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11화
마족이란, 지옥에서 태어난 지성체 전부를 뜻한다.
종족별로 생김새와 성향이 판이하게 달라 공생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바로 ‘마기’를 타고난다는 점이다.
마기는 물질과 마력 양면에 개입해 강화시키는 에너지다. 힘의 근원이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타고난 마기의 질과 양에 비례해서 마족의 가치가 결정되는 이유다.
적린족(赤燐族).
심경의 변화에 따라 붉은 도깨비불을 피어 올리는 마족.
그들의 전반적인 생김새는 인간과 무척 흡사했다. 그래선지 손재주가 뛰어나 중립지역에서 기술자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지옥의 대장장이 헬스미스가 대표적인 적린족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적린족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타고난 마기가 마물보다 저급하고 미약하여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적린족 출신인 제파르도 냉대가 익숙했다.
그의 젊은 시절엔 좋은 기억이 단 하나도 없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약자로 태어나 순리대로 짓밟힌 게 전부일 뿐.
그런 그에게 꿈과 희망을 준 존재가 바로 검귀 이야루그트였다.
자신과 같은 하급 마족 출신임에도 검술을 연마하여 대악마들과 맞서 싸울 힘을 거머쥔 존재.
제파르는 그처럼 되고 싶었다.
하여 죽였다.
***
푸화하하학!!
세상이 붉게 덧칠됐다. 제파르가 흘린 피에 의해서다.
‘저쯤 되면 검성이라고 불려야하는 거 아닌가?’
전투를 지켜보며 감탄을 연발하던 카일이 급기야 경악했다.
초월자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하다. 상대방의 시선, 호흡, 근육과 인대의 움직임. 그 모든 걸 놓치지 않고 파악하며 전투를 예지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되고 있었다.
이야루그트는 제파르의 감각을 끊임없이 속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몸의 중심을 바꾸고, 몸의 중심과 검의 방향을 어긋나게 만드는 식으로 초월자의 감각을 교란했다.
카일이 제3자의 입장에서 전투를 관찰하고 있기에 파악 가능한 속임수였다.
당사자인 제파르는 자신이 대체 왜 자꾸 베이는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도 그랬다.
‘왜지?’
인계에 오르자마자 하필 이야루그트와 조우한 상황.
최대의 난적을 만난 제파르의 집중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카일을 상대로 입은 상처도 제법 컸기에 힘을 안배할 여유도 없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한데 이상했다. 이야루그트의 검로를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더욱 더 발전했다고 자부했건만, 수백 년 전과 똑같이 과거의 망령에게 압도당하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의 상황이 훨씬 나빴다.
과거의 제파르에겐 대악마의 지위가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생명력이 그를 지탱했다.
반면 지금은 일개 악마에 불과하다.
이야루그트의 검에 7일 밤낮을 베여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참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당혹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제파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도깨비불이 피어올라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야루그트가 조소했다.
“하찮은 벌레새끼답게 수백 년 동안 도리어 퇴화했구나.”
“아무래도 벌레가 맞긴 하지. 당신과 출신 성분이 비슷하다보니.”
“큭큭, 그래... 너나 나나 다를 게 없긴 하다.”
이야루그트의 검술이 지고한 경지에 오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형(形)에 한정해서다.
몸의 중심과 검의 진로를 어긋나게 만들어 상대방의 눈과 감각을 속이는 검술.
이 검술은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
검에 온전한 위력을 싣지 못한다는 점이다.
검로가 몸의 중심과 반대로 향하니 힘이 실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중심을 바꿀 때마다 반동을 더해서 검의 위력을 점차 상승시켰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검성의 검술처럼 ‘무엇이든 베는’ 위력을 담는 건 요원했다.
쉽게 말해 결정력이 부족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악마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도, 심지어 무저갱의 히드라조차 잠시나마 압도했었음에도 이야루그트가 실제로 죽인 대악마의 숫자는 적다.
업적을 많이 쌓지 못했으므로 일신의 실력에 비해 격도 낮은 편이다.
이야루그트가 끝내 검성이 되지 못한 건 필연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의 수준으로도 최강을 논할 만하니.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포를 떠주면 그만이다.
제파르의 살과 뼈가 단단해 목은 자르지 못해도, 심장을 파괴하진 못해도, 과다출혈로 말려 죽일 수 있다.
“제길!”
또 한 번 반격에 실패하고 어깨를 베인 제파르가 으르렁거렸다.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게 당연한 검이 왼쪽에서 날아오고, 상단으로 솟구쳐야 옳은 검이 하단으로 떨어지는 식이었으니.
차라리 보는 것과 반대로 대응해봤지만 그조차도 무용했다. 애초에 그의 감각은 이야루그트의 손바닥 위였다.
검귀 이야루그트.
지옥의 전설은 건재했다.
‘수백 년이 지나서도 이기지 못할 줄이야!’
난감하다. 자신이 이토록 무력할 줄 알았다면 자신만만하게 선봉을 맡지 않았을 거다.
‘권좌에서 쫓겨나지만 않았어도...!’
제파르는 대악마들과 싸워서 이길 때마다 권좌를 빼앗아 차지했다.
무려 13위 권좌에 올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진 못했다.
마물들이 하급 마족 출신인 그를 멸시한 까닭이다.
그나마 악마들은 제파르의 실력을 인정하고 두려워했지만 본능에 충실한 마물들은 제파르의 본질만을 보았다. 당장의 실력과 업적에 관계없이 질 낮은 마기를 우습게보고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위엄을 잃었고 자연히 권좌를 잃은 것이다.
이야루그트의 예언대로였다.
너나 나 같은 반쪽짜리는 결코 지배자가 될 수 없다던...
‘이대론 죽는다.’
잠시 순보로 피해 숨이라도 돌리고 싶은데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지고한 검로가 시선을, 동선을 쉴 틈 없이 차단한다.
‘...죽고 싶지 않다! 싫다고!’
악착 같이 살아왔다. 나를 업신여겼던 놈들을 모조리 죽여 복수하고 잠시나마 권력까지 손아귀에 넣었었다. 끝내 권력은 잃었으나 그리 나쁘진 않았다.
이야루그트가 되고 싶다던 꿈을 이뤘기에.
그걸로 족했다.
이야루그트를 죽였고, 덕분에 지옥의 유일한 검귀가 되었다.
최소한의 존중은 받았다.
이번 전쟁을 토대로 잃었던 권력을 되찾을 여지도 있었다. 체파르데아가 바알과 연결해주겠다고 약조했으니. 바알의 권속이 되어 진짜 귀족이 될 수도 있었다.
설마 여기서 목숨을 잃어야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겁에 질린 제파르가 벌벌 떠는 그때였다.
“제파르 너는 여전하네. 이야루그트만 만나면 잡념이 많아져. 내가 이래서 우상 숭배를 혐오한다니까.”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새에서 뻗어 나온 붉은 융단이 전장을 가로지르듯 펼쳐졌다.
포탈을 타고 등장한 수십 마리의 유령이 융단의 좌우로 도열했다.
세상이 숨죽였다.
각자 다른 형상을 지닌 삼십여 마리의 유령 전부가 황금색의 이름을 지녔기에.
그들이 일제히 부복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서열 제4위 대악마, 영혼을 지배하는 망자들의 왕 ‘가미긴’이 출현하였습니다.]
[가미긴은 죽은 자의 영혼에 강제력을 행사합니다. 가미긴에게 사망 시, 사망 페널티가 잠시 유보되며 최소 5분에서 최대 20분 동안 ‘영혼 병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영혼 병사 상태에선 가미긴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영혼 병사 상태에서 사망하거나 상태 지속 시간이 끝날 경우 사망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추가로 영혼에 큰 타격을 입고 1시간 동안 부활이 불가능합니다.]
[가미긴의 네 다리는 빠르고 튼튼합니다. 그 누구도 가미긴의 질주를 막아서지 못합니다.]
[잊힌 옛 영웅들의 영혼이 가미긴을 수호합니다.]
하체는 말이되 상체는 인간 여성과 흡사하다.
가미긴.
제파르에게 협력해 이야루그트에게 죽음을 선사했던 원흉.
놈이 융단을 밟으며 등장했다.
“제파르, 이야루그트하고는 내가 놀아주고 있을 테니 머리를 비우렴. 잡념을 버린 너의 검은 강하니까.”
이야루그트와 제파르의 재능이 하나였다면 지옥에서도 검성이 탄생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던 게 아니다.
이야루그트의 검술은 지고한 기술이오, 제파르의 검술은 궁극의 위력이므로.
“자, 이야루그트. 예전처럼 나랑 놀자?”
석상처럼 굳은 이야루그트를 바라보는 가미긴의 눈빛에 탐욕이 번들거렸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영혼을 굴복시켜 수집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가미긴...!!”
이야루그트의 살의가 폭발했다. 하지만 기세와 달리 덤비진 못했다. 오히려 뒷걸음쳤다.
본능이었다.
고양이의 발톱을 날카롭게 벼린다 한들 코끼리의 가죽에 상처를 입히진 못하는 법.
최고위 대악마를 상대론 천하의 이야루그트도 큰 의욕을 품기 힘들었다.
위축된 그의 곁으로 빛이 떨어졌다.
텔레포트 마법의 잔재였다.
“꺼져라.”
사늘한 음성이 전장의 들끓는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죽여 버리고 싶으니.”
홍옥 같은 눈동자가 가미긴이 아닌 이야루그트를 노려본다. 짙은 혐오가 담겨있었다.
그리드의 종이라는 놈이 추태를 보이자 용서 못하는 것이다.
저벅.
단순한 걸음걸이에도 품격이 있다. 귀족다웠다. 깃 세운 셔츠에 주름 한 점 없음이 그의 품위를 한층 더 부각시켰다.
은발의 사내를 빤히 관찰하던 가미긴의 입가가 씰룩였다.
“너...? 베리아체의 아들이구나?”
“저열한 주둥이에 내 어머님의 이름을 담지 마라.”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공간을 열어 지팡이를 꺼내는 동작이 몹시 신경질적이었다.
그리드가 공들여 개변시킨 지팡이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꽈앙!!
하늘에서 떨어진 빛의 창이 제파르의 몸을 꿰뚫었다.
“...!?”
가미긴이 벌어준 시간을 이용해 무아의 경지에 진입하려던 제파르.
상념을 떨쳐내고자 집중하고 있던 그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허망하게 잿빛으로 산화했다.
극검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히든 피스 <검귀들>이 ‘이야루그트’의 승리로 종결되었습니다.]
[이야루그트가 <무념의 검>과 관련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잃었던 격을 되찾고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마검 이야루그트의 봉인이 약화됩니다.]
[히든 피스 <최후의 봉인>이 발생합니다.]
[이야루그트의 봉인을 풀고 싶다면 제4위 대악마 가미긴을 소멸시키십시오.]
“시, 실화냐...”
극검이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파르의 죽음은 이야루그트 평생의 숙원.
검에 봉인된 그가 수백 년의 세월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던 건 꺼지지 않는 복수심 덕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을 맞이했다.
숙원을 이루기 직전까지 갔다.
한데 무려 제4위 대악마가 나타나 훼방을 놓은 것이다.
이야루그트는 깊이 절망했다. 극검이 봐도 도무지 희망이 없어보였다.
수백 년의 세월이 헛되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나타난 브라함이 너무나도 손쉽게 제파르를 죽여 버린 것이다...
안도감이 들거나 감탄이 나오기보단 전개가 너무 황당무계해서 따라가기 힘들었다.
“흐음.”
가미긴이 빙그레 웃었다. 광대 가면을 덮어씌운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불쾌한 미소였다.
“네놈은 별이 왜 떨어지는 줄 아나?”
서열 제3위의 대악마 베리아체의 아들이자 전설의 대마법사이고, 지공이며, 신화의 편린이자 템빨신 그리드의 사도인 브라함 에슈발트가 문제를 던졌다.
가미긴은 전혀 흥미가 없어보였다. 이미 다른 생각에 잠긴 듯했다. 지옥에서 절대자로 군림해온 존재답게 기질이 특이했다.
“베리아체의 자식은 여럿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다 수집해 버릴까나.”
대답은 않고 생각을 토하는 가미긴.
브라함은 놈 같은 거물이 무저갱을 통해서 나타날 거라고 당연히 예측했었다. 그래서 진즉부터 타이탄에 머물러왔다.
다만 돌아가는 사태가 시시해서 직접 나서지 않았을 뿐.
성격이 괴팍하기론 브라함도 유명했다.
“이유는 하나.”
브라함은 혼자서 질문하고 혼자서 대답했다.
“내 의지에 호응해서다.”
쿠우우우우우우웅──
하늘이 불타며 천지가 흔들렸다.
우주로부터 끌어당겨진 수십 개의 운석이 가미긴의 머리 위로 떨어져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인명 구조에 전념하던 공작들과 기사들,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백성들과 플레이어들,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던 기자들과 시청자들, 어느 기점부터 할 말을 잃은 이야루그트와 카일, 극검 등등.
모든 이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브라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불타며 무너지는 지상과 맹렬하게 치솟는 연기, 하늘을 가득 메우는 잿빛의 기둥들...
세계의 멸망을 묘사하는 듯한 풍경을 오연히 감상하는 브라함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온갖 감정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