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4화
여신의 미소가 무너졌다.
빛의 형상을 조각한 동상들과 함께 파괴되어 널브러진 그녀의 신상은 더 이상 찬란하지도, 신성하지도 않았다.
부서진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고 갈라진 눈동자는 그 무엇도 투영하지 못한다.
스테인드글라스 속에 묘사된 모습과 대조되어 비현실적이고 참혹했다.
콰창!
파괴는 계속됐다.
그나마 멀쩡했던 스테인드글라스가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비산하는 유리 파편에 반사되어 산란하는 빛줄기가 마치 여신의 눈물 같았다.
“천벌...! 천벌을 받을 걸세!!”
어느 작은 왕국의 흥망성쇠를 지켜봐온 신전.
수백 년 동안 한 자리에 터를 잡고 사람들을 보살펴온 레베카 신전의 최후를 목격한 노년의 사제가 피눈물을 흘렸다.
“천벌은 지금 너희가 받고 있다.”
대답하는 사내의 표정이 무심하다.
템빨그림자단의 어쌔신들.
그들은 감정이 결여된 듯했다.
대륙 각지에 존재하는 레베카 신전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파괴하고 다닌다 하더니, 소문대로 기이했다. 인간이 아닌 병기였다. 폭력이 형상을 갖춘 느낌이었다.
레베카교의 사제들은 그들로부터 어긋난 광기를 엿봤다.
눈빛에 깃든 생각을 읽은 걸까.
“우리들의 눈에는 너희가 광신도다.”
어쌔신들이 속내를 밝혔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레베카 여신을 믿고 따르는 사제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쾌했다.
이게 분노와 혐오라는 감정일까.
인간성을 되찾으라고 명령하신 란스티어의 말씀을 상기하며 말해본다.
“교황청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들어 알고 있을 텐데. 여신이 보낸 천사가 인마대전을 앞두고 인류의 반목을 유도하지 않았나. 음흉하고 간악했다. 실제로 현장에 있던 레베카 교인들은 템빨신을 섬기겠노라 스스로 맹세하였지. 너희들에게 정상적인 분별력이 있다면 그 하얀 사제복을 진즉에 벗었을 터인데.”
“소문이 사실이라고 할지언정 그것은 천사의 소행이지 여신의 소행이 아닐세.”
“...? 천사를 보낸 게 여신이다.”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네. 여신을 의심하는 전제부터가 잘못 된 것일세. 여신께서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창조하셨거늘 어찌 인간이 여신의 뜻을 의심한단 말인가? 큰 시련이 닥칠수록 여신을 믿고 기도를 올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거늘... 하기야, 살인을 업으로 삼은 그대들 살수가 어찌 여신의 자애를 이해하고 헤아리겠나...”
“...”
역시, 대화란 힘들다.
새삼 깨달으며,
꽈득!
어쌔신 조장은 노년 사제의 목을 꺾어 쓰러뜨렸다.
죽이진 않았다.
앞으론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란스티어의 명령이 있었다.
지금의 템빨그림자단은 단순한 살인병기가 아니다. 신념으로 움직였다. 당대의 란스티어 페이커에게 그렇게 교육 받았다. 잃었던 감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감정 탓에 때때로 불편하고 불쾌했지만... 전보다 빠르게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무언가를 지키고자 할 때는 한계를 초월하는 힘이 발휘되곤 했다.
“흉물을 태우고 이들을 연행해라.”
조장이 명하자 고개를 끄덕인 어쌔신들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신전의 잔해를 불태우고 사제들을 포박했다.
대륙 각지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사건들이었다.
레베카교의 흔적이 차츰 세상에서 말소됐다.
그 광경을 높은 하늘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천상의 신들은 아니다.
천상과 비교해서 지상과 아득히 가까운 상공에 선 두 사내였다.
“나는 헬레나가 단명할 거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번츠델.
악룡 번헬리어의 피를 이은 반용족의 로드가 새카맣게 일렁이는 날개를 활짝 편 채 하늘에 올라있다.
“그 아이는... 콧대가 너무 높았어. 자신의 힘과 이상의 괴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날뛰어댔다. 급기야 선대들이 우리 혈족을 위해 가꿔놓은 울타리를 벗어났지. 죽을 운명이었던 거야.”
본래 당대 로드가 됐어야할 자는 헬레나였다.
전대 로드가 ‘번’이었으니 당대의 로드는 ‘헬’이여야 했다.
하지만 헬레나는 울타리를 벗어나길 원했다. 자신이 로드가 되는 순간 혈족 전부를 카오스 산맥으로 이주시키고 힘을 쌓아 지상을 지배할 거란 포부를 밝혔다.
혈족의 멸망을 앞당기겠다는 뜻과 같았다.
그녀가 비난했던 ‘제국과의 소꿉놀이’는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형성 된 생존 전략이었으니.
“나는 일찍부터 초월자를 목격했다. 그랜드마스터 그 괴물 녀석 말이다. 다른 혈족은 끝내 놈을 인간이라는 이유로 업신여겼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아봤다. 어째서 선대들께서 우리 혈족을 좁은 울타리에 가둬놓았던 건지.”
반용족은 드래곤의 피를 이었다. 혈통에 기인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세인은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다.
하지만 번츠델은 달랐다.
하필 헬레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그는 반용족의 선민의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처음부터 간파했다.
세상은 너무 넓다. 진정으로 강한 자들에게 있어서 반용족은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질 좋은 뼈와 비늘을 취할 수 있는.
반용족은, 스스로 믿는 것과 달리 그리 위대한 종족이 아니라는 게 번츠델의 판단이었다.
하여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힘을 쌓을 시간.
“템빨왕이라는 자 또한 초월자라고 했나. 더군다나 신격까지 쌓았다고... 쯧, 우라질. 그랜드마스터보다 훨씬 더 고강하겠군. 세상에서 가장 높은 벽을 넘었다고 생각하자마자 더 큰 산을 마주한 심정이다.”
“그 산이 반용족을 지키는 새로운 울타리가 되어줄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오 네 말대로 이번 기회가 우리에겐 두 번 다신 없을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타는 신전을 부감하며 말하는 번츠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너무 난폭하군.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인이 무엇이든 인류의 역사와 함께 존재해온 레베카교를 저토록 처참하게 짓밟다니... 힘에 취해 후환을 감안하지 않는 건가? 아니, 헬레나를 망설임 없이 죽였던 전력이 있음을 떠올려 본다면 타고난 성정이 흉포한 듯한데...”
헬레나는 명색이 로드 후보였다. 능력과 재능의 수준은 차치하고 고귀한 왕족이었다.
그녀를 죽였다는 건 반용족과 척을 지는 걸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의 템빨왕은 지금만큼 고강하지 못했을 텐데도.
게다가 지금 이 순간 하오를 통해서 화친을 종용하고 있다. 염치가 없다. 너무 제멋대로다.
“그자는 안 돼... 통제가 불가능한 유형의 인간이다. 상식적이지 않을 테지. 한 배를 타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어차피 침몰하게 될 배에 집착할 이유도 없고.”
“...”
하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고도가 너무 높아 숨 쉬기도 벅찬 마당에 목적마저 이루지 못하게 생겼으니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그는 번츠델을 설득해야 했다.
그것이 라우엘의 바람이라서가 아니다.
하오는 순수하게 인마대전을 염려하고 있었다.
인마대전은 사람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처절하고 힘든 전쟁이 될 거라는 게 그의 예상이었다.
인간들에겐 반용족의 힘이 필요했다.
이참에 반용족이 양지로 나와 인간과 교류하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반용족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오에게도 많은 이점이 생길 테니.
“그리드가 감정적이긴 합니다.”
“그럼 그렇지.”
번츠델이 등을 돌렸다. 더 이상의 대화엔 의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대로 떠나려던 그가 멈춰 섰다.
하오의 올곧은 음성이 귓전에 선명히 스며든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동료나 백성에게 작은 위협이라도 생기면 즉시 달려가 앞뒤 분간하지 않고 싸워왔습니다. 상대가 악마이든, 천사이든, 설령 신일지라도 구분하지 않고 맞섰죠.”
“...”
“아마 헬레나님도 그리드의 백성들을 건드렸던 게 아닐까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단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적어도 저는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오는 그리드의 옛 성격이나 행보 같은 걸 상세히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다.
템빨국의 백성들은 늘 웃는다. 플레이어와 NPC를 구분하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영주로 취임한 영지 대부분이 ‘누군가의 지옥’으로 전락했던 것과 상반됐다.
“괜한 원한을 살 인물이 아닙니다. 그리드가 만인의 적이 될 가능성은 단언컨대 없습니다. 앞으로 그리드를 적대할 자들은 타고나길 악(惡)하여 어차피 인류의 적이 될, 그런 놈들일 테죠.”
“예를 들어 번헬리어님?”
“...꼭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큭큭, 됐다. 좋은 술이나 준비해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한 번쯤 만나보고는 싶군. 봐서 정 안 되겠다 싶으면 개뿔, 그때 가서 도망치면 되는 거고...”
로드가 된 이후, 번츠델은 제국과의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황제가 바뀌는 동안 같은 태도를 관철했다.
헬레나의 표현대로 전쟁이 소꿉놀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잠자코 지켜만 봤다.
그랜드마스터에게 패배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랜드마스터와 싸우는 도중에 이성을 상실하여 혈족까지 절멸시킬 수 있음을 경계했을 뿐이다.
악룡 번헬리어의 피를 가장 짙게 이은 자.
반용족의 왕이자 초월자인 그가 템빨국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
“우리 엄청 강해지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벨린이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지옥의 살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다른 일행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덧 원정대는 지옥의 고달픈 환경에 완전히 적응해버렸다.
더 이상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능력치 상당수를 봉인당하는 페널티에 발목을 붙잡히는 일 없이 악마들과 마족들을 퇴치했다.
“엄청 강해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어어어엄청나게 강해지고 있는 거지. 난 벌써 레벨 네 개나 올랐다. 이벨린 넌 여섯 개쯤 올랐을 거 같은데?”
“헤헷.”
Satisfy와 현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보상에 있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보답 받기 힘든 현실과 달리, Satisfy는 고생하는 만큼 보상을 얻는다. 노력과 보상이 정비례했다.
처음에는 가혹하게만 느꼈던 지옥에 적응한 시점부터 원정대는 꽃길을 걷게 된 셈이다. 레벨과 스킬 경험치를 전례 없던 속도로 쌓아올렸다.
일행이 극한의 한계에 직면할 때마다 지옥 규제 스킬을 사용해준 유라의 공로가 가장 컸다.
성녀 루비의 지원과 가끔 오아시스처럼 나타나는 중립지역의 존재 또한 큰 도움이 됐다.
지옥의 중립지역은 지상과 똑같았다.
인간과 모습만 다를 뿐인 마계의 주민들이 법규와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도덕과 평화가 있었다. 일행에게 쉼터가 되어주었다.
야탄의 신상이 존재하는 곳에선 살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때문이라 하는데, 어째서 악신의 상징이 평화가 된 것인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대로 쭉 빠르게 성장하다가 갓리드가 만들어놨다는 새로운 아이템까지 보급 받으면...”
이벨린과 함께 신나서 떠들던 극검이 입을 다물었다.
유라와 크라우젤의 시선이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어서 지슈카와 페이커, 그리고 유페미나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극검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모든 일행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그러진 별들이 어지럽게 얽힌 밤하늘에 핏물마냥 번졌던 사특한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별들이 본모습을 되찾았다.
핏발 선 수만 개의 눈으로 사위를 노려보던 지옥달이 눈을 감고 찬연히 빛났다.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이다.
평범하게 늘 봐왔던 밤하늘이었다.
지상에 있어야 할 풍경이 지옥의 끔찍한 하늘에 덧씌워진 것이다.
“이게 무슨...?”
“설마...!”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은 일행의 시선이 유라에게 쏟아졌다.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됐군요.”
익히 대비해온 전조다.
지옥과 지상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곧바로 장관이 펼쳐졌다.
광활한 하늘 곳곳에 수천 개의 포탈이 생성됐다.
이곳 21번 지옥에만 말이다.
“미친...”
포탈을 향해 날아가는 마족과 악마들의 모습을 목격한 일행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악마들의 침공이라는 게 저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였어? 이래서야 걷잡을 수가...”
“이런 빌어먹을! 저 포탈 뭐냐고 대체!”
전조가 발생하는 시점부터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대응할 시간이 있을 거라고 예상해왔다.
이렇게 바로 대량의 포탈이 열리고 악마와 마족들이 즉시 포탈을 이용해 지상을 침공하게 될 거라곤 상정하지 못했다.
무저갱, 혹은 번헬 열도와 연결되는 특정 공간으로 집결하는 게 우선일 거라고 보았었으니까.
게다가 그 통로를 이용하는 인원에 어느 정도 한도가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지옥의 군단이 지상에 순차적으로 진입할 거라고 예측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지상 전역에 악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일행이 혼란에 빠진 동안 유라는 신속하게 행동했다. 즉시 지옥문을 열었다.
“우선 세희 양, 지슈카, 크라우젤...”
가장 먼저 지상으로 넘어갈 인원을 유라가 지목하는 그때였다.
꽈아아아앙!!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문을 가로막았다.
머리가 3개 달린 짐승이었다. 몸집이 코끼리보다 족히 4배는 컸다.
그 위에 묵색의 갑주를 무장한 악마가 탑승해 있었다.
“지상에서의 전쟁 따위엔 관심이 없다만... 너희들을 순순히 보내주고 싶지는 않군. 감히 지옥에서 소란을 피운 대가는 치러야하지 않겠나.”
[제20위 대악마, 윤회의 강을 수호하는 흑기사 ‘엘리고스’가 출현하였습니다.]
[엘리고스는 생(生)을 부정합니다. 당신의 종족이 언데드로 변경됩니다.]
[엘리고스는 종종 월권을 행사하여 영혼의 윤회에 간섭합니다. 엘리고스에게 사망 시, 50퍼센트의 확률로 ‘부활 불가’의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페널티가 발생할 경우 24시간 동안 재접속이 불가능합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마수 ‘켈베로스’를 목격하였습니다.]
[켈베로스의 여섯 개 눈동자를 마주하고 깊은 절망에 휩싸입니다. 감각에 문제가 생깁니다.]
[켈베로스의 숨결에 화염 내성과 냉기 내성, 중독 내성이 대폭 저하됩니다.]
인마대전 개전.
초전(初戰)의 무대는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