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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99화 (1,389/1,794)

템빨 70권 - 8화

“흑기사여. 내 그대와는 늘 자웅을 겨뤄보고 싶었느니라.”

“네놈이 여기엔 왜...?”

금일, 엘리고스는 꽤 여러 번 놀랐다.

이토록 많은 전설이 한 시대에 태어나 함께 활동했던 역사가 있던가.

하물며 전설이 아닌 놈들의 수준도 상당하다.

무엇인가가, 혹은 누군가가 인류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여러모로 복잡한 상념에 잠긴 채, 엘리고스는 낯선 위기감을 느꼈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못했다.

한데 이때 레라지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편에서.

“누구지?”

원정대가 술렁였다. 정황상 적의 적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악마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적의 적이 반드시 아군이라는 법은 없지만, 작게나마 숨통이 트일 가능성을 엿봤다.

크라우젤의 표정은 석상처럼 굳었다.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쓴 탓에 얼굴과 이름을 알아볼 수 없는 악마.

그녀의 작은 손 곳곳에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언뜻 가녀려 보이는 몸의 특정 부위 근육들이 섬세하게 발달했다. 자세가 가지런하고 호흡이 일정했으며 마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정돈되어 있었다.

크라우젤은 대번에 간파했다.

저 악마는, ‘단련’해온 존재다.

여태껏 만났던 악마들은 타고난 육체와 마력을 원석 상태로 운영했을 뿐이건만, 그녀의 육체와 마력은 완전에 가깝게 세공되었다.

동쪽의 절대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다.

타고난 힘에 안주하는 양반들 사이에서 홀로 연마를 거듭해온 존재.

뮐러와의 만남 이후 수백 년 동안 쉬지 않고 단련하여 한계를 몇 번이나 초월해온, 저 엘리고스와 비교하면 ‘당연히’ 훨씬 더 강력한 바로 그 인물.

그렇다.

정체불명의 악마는, 미르를 닮아있었다.

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네임드 중의 네임드, 거물 중의 거물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뜻이다.

실제로 저 오만한 엘리고스가 긴장하고 있었다. 켈베로스가 날뛰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진정시켰다.

“레라지에, 장난치지 말고 이쪽으로 와라.”

레라지에.

엘리고스에 의해서 이름이 밝혀진 그녀가 모자를 벗었다.

물광이라도 낸 것처럼 반들거리는 분홍색 살결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드러나며 충격적인 알림창이 떠올랐다.

[제10위 대악마, 패왕 레라지에가 출현하였습니다.]

“...!”

“...!”

원정대원들의 표정이 크라우젤의 표정과 같아졌다. 경악에 찼다.

패왕.

한 자릿수에 근접하는 서열도 서열이지만 이명이 압도적이라 위축됐다.

팔짱을 낀 레라지에가 턱을 비스듬히 세웠다.

신장이 16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데, 켈베로스의 등에 탑승해 있는 엘리고스를 오히려 내려 보듯이 마주했다.

“엘리고스 너는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나, 패왕 레라지에는 패배를 모르느니라.”

“...”

동그래져 있던 원정대원들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패배를 모른다.

믿기 힘든 말을 당당하게 지껄이는 레라지에와 그를 부정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엘리고스의 태도를 통해서 레라지에가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라는 사실을 엿본 것이다.

별세계의 존재를 목도한 심정이었다.

“이런 내 귀에 종종 X 같은 소리가 들려오더구나. 패왕도 흑기사를 상대로는 고전을 면치 못할 거라는. 본디 호사가란 놈들이 개지랄을 잘 떤단 사실을 내 익히 알고 있다만,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더구나.”

“...확실히, 네놈의 불쾌감을 나는 이해한다.”

자신이 곧 지옥이고자 하는 엘리고스의 바람은, 공명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엘리고스는 지옥 자체를 사랑했다.

죽은 영혼은 거의 대부분 들르게 되는 20번 지옥, 개의 아가리를 하등한 악마가 지키게 하였다가 지옥의 위신이 떨어지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다.

자격 있는 악마가 지옥의 표상이 되고자 한다면 기꺼이 자리를 양보할 의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격을 갖춘 악마 중 하나가 바로 패왕 레라지에였다.

‘이번 세계’에서 태어난 어린 악마.

밑바닥부터 시작해 고작 수백 년 만에 서열 10위에 오른 무패의 폭군.

그녀의 재능은 진짜다.

얼마 전 출간돼 지옥 출판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베스트셀러, ‘번헨 열도 전기’가 그녀의 위업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번헨 열도의 시련을 단숨에 돌파하고, 바알의 계약자 파그마가 전대 전설들의 영혼과 시신에 ‘속박’을 걸어 부활시킨 데스나이트들을 한 수에 쓰러뜨리며...

“가엾구나.”

─무겁게 내뱉었던 그녀의 한 마디는, 천하의 엘리고스에게도 전율을 선사했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당시 번헨 열도 전체에 ‘멸악의 빛’과 ‘지옥 규제’가 상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파그마가 알렉스의 데스나이트에게 강요해서 만든 술식으로, 그 여파로 인해 알렉스의 영혼은 수복불가의 피해를 입었다.

알렉스가 영혼을 희생해서 만든 이중 결계.

당시 번헨 열도를 침공했던 악마들에겐 치명적인 독이었다. 악마들은 능력의 10분의 1도 발휘하지 못했다.

한데 레라지에는 그 상태로도 전대 전설들을 몰살시켰다.

정말로 아쉬운 점은 목격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악마와 마물 중 생존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마지막 섬까지 도달한 악마는 레라지에가 유일했으니.

단신으로 파그마가 기다리고 있던 마지막 섬까지 진출한 레라지에의 늠름한 자태를, 레라지에 본인 외엔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화였다.

“네놈의 용맹은 나 또한 인정한다. 마드라를 쓰러뜨리고 마지막 섬에 도달하였을 때... 파그마의 간악한 함정에 빠져서 지옥에 강제로 전송되지만 않았어도... 너는 그대로 파그마의 목을 베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테지...”

검은 것은 쉽게 물들지 않는다.

엘리고스는 흑(黑)을 이명으로 얻은 존재답게 순수한 면이 있었다. 레라지에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처럼 대단한 네가 나와 비교되었으니 당연히 불쾌할 거다. 그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네놈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다.”

“후후훗... 부끄러워할 필요 없느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알고 있다. 전혀 부끄럽지 않다. 나는 네놈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번헨 열도 전기를 읽은 뒤부터 그렇게 결정했다. 하지만 레라지에여, 한 가지 질문에 대답을 요구하는 바이다.”

“무엇이냐.”

엘리고스가 인간들을 살펴보았다. 그중엔 지옥을 위협하는 데빌슬레이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라지에는 마치 그들을 보호하듯이 서있었다.

“왜 그 인간들을 지키려하는 거지?”

엘리고스의 질문이 원정대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얼핏 듣기에도 무시무시한 업적을 쌓아온 제10위 대악마.

그녀가 우리를 보호하고 있단 사실을 확인하자 안도감을 느끼기보단 혼란을 느꼈다. 의중을 전혀 짐작할 수 없으니 오히려 불안했다.

히죽.

레라지에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시원한 미소였다. 도무지 악마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크라우젤에게 향했다.

“너, 뮐러의 전진을 잇지 않고 검성이 되었지? 아아, 그리 놀란 표정 지을 필요 없느니라. 나쯤 되는 패자는 구도자를 알아보는 법이니.”

“...”

“너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았을 터다. 설령 실패해 후회할지언정, 너는 그런 인간이니까.”

검성은 최강의 전투 클래스다.

심지어 크라우젤은 칠악성의 힘까지 계승했다.

세계에 큰 족적을 남길 운명인지라, 어느 지역을 가도 기연을 만날 확률이 높다. 타 클래스와 비교해서 무수히 많은 히든 퀘스트를 조우하게 된다.

레라지에도 그런 안배 중 하나였다.

대악마임에도 다른 대악마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존재.

베리아체의 원수를 갚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해왔지만 힘이 부족한 그녀와 크라우젤의 만남이 만약 정상적인 경로로 성사됐다면, 이 순간 레라지에는 ‘크라우젤(검성)에게 흥미가 생겨서’라고 인간들의 편에 선 이유를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레라지에는 그리드를 먼저 만났다.

현재 그녀의 행동원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그리드다.

“이자를 보아라, 엘리고스여. 본래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을 검성이 템빨신을 섬기고 있느니라. 데빌슬레이어가 템빨신의 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그녀와 함께하고 있는 모든 인간은 즉 템빨신의 충실한 신도들이란 뜻일 테니.”

“...”

“...”

원정대 몇 명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당연히 템빨단원들은 아무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고, 유라는 은근히 기뻐했으며, 크라우젤도 담담했으나.

아레스에게 충성의 서약을 맺은 스캇 같은 경우 조금 난감하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눈치 없이 끼어드는 일은 없었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갑자기 찾아온 희망이다.

레라지에의 등장 이후 벌써 3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엘리고스와 켈베로스는 날뛰지 않았고 덕분에 원정대원들은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다.

유라의 지옥문 쿨타임도 실시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가 상황 전개를 도무지 따라가지 못했지만, 어찌됐든 좋았다. 이 상황에 괜히 끼어 들어서 흐름을 망칠 정도로 스캇은 바보가 아니었다.

“흐음...”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해본 엘리고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템빨신... 얼마 전에 개의 아가리에 침입했던 신이 급기야 이름을 얻은 건가? 확실히, 인상 깊었다. 이제 막 신격을 쌓는 중이라기에 당연히 하찮은 잡신인 줄 알았거늘 예상 외로 고강하더군. 거느린 사도의 면면을 봐선 벌써 주신이라도 되는 듯했다. 그사이 이름을 얻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천사, 헤츨링, 칠악성, 그리고 전설들.

템빨신의 사도는 솔직히 말해서 하나 같이 대단한 놈들이었다. 다만 명성이나 출생에 비해 굉장히 나약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당시의 환경이 그들을 크게 약화시켰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장 엘리고스 자신만 해도 환경에 의해 약해진 상태였으니.

“그래서.”

엘리고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요점이 뭐냐? 저놈들이 템빨신의 신도인 것과 네가 저놈들을 돕는 것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지?”

사실,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다만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편치 않은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엘리고스에게 레라지에가 당당히 말했다. 부정하고 싶은 가설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간단하다. 나 패왕 레라지에가 템빨신과 한 배를 탔다. 그게 이들을 돕는 이유이니라.”

“...진심인가? 악마가, 신과?”

“후후훗...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템빨신은 아스가르드와 하등 관계가 없다. 더럽지 않아.”

“아니 그게 무슨 궤변이지? 템빨신 그놈이 도대체 몇 명의 대악마를 학살해왔는지 모르는 건가? 그놈은 명백히 지옥을 적대하고 있다. 더럽고 말고를 떠나서 위험하다.”

황당해하는 엘리고스를 레라지에가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게 내 알 바냐?”

“...”

엘리고스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자신이야 파벌에 속하지 않아 좌시해온 사실이지만, 레라지에는 일부 대악마들에게 깊은 원한이 있을 터였다.

베리아체를 부모처럼 따랐었으니.

한숨 쉰 엘리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뭐가 어찌됐든 난 지옥의 위신이 바로 서기만 하면 된다. 네놈이 설령 신의 힘을 빌려 지옥의 표상이 된다 해도 바알보단 차라리 나을 테고... 네놈을 존중하여 이만 물러나도록 하마.”

짜악!

엘리고스가 손뼉을 치자 그의 몸과 켈베로스가 안개가 되어서 흩어졌다.

현장에서 떠난 것이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원정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슬그머니 유라에게 다가가 속삭여 물었다.

“저 대단한 악마가 정말로 그리드 편이야?”

“엘리고스가 저렇게 꼬리를 말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건데?”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엣헴, 허리에 손을 얹고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 레라지에의 시선을 유라가 애써 무시했다. 비록 도움을 받긴 했지만 신뢰하기 힘들었다.

입만 열면 허풍인데 어찌 믿겠나.

유라는 번헨 열도 전기의 원본을 본 적 있다. 그리드가 책을 얻었을 때 함께 있었으니. 레라지에와 되도록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레라지에의 마음은 달랐다. 그녀는 템빨신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관심이 매우 많았다.

템빨신은 베리아체의 내의의 선택을 받은... 베리아체의 유지를 잇는 존재였기에.

“데빌슬레이어여. 나중에 그리드에게 이 몸의 공로를 잘 전달하도록 하여라.”

“...그러죠.”

“계약을 맺자꾸나.”

“무슨 계약이요?”

“그리드에게 내 말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계약. 기왕지사 확실한 게 좋지 않겠느냐.”

“그래요...”

“그리고 넌 지옥에 남는 걸 추천하느니라. 거기, 검성도 마찬가지다.”

레라지에를 힐끔힐끔 훔쳐보던 원정대원들의 귀가 쫑긋 섰다.

크라우젤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이유를 듣지 않고도 레라지에의 의도를 파악한 듯했다.

반면 반트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직접 물어봤다.

“쟤네는 왜 남으라는 건데?”

“저번 전쟁의 실패에서 큰 교훈을 얻은 악마들이 이번 전쟁은 굉장히 무식한 방법으로 열었느니라. 인계를 침공할 때 마물과 악마들이 약화되는 현상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제파르의 검으로 세상의 경계 자체를 베어버렸지.”

“세상의 경계를...?”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다. 33일 후에 다시 붙을 것이니라.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지옥도 취약해져 버렸다.”

레라지에가 마력을 일으켜 망토를 펄럭였다. 멋지게 팔짱을 끼면서다.

그녀가 등지고 선 지평선으로부터 수만의 마족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역습을 가해도 좋지 않겠느냐. 징벌의 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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