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70권 - 2화
“돌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개념들이 있다.
명성이 그중 하나다.
피아로가 이끄는 황금기의 적기사단.
사하란 제국에 무수한 영광을 안겼던 그들은 제국 내에서 전설로 회자되고 있었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뒤부터 쭉 그랬다. 루반나를 격동시켰던 무패왕의 위명이 이 정도 속도로 번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쾌속하게 퍼졌다.
“...”
조국이 낳았고, 조국이 버린 영웅들.
치열한 접전 끝에 다크엘프 왕을 포로로 사로잡는데 성공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제국군 기사들과 병사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감격과 슬픔이 교차한다.
귀결되는 감정은 아쉬움이다.
평생 조국에 헌신했던 저들이 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나야 했나.
영면에 든 후에도 칭송받아 마땅했던 자들이 명예를, 목숨을, 가족을 빼앗기고 고통 받았다.
어째서 조국은 저들을 믿어주지 못했나.
어째서 우리는 저들을 지켜주지 못했나.
천년 동안 이어졌어야할 위대한 제국의 역사는 저들을 등진 순간부터 요원해진 걸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제국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와 함께 변했다.
바사라 황제께서는 만년지계의 일환으로 다양한 개혁을 단행 중이시다.
저들을 쫓아냈던 제국과 지금의 제국은 엄연히 다르다.
설득할 수 있을지도...
“고생들 했네.”
“...”
제국의 기사들이 상념을 떨쳐냈다.
등 돌려 떠나는 피아로와 영웅들을 붙잡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함께 해달라고 감히 청하기엔 그들의 얼굴에 그늘 한 점 없던 탓이다.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던 다크엘프와의 전쟁에서 상처투성이가 되고도 그들은 웃고 있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기껍다는 듯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적막 속에서 레쉬가 크게 외쳤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뒤늦게 경례를 올렸다.
영웅들이 어깨에 짊어진 템빨국의 깃발을 눈에 담으면서였다.
제국의 깃발도 한때는 저러했을까.
대륙 어디에서나 위세를 잃지 않고 펄럭였을까.
새삼 궁금해 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표정이 차츰 평온해졌다.
제국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 한들 템빨국이라는 맹우가 곁에 있음을 상기했다.
인마대전을 앞두고 경계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지상과 지옥.
전조처럼 다가온 온갖 혼란과 풍파가 마냥 두렵지만은 않았다.
템빨국이 함께였고, 영웅들이 템빨국에 있었기에.
***
“지금 상태로는 피해만 누적될 뿐입니다. 전장을 축소해야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대륙은 거대하며 그중 절반 이상이 제국의 영토다.
제국엔 시차가 발생하는 지역이 무려 6개나 존재했다.
서부가 깊은 밤일 때 동부는 아침인 식이다.
최근 템빨국으로부터 워프게이트를 도입하긴 했지만 모든 지역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본격적으로 운영 중인 워프게이트는 아직 몇 개 되지 않았다.
워프게이트를 설치하고, 유지하고, 작동시킴에 있어서 천문학적인 자원과 고급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장을 축소한다고요. 백성들을 중부로 피난시키자는 말인가요.”
“그렇사옵니다. 고향을 떠나게 될 백성들이 당장은 고달프겠으나 국가에서 성심성의껏 지원한다면 적응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당분간 산업과 경제가 상당수 마비될 것입니다. 그 상태로 피난민들을 지원하다가 국고가 바닥날 수도 있사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좌시해선 안 됩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대소 신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당파를 가리지 않고 뜻을 같이했다.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마인들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이 황도에 전달된 직후였다.
마인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대도시와 거리가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갈수록 피해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황실과 귀족들이 운용하는 병력에 한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산간오지의 경우 인명피해를 추산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수백만 병력을 거느렸으면 뭐하는가.
그들이 지켜야할 백성의 숫자는 수억 단위이며 제국의 땅 덩어리가 커도 너무 크다. 사방에 흩어진 백성들을 온전히 보살피는 게 불가능했다. 이대로는 마인들의 숫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백성들을 되도록 안전한 곳에 집결시키는 편이 지키기에 용이하니 피해를 축소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나마 위안인 사실은 대귀족들의 경우 자신의 영토를 책임지고 보호할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피난민의 숫자는 백성 전체의 6할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그마저도 굉장한 숫자였지만.
“옳은 말이에요. 백성들의 피난과 정착을 최대한 지원하세요. 자원과 인력을 아끼지 말고 투입하세요.”
명하며 황좌에서 일어난 바사라가 금관을 벗었다. 가문대대로 내려온 보물이다. 공작 시절부터 그녀를 상징했던 관이 황관을 대신해왔다.
바사라는 그것을 재무대신에게 건넸다.
“황실 금고 또한 개방하겠습니다. 이 관을 비롯하여 작은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백성을 위해서 써주세요.”
“폐, 폐하...”
“백성이 없으면 제국도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부디 최선을 다해주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반드시 귀족들의 협조도 받아내겠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바사라가 황제가 된 이후 제국은 많은 걸 미래에 투자해왔다. 제국의 미래가 아닌 대륙의 미래였다. 그것이 나아가 제국의 천년 역사를 이끌어줄 힘이 되리라 믿어서였다.
당장 입은 손해가 무척 컸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하필 이때 악마들의 대규모 침공이 예견된 것이다. 황실의 피해가 누적되었고 재정이 휘청거렸다.
제국은 위태로웠다. 빙판길을 걷는 듯했다.
하지만 바사라의 심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방계 출신으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가 자식들을 제치고 친히 그녀에게 황위를 양도했다. 능력적인 면에서 손색이 없었다. 난국 속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찾아 궁리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계속 모범을 보여야 지방 호족들도 좌시하지 못할 터. 드디어 관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쳤으니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할 때야.’
관을 벗으니 머리가 휑한 기분이다.
적응해야할 문제였다.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고 관료들과 머리를 맞댄 바사라가 백성들을 피난시킬 구역들을 일일이 살폈다. 많은 부분을 세심하게 논의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부 마인들의 씨가 말랐다고 합니다.”
전령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대부분 남쪽에서 온 전령들이었다.
해상무역은 제국 경제에서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굉장히 많은 인구와 시설이 남부에 밀집해 있었다.
부가 집중되는 지역이니만큼 한두 명의 대귀족이 독점하지 않고 황실과 여러 귀족이 나눠서 통치했다. 귀족들이 함부로 사병을 들이지 못했다. 인구에 비해 군사력이 약했다.
하여 남쪽으로 가장 급히,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했던 것인데 병력이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고.
마인 소굴이 하나도 어김없이 쑥대밭이 됐다고 한다.
“각지의 목격담이 같습니다. 백발의 노인과 거구의 사내가 마인들을 처단했다고 합니다.”
“노인이라고?”
관료들이 술렁였다. 강력한 마인들을 고작 노인과 사내 하나가 궤멸시켰다고 하니 섣불리 믿기 힘든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대륙은 광대하다. 이름조차 생소한 초고수가 불쑥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 황실 관료쯤 되면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무패왕의 이름을 역사에서 지운 주체가 제국 황실 아닌가.
제국이 숨기고 지운 이름 중엔 그런 거물들이 더러 있었다.
당장 적야의 대도만 해도 민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제국의 보물을 몇 개나 털어먹은 그자에 대해서 공표했다간 황실의 체면이 상한다는 전대 황제들의 엄명 탓에 도리어 철저히 숨겼다.
민간이 무패왕과 적야의 대도를 모르듯, 황실 관료들이 모르는 초월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제국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들 덕분에 병력에 여유가 생겼다.
‘노인과 거구의 사내라고.’
바사라는 두 사람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와 마갑 첸슬러.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쥬앙데르크는 죽지 않았다. 남은 생을 백성들을 위해 쓰겠노라 천명하고 황궁을 떠났다.
첸슬러의 실종도 거짓이다. 쥬앙데르크를 따라나섰을 뿐이다.
“후훗.”
길게 늘어지는 소매로 입가를 가린 바사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분투하는 제국신민들과 쥬앙데르크, 그리고 연합국을 집결시킨 그리드...
안팎으로 든든한 조력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마음이 한 시름 놓였다.
***
비반의 취임식이 끝날 무렵엔 접속 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장간으로 돌아온 그리드가 작업 준비를 마쳤을 때 강제로 로그아웃 됐다.
현실로 돌아온 그는 피로를 잊었다. 들떠서 쉽게 잠들지 못한 채 고민에 잠겼다.
비늘에 이어서 두 번째 드래곤의 신체를 얻었다.
심지어 가장 단단하다는 어금니다.
그것으로 만드는 검은 ‘최소’ 핵세타이아의 소검과 필적하는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가능성 높은 추측이었다.
‘염룡의 숨결에 물든 광물’을 재료로 삼아 만든 검이 바로 <염룡검>이니까.
고작 숨결로 말미암은 부산물 따위가 에고가 깃든 신검을 탄생시켰다.
하물며 드래곤의 신체로 만든 검은 훨씬 더 대단할 게 분명했다.
‘한 가지 바람은 너무 강한 에고가 깃들지 않았으면 하는 건데.’
만약 진짜 드래곤의 성격과 비슷한 에고가 깃들 경우 통제하기 힘들 확률이 높다.
미식룡의 성격을 떠올려본 영우가 몸서리쳤다. 자칫하면 낙월검처럼 사용에 제약이 생길 수도 있다는 염려를 품었다. 최악의 경우 에고를 지우고 다른 자아를 부여해야 할 거라고 계산했다.
‘긴장되는군.’
그 어떤 역사나 전설에서도 드래곤 웨폰과 관련한 기록은 없다.
영우가 알기론 오직 지혜의 탑만이 드래곤 웨폰과 아머를 만들고 사용해왔다.
하지만 그 위력은 썩 훌륭하지 못하다.
탑의 결사 중에는 대장장이가 없으니까.
3좌 라드볼프가 마장기를 만들며 축적해온 기술과 거인족의 지혜를 바탕으로 대장일을 비슷하게 따라한 게 고작이었을 텐데, 겨우 그 정도로 재료의 잠재력을 전부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드래곤 웨폰을 만드는 건 그리드가 전설의 대장장이였던 시절에도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던 일이다.
실제로 드래곤의 비늘을 제련해서 만들었다는 비반의 무복은 질이 영 별로였다.
진정한 의미의 드래곤 웨폰은 그리드의 손끝에서 최초로 탄생할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이 안 온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영우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매달 정기 후원하는 수십 개의 재단 사이트에 일일이 접속해 정기 후원 금액을 무려 1.2배씩 인상했다.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만 원까지...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금액을 올리다보니 처음엔 몇 천 원으로 시작했던 후원금이 수천 배로 불어났다. 매달 후원하는 금액이 수천만 원 단위였다. 종종 수억 단위의 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내가 힘들 땐 아무에게도 도움 받지 못했는데 나는 왜 남들을 도와줘야 하나...
여전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엔 지금의 영우가 사람들에게 받는 관심과 사랑이 너무 컸다. 세상에 조금쯤은 보답하고 싶었다.
다만 기부는 익명으로 했다. 키보드 워리어들이 가식이네 뭐네 비꼴 게 뻔해서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기부금에 전자영수증 시스템이 도입된 터라 익명으로 기부해도 세액공제는 받을 수 있었다.
“됐다.”
좋은 일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며 마음이 진정된다.
영우는 짧게나마 숙면을 취했다.
드래곤 웨폰의 형태는 진즉에 정해놨다.
비반과의 대련에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
내일, 모든 걸 쏟아부을 각오다.
대장기술이 궁극으로 성장한 만큼 석상룡의 어금니를 충분히 잘 다룰 자신이 있었다. 아껴뒀던 비늘도 마찬가지다.
칸의 유작을 강화할 순간이 드디어 다가온 셈이다. 칸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게끔 주의하며 성능만 강화하는 식으로...
거기에 더해서 드래곤 웨폰과 아머의 세트 효과를 기대해 봐도 좋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