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92화 (70권) (1,382/1,794)

템빨 7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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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70권 - 1화

잘린 손을 챙겨놓을 필요가 없었다.

상처부위를 감싼 따스한 빛이 완전한 재생을 발생시켰다.

근육과 혈관, 뼈와 살이 실시간으로 수복되며 손의 형상을 갖췄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무지팡이가 한 대씩 후려칠 때마다 생생한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충격은 혈액과 기의 흐름을 촉진시켰다. 관절의 위치가 올바르게 맞물렸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뜻하는 대로 움직였다. 잃기 전과 똑같았다.

‘이게 성녀... 수백 년 만에 부활했다는 존재인가.’

하야테가 추측하기론 천상의 신들이 성녀를 몹시 경계한다고 하였다.

한데 이제와 무사히 탄생할 수 있던 배경은 무엇일까.

탐욕에 깃든 채 그리드와 연동하고 있는 여신의 축복도 거슬린다.

레베카교를 철수시킨 그리드에게 여신의 분노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건만 어찌 아직도 축복이 건재하단 말인가. 진즉 회수됐어야 정상이거늘.

“음... 고맙네.”

치료가 끝났다. 상념을 떨쳐낸 비반이 루비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함부로 보답을 약속하진 않았다.

루비가 검사라면 또 모를까, 성녀인 그녀에게 검성은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

검성이 아닌 탑의 결사로서 줄 수 있는 건 많았지만... 외부인에게 탑의 흔적을 남길 수야 없는 노릇이다.

“별 말씀을요. 저희 오빠 때문에 크게 다치셨으니 동생인 제가 책임지고 치료해드리는 게 당연한 걸요.”

주변의 술렁임이 잦아들어 있었다.

잔뜩 모였던 인파를 그리드가 해산시킨 덕분이다.

현장에 남은 사람은 그리드와 루비, 메르세데스와 비반이 전부였다.

“고작 손 하나 잘렸을 뿐인데 크게 다친 건 아니지. 실전이었다면 그 상태로도 이틀밤낮을 더 싸웠을 걸세.”

딱히 자존심을 세우거나 패배를 납득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리드가 혹시 이번 일로 죄책감을 품지 않게끔 반쯤 농담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비반은 알고 있었다.

그리드가 낙월검을 꺼낸 시점부터 승패는 정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격자들을 지키려다가 심상이 흔들린 것과 승부의 결과는 큰 관련이 없다. 다만 결과가 다가오는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다.

‘위협적이었던 건 월야철 뿐만이 아니야. 재능에 비해 성장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르다. 무패왕의 검술 원본까지 재현했고.’

가장 놀라운 점은 검무의 위력 증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검무를 쓰는 그리드의 모습은 다소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검무가 강제하는 동작들에 끌려 다니는 꼴이 마치 어른 손에 이끌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듯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검무를 통제하지 못했다.

보다 본질적으로 표현하자면 검무 자체가 문제였다.

검무란 어떤 의식의 행례수단에 불과한지라 무가치한 형(形)이 워낙 많았다. 통제가 가능하고 말고의 영역이 아니라 효율적이지가 않았고 그리드는 그 부분에 발목이 잡혔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리드는 검무의 형태를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는 경지에 올랐다.

그건 차라리 검술에 가까웠다.

세상에 단 한 사람.

오직 그리드라는 인물에게 적합한 검술이었다.

초월성을 띄고 있었다.

인간의 신체구조로는 도무지 구현할 수 없는 형태를 지녔기에.

물리법칙을 역행하는 검로가 쾌속하고 효율적이었다. 흉포하고 파괴적이었다. 검무의 다채로운 효과들과 맞물려 파멸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비반이 수백 년 만에 재현된 무패왕의 원본 검술을 보고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그리드의 검무가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다만 깊은 묘리는 없다.’

천재가 만드는 검술들엔 번뜩이는 무언가가 있다.

강렬한 영감을 기반으로 정립시킨 이론이 민간은 이해하지 못할 예술성을 발휘했다. 효율적이지 않게 보이는 부분이 변칙적인 장점으로 다가오곤 했다.

하지만 그리드의 검무는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삼아 발전한 형태였다.

지독하리마치 효율적이었다. 그 효율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물리법칙을 무시해야할 정도로.

천재가 만든 검술과는 결이 다르지만 민간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부분은 같았다. 그러므로 초월적이다.

‘대가의 검술이라는 게지.’

마치 무쌍검법처럼.

그리고 무쌍검법은 저 천재 뮐러의 간택을 받은 검술이다.

검성이었던 뮐러가 스스로 검술을 창안하지 못해서 무쌍검법을 익혔을까?

아니다.

천재가 만든 검술과 대가가 만든 검술의 차이점을 저울질한 끝에 최선의 선택을 내렸을 뿐이다.

그리고 무패왕의 검술은 천재가 만든 검술의 궁극이라 할 수 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극한의 위력이 발생하게끔 유도하는 검술.

비반이 보기엔 그것보다 차라리 그리드의 검무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더 낫다고 논하기에 앞서서 가슴이 그렇게 느꼈다.

‘예의범절이 부족해서 그렇지 알면 알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란 말이지.’

흐뭇하게 미소 지은 비반이 무쌍검법의 초식을 천천히 펼쳐보았다. 재생한 손의 상태를 점검하는 마지막 단계였다.

완벽했다.

“다행입니다.”

숨죽인 채 비반을 지켜보던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비반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내가 제법 나이를 먹긴 했네만 까마득한 후배를 걱정시킬 정도의 퇴물은 아닐세.”

말하며, 비반은 메르세데스의 두 눈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수한 별빛을 담았음에도 고요한 눈동자.

탑의 결사가 봐도 신비로운 저것이 결투 중 그리드에게 깃들었었다.

야수의 몸짓 같던 흉포한 검무를 세련되게 정제시켜 수십 년 후의 기술로 진화시켰던.

그때부터 급격히 상대하기 힘들어졌다. 무쌍검법의 수만 가지 검로가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화일까.

그리드라는 인물의 본질이 억눌린 형태였거늘.

아마 ‘진짜’ 수십 년 후의 그리드가 쓰는 검무는 혜안을 빌려 쓴 그리드의 검무보다 훨씬 더 위협적일 것이다.

“앞으로 그녀의 눈을 빌리는 건 되도록 자제하는 편이 좋겠네. 괜히 어울리지 않는 습관을 들일 우려가 있으니.”

“...”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 비반을 어째선지 메르세데스가 사늘하게 노려보았다. 우연히 본 루비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비반은 눈치 채지 못한 채 결계를 펼쳤다. 자신과 그리드를 세상으로부터 유리시킨 것이다. 은밀한 대화를 위함이었다.

“자, 약속한 선물일세.”

비반이 아공간에서 어떤 물건을 꺼냈다. 비반의 키만큼이나 거대한 어금니였다.

송곳니가 아니라 끝이 많이 뾰족하진 않았다. 살짝 돌출된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예기를 품고 있었다. 단단함은 탐욕과 비견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생명은 순환하지. 석상룡 구젤의 사체는 탑의 양분이 되었네. 뼈와 비늘은 결사들의 무구가 되었고 혈액과 살은 영약이 되어서 결사들에게 더 강력한 육신과 마력을 선사했다네. 그렇게 활용하다 남은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이 어금니일세.”

일부러 남겨둔 것은 아니다.

“구젤의 치아 중에서도 유독 단단한 탓에 라드볼프조차 뭐 어찌 손을 대지 못하더군. 아벨리오의 그림으로 변형을 주거나 월야철로 절제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래서야 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하여 관뒀지.”

비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랜 세월 기념품으로 전락한 애물단지였는데... 이제 보니 자네와의 만남을 대비해 세계가 안배해놨던 선물이 아닐까 싶군.”

비반은 신을 논하지 않았다. 신보다 세계를 높이 보았다.

신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레베카교의 사상과 완전히 대립하는 발언이었다. 탑의 결사들이 신을 불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자네라면 이것을 훌륭히 다룰 수 있을 테지.”

“...”

그리드가 어금니를 살펴보았다. 제련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소실되는 양을 감안해야한다.

두 자루의 장검, 혹은 한 자루의 대검이나 하나의 갑옷을 만들 수 있을 질량이었다. 투구나 장갑 등으로 만드는 건 사치다. 아무래도 보조 방어구는 갑옷보다 성능이 못하기에 먼저 만드는 건 순서에 맞지 않았다.

힐끔.

그리드의 시선이 비반의 검으로 향한다. 검신의 크기가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낙월검에 베이고 깨진 여파다.

담담하게 미소 짓는 비반과 시선을 마주본 그리드가 말했다.

“두 자루의 검을 만들 생각입니다. 비반 님의 검과 저의 검을요.”

“내 검을...?”

비반이 놀라서 말문을 닫았다. 잠시 멍하니 그리드를 바라보다가 눈빛에 담긴 마음을 엿보고 웃고 말았다.

“그것 참 고맙군... 영광일세.”

“여태껏 수많은 선물을 주셨으니 한 번쯤은 보답하는 게 맞죠.”

“...”

검성 비반은 속세에서 절대자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사람들은 그를 깊이 공경하며 극진히 섬겼다. 동등하게 보지 않았다.

비반은 깊은 고독을 느꼈다.

자신을 섬기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조금도 위안 받지 못했다. 그건 차라리 공양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속세를 떠나 탑에 오른 뒤엔 비슷한 처지의 결사들과 만나 서로를 위로했지만... 그조차도 고립을 대가로 얻은 일시적인 위안에 불과했다.

비반에게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없었다.

그 누구도 그를 동등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해주고 있었다.

공경이 아닌 친애의 의미가 담긴 눈빛이 겨울의 찬 공기를 잊게 만들 정도로 따스하게 다가왔다.

[지혜의 탑의 9좌 ‘비반’과 깊은 유대를 맺었습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군... 다음에 또 보도록 하세.”

턱수염을 긁적이며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티를 낸 비반이 검의 결계를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당장은 못 돌아가십니다.”

“못 돌아간다고? 왜? 누구 마음대로?”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비반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왜긴요. 비반 님 당신 때문이죠.”

“...?”

“사람들 앞에서 탑을 언급하시지 않았습니까. 함구령을 내리긴 했지만 혹시 또 모를 일입니다. 당신께서 사람들에게 심어준 인상이 워낙 강렬했으니까요. 당신이 말한 탑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사해보는 사람이 만에 하나라도 발생했다간 여러모로 골치 아파질 우려가 있습니다.”

“...폭력을 써야하나.”

목격자들을 찾아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면 기억상실증에 걸릴 희망이 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비반을 그리드가 말렸다.

“제가 이미 수습해놨으니까 너무 걱정마시고 당분간 연기 좀 해주시죠.”

“어떤 식으로?”

“아시다시피 라인하르트엔 템빨 마탑이 있습니다. 하지만 검탑은 없죠.”

“...검탑? 그런 요상한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네.”

“하지만 이곳에 생길 겁니다.”

“...?”

“안 그래도 몇 년 전에 마탑을 3개나 추가로 건설했는데 마법사의 숫자가 적어서 탑 하나가 빈 상태거든요. 거길 검탑으로 공표할 테니까 1대 템빨검탑주로 취임해주십시오. 취임식에 참여한 뒤에 며칠 머물면서 입탑하는 인원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는 시늉만 하시면 됩니다. 돌아가시는 즉시 2대 탑주를 선출하고 흔적을 지워드릴 테니까요.”

“나 검성이네만... 대륙의 이름난 천재들이 금은보화를 산처럼 싣고 찾아와 제자로 삼아달라고 해도 거절했던 내게 이제 와서 선생 노릇을 하라는 겐가?”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언젠가 사람들이 지혜의 탑을 알게 되고 그 계기가 비반 님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간... 프론잘츠 님께서 큰 벌을 내리시겠죠.”

“끄으응... 탑의 결사는 세인과 교류해선 아니 되건만...”

“결사가 아닌 템빨검탑주로 교류하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정체만 안 들키면 되잖아요.”

“끄응... 템빨검탑주... 이름도 마음에 안 드는군...”

“내키지 않으시면 마십시오. 비반 님께서 평생 청소만 하시게 되도 저야 뭐 상관없으니...”

“...일주일. 딱 일주일만 머물도록 하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검사가 템빨검탑의 1대 탑주로 취임하게 된 날이었다.

정체는 대충 둘러댔다. 대륙제일창 키리누스 같은 은거기인으로 소개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서 입탑 신청서가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근데...”

어쩌다보니 성대하게 진행된-비반의 요청으로- 취임식이 끝난 후.

메르세데스가 비반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며 입탑한 까닭에 홀로 대장간으로 돌아가는 길인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대체 왜 오셨던 거지? 그냥 놀러 오신 건가...?”

비반의 방문 목적을 도통 알 도리가 없는 그리드였다.

어찌됐든 잘 됐다고 생각할 뿐이다.

드래곤의 어금니를 얻었고, 루비의 치유스킬 레벨이 급격히 성장했으며, 전대 검성이라는 고급 인력을 일주일이나마 확보할 수 있게 됐으니.

그리드에게 있어서 비반은 박씨를 물어오는 제비 같은 존재였다.

비반이 잊었던 용건을 떠올린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세계수의 숲으로 떠났던 피아로와 전대 적기사단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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