법까지 가르쳐준 비반의 시선이 아스모펠에게 머물렀다.
한참 동안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아스모펠이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