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3화
──!
따사로운 햇살에 물든 창문 너머로 하스터의 비명이 새어 들어온다.
음성이 워낙 낮고 울림이 깊어서 그런지 비명소리조차 듣기에 나쁘지 않다. 새들의 지저귐과 어우러져서 음악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드는 용광로 앞에 선 채 고민 중이었다.
고작 며칠 만에 실력이 크게 오른 하스터가 7개의 갓 핸드를 경직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감탄할 여력은 없었다.
‘여태껏 없던 화력이 필요하다.’
드래곤 웨폰의 형태는 결정했다.
칼날을 완만한 곡선으로 단조할 계획이다.
검(劍)이 아닌 도(刀)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비반과의 대련 도중.
검무를 전개하는 한편 ‘낙월검을 뽑는’ 순간 그리드는 한계를 느꼈었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는 행위.
그리드에겐 0.1초 단위로 가능한 일이다. 보통 사람은 반응도 못할 속도였다.
몇 년 동안 의식해서 훈련해온 덕분이다. 남들과 비교해서 훨씬 잦은 아이템 스왑을 해야 했으니.
하지만 그리드는 느리다고 판단했다.
비반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였다.
만약 비반이 낙월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경계했다면 그리드의 아이템 스왑을 저지했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싸우게 될 적들 중엔 비반처럼 강한 존재가 수두룩할 거다.’
그리드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면서 4차 전직한 극검의 발검술과 발도술을 떠올렸다.
검이란 베기와 찌르기 양면에서 유용한 무기. 온전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대개 직선의 형태를 띤다.
베기에 특화되어 곡선을 그리는 도와 비교했을 때 칼집에서 뽑아지는 속도가 느렸다.
칼날의 길이나 형태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팔을 더 길게 뻗어야하기 때문이며 칼집과 칼날의 마찰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Satisfy에서 발도술, 혹은 발검술이란 칼집을 활주로 삼아 참격에 가속을 더하는 기술이기에.
하여 극검은 허리에 검과 도 2자루의 칼을 패용한다.
순전히 쾌를 추구할 때는 발검이 아닌 발도를 이용했다. 오직 한 자루의 검으로 승부했던 3차 전직 시절과 비교해서 훨씬 빨랐다.
상대방 입장에선 뜬금없이 납도(納刀)하는 모습에 의아해하다가 뒤늦게 자신이 베였다는 사실을 자각할 정도로.
그리드는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석상룡 구젤의 어금니로 만드는 신검은 도의 형태로 늘 허리춤에 패용하고 다닐 것이다. 최대한 신속하게 뽑을 수 있게끔.
공교롭게도 발도술 관련 스킬이 없지만 괜찮았다.
발도술 스킬은 발도를 ‘벤다’는 공격 행위로 연결 짓는 수단이다. 발도를 단순히 ‘검을 뽑는’ 행위로 이용할 계획인 그리드에겐 별 필요가 없었다.
봐서 정 필요할 것 같으면 태양마차에서 ‘무신의 비급 뽑기’라도 시도해봐야겠지만 굳이 필요할 가능성은 적다.
‘낙월검도 2차 개변 때 도(刀)로 바꾸는 게 좋겠지.’
그리드의 검무 중 상당수가 찌르기가 아닌 베기의 형태를 띤다. 무패왕의 검술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장 강력한 계수를 지닌 락(落)과 살(殺)이 떨어지고, 찌르는 형식이므로 ‘검’을 완전히 버려선 안 되겠지만 낙월검처럼 베기에 용이한 무기는 ‘도’로 가꿀 가치가 있다.
“...”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본다.
초연살파극과 무패왕의 검술을 연계하는 순간을 가정한다.
초연살의 검기는 찌르기로 표출되니 기존의 신검으로 펼친다. 신화 클래스로 격상하고 자유로워진 왼손을 허리의 칼집에 가져가면서다.
파까지 쓴 직후에 칼집에서 낙월검을 뽑는다. 쾌속의 발도와 동시에 아이템 합체를 전개한다.
그리고 파의 회수 동작을 무패왕의 검술 동작과 일체화시킨다.
이때 낙월검의 ‘단 한 번 벤다.’는 페널티가 발생하며 아이템 합체가 풀린다.
오른손에는 신검이, 왼손에는 낙월검이 따로 쥐어진다.
낙월검을 손에서 놓는다. 갓 핸드가 회수할 것이다.
오른손의 신검으로 마무리 종베기를 휘두르며 초연살파극의 검무를 마친다.
빈 왼손은 다시 허리춤에 가있다.
낙월검과 나란히 패용하고 있던 드래곤 웨폰을 발도한 뒤 또 다른 검무나 무패왕의 검술을 새롭게 전개한다.
빛살처럼 뻗어지는 검광에 상대방은 쉬이 반응하지 못한다.
단, 이때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다른 신검은 손에서 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드에겐 쌍수검 관련 패시브 스킬이 없으니까.
허리에서 검을 뽑는 순간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신검을 버려야만 공격의 위력이 보존된다.
버려진 신검은 낙월검처럼 갓 핸드가 회수할 거다. 염룡검이라면 스스로 움직이며 그리드를 보조할 터다.
신격으로 쿨타임을 초기화시킨 아이템 합체를 써서 두 자루 검을 합치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 양손에 남는 검을 한 자루로 만들면 된다.
쌍수검 페널티를 없애는 게 관건이니.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무신의 비급을 통해서 쌍수검 패시브 스킬을 얻는 거지만... 어찌됐든 발도술을 활용하면 전투를 좀 더 빠른 속도로 운영할 수 있다. 집중력을 유지한다는 가정 하에 전투의 흐름을 상시 주도하는 게 가능해.’
요점은 하나다.
아이템을 인벤토리에서 꺼내서 스왑하는 것보다 발도술을 써서 스왑하는 편이 근소하게 빠르고 유리하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도(刀)를 만들 이유는 충분했다.
역시, 첫 번째 드래곤 웨폰의 형태는 도로 정한다.
확실히 결정한 그리드에게 남은 문제는 이제 하나뿐이다.
화력.
석상룡 구젤의 어금니를 녹일 정도의 화력이 필요했다.
백린목으로는 부족한가?
아니다.
신목의 위명은 헛되지 않다.
다만 굉장히 많은 백린목이 필요해 보였다.
최소 8톤 이상의 백린목을 한꺼번에 장작으로 태워야 이 단단한 어금니를 간신히 녹일만한 화력이 발생하지 않을까.
직감적으로 알았다. 통찰력과 직업 효과 덕분에 알게 된 게 아니라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깨닫는 영역이다.
백린목의 수량은 충분하다.
동쪽의 맹우들이 꾸준히 보내주고 있으니.
‘커다란 용광로가 필요하겠군.’
축성(築城)하듯 쌓아올려야 할 듯했다.
넉넉잡아 10톤의 백린목을 구겨 넣을 정도의 화로라면 응당 거대해야했다. 무척 큰 공사가 될 것이다.
‘꼭대기는 반구(半球) 형태로 최대한 낮게 잡아서 열기를 되도록 강하게 붙잡고 순환시킨다.’
그리드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구석에 앉은 삐까소가 그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혹 집중을 방해할까 염려한 건지 숨을 죽인 채였다.
“실례.”
그리드가 붓과 종이를 빌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용광로의 형태를 실시간으로 그렸다. 들불처럼 번지는 영감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노력에 비해서 그림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구조는 비교적 정확해서 그리드가 정확히 어떤 형태의 용광로를 원하는지 알아보기 쉬웠다.
여기서 아이템 창조까지 사용하면 완벽한 거대 용광로의 설계도가 탄생할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굳이 스킬을 소모하지 않았다. 케를 옹에게 그림을 넘겼다.
드워프 케를 옹은 특히 건축에 재능이 있으므로 뒷일은 그에게 맡길 심산이었다.
“만들 수 있겠습니까?”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그림을 살펴보고 그리드의 의도를 읽은 케를 옹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오. 내 최고의 용광로를 만들어드리지. 기술자를 최대한 지원해준다면 8일로 충분할 것 같소이다.”
용광로의 구조와 크기를 생각하면 8일도 빨랐다. 각지에서 건설 중인 요새 탓에 라인하르트에 보유 중인 석재가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만들기 위한 용광로라는 점이다.
몹시 중요하게 쓰일 것을 감안하면 8일이 아니라 몇 달이 걸려서라도 세심하게 만들어야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너무 길다고 느꼈다.
인마대전이 언제 열릴지 모를 판국이라는 게 문제였다.
“저도 최대한 협력할 테니까 시간을 단축했으면 좋겠는데요.”
“음... 전하께서 친히 도와주신다면야...”
케를 옹이 셈해보았다. 그리드의 손재주를 상당수 구현하는 서른 개의 갓 핸드가 발휘하는 기술력까지 감안했다.
“...나흘. 나흘까지 줄일 수 있소. 그 이상은 힘들 듯하오. 대량의 땔감을 한꺼번에 태우기 위해선 풀무질이 효율적으로 작용하게 해야 하는데 여기에 복잡한 기술을 적용해야 해서...”
그리드와 갓 핸드에겐 건축 기술이 없다.
한데도 기간이 절반이나 단축됐다. 모든 제작 기술에 관여하는 템빨신의 기술이 빛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만족하지 못했다.
‘나흘... 거기에 무기와 갑옷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 일주일이 소요된다.’
혹 그 사이에 인마대전이 발발하면 끔찍하다...
‘...뭐, 괜찮겠지.’
여태껏 별 일 없다가 내가 틀어박히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인마대전이 열릴 확률이 얼마나 될까.
S.A가 여태껏 나를 무수히 견제해오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티가 나게 견제한 적은 드물다.
쓸데없이 걱정하는 꼴이다.
마음을 추스른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자들을 소집할 테니 곧바로 시작하시죠.”
“좋소.”
두 사람은 공터로 나갔다.
비반과의 대련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공간이다.
그나마 별도의 시설이 없어서 물질적 피해는 적었다.
행정관 라빗이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 조금 훌쩍이기만 했을 정도로 손해가 경미했다.
그리드와 비반이 주변을 살피며 싸웠다는 증거다.
만약 두 사람이 앞뒤 분간도 못하고 싸웠다면 템빨성 전체가 반파됐을 테니까.
완전히 파괴됐을 가능성은 적다.
억만금을 들여서 성 레벨을 MAX로 찍은 거로 모자라 케를 옹이 직접 개조까지 한 터라 템빨성의 내구력은 세계 최고의 요새라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였다.
템빨성이 현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인 이유 중 하나다.
“하스터 님, 죄송하지만 앞으로 나흘 정도는 저기 구석에서 허수아비로 훈련하시겠어요? 아니면 사냥이라도 다녀오시던가요.”
“...알겠네.”
그리드는 하스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첫인상부터 나쁘지 않았고 성격이 정말로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재력도 엄청 높았다.
무엇보다 게임계의 전설이기도 하니, 예우하는 의미에서 동생처럼 편하게 대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스터는 그리드를 도무지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나흘이나 방치할 거면 차라리 지옥에 보내달라는 부탁도 차마 하지 못했다.
‘왜 게처럼 걷지... 새로운 훈련법인가?’
시야에서 차츰 사라지는 하스터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그리드가 이내 흐뭇하게 웃었다.
어떤 상황이든 수련과 결부 짓고 정진하려고 노력하는 하스터를 한층 더 좋게 본 까닭이다.
“시작하죠.”
“영혼을 바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겠소.”
케를 옹과 함께 두 팔을 걷어붙인 그리드가 작업을 개시했다.
건축자재와 기술자의 공수는 이미 라우엘에게 부탁했다.
그리드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S.A그룹은.
아니, 정확히 말해서 모르페우스는 그리드의 생각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다.
***
“자네, 혹시 과거에 큰 실수를 범한 적이 있는가?”
템빨검탑.
얼떨결에 제1대 검탑주가 된 비반이 청발의 여인을 마주본 채 묻는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 너머로 고요하게 자리 잡은 여인의 눈동자가 한 순간 흔들렸다.
어떤 하찮은 상인이 감히 그리드 전하를 먼 하늘까지 날려버렸던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오직 지키기 위한 검술이라. 남다른 재능을 타고났으면서 그 재능을 낭비하고 있군.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하고 잃었던 경험이라도 있나보지.”
“...잃지는 않았습니다.”
대답하는 메르세데스의 눈빛이 표표하다.
비반의 의식에 한 순간 그녀의 눈만 인식됐다. 깊은 탑의 어둠을 밝히던 조명들이 일순 꺼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혜안.’
궁극에 이르러 만물을 관조하게 될 눈.
신조차도 두려워할 능력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언젠가 절대적인 존재들을 징치할 힘이다.
용살, 혹은 신살의 자격을 반드시 쟁취할 가능성이었다.
단, 그때까지 무사하다는 전제 하에.
“불편해 보이니 굳이 지나간 과거는 캐묻지 않겠네. 자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야. 타인을 지키고자 스스로를 희생하는 검은 결국 약한 검이라는 것. 진정으로 강한 검은 타인을 지킬 때 굳이 본인을 희생할 필요가 없지.”
비반은 무수히 목격해왔다.
화려한 재능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저물었던 천재들의 모습을.
메르세데스도 그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오직 타인을 지키기 위한 검이었으니까.
반드시 죽게 될 운명이라고 못 박아도 하등 문제가 없을 수준이다.
쯧, 혀를 찬 비반이 결심했다.
“각오 단단히 하게나. 탑주의 의무로 자네를 강하게 단련시키도록 할 테니.”
템빨검탑주로서 짊어진 책임이 있다.
고작 일주일짜리 의무라고 하나 비반은 좌시하고 싶지 않았다.
메르세데스의 재능이 아까워서.
오늘날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사의 자격을 상실할지언정 그것이 미래의 동량을 지키기 위한 길인 이상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런 식의 숭고한 정신에서 비롯된 선택이 아니다.
단지 비반의 성격이 단순하고 명료할 뿐이다.
바뀌지 않을 본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