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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88화 (1,378/1,794)

템빨 69권 - 18화

따앙. 따앙. 따앙...

대장간으로 돌아온 그리드는 정신적 피로감을 극복한 상태였다.

회복의 개념과는 달랐다.

심상 강화에 숨겨진 함정을 간파하며 신화 포식자들의 존재를 실감하자 엄살 부릴 계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강제 로그아웃 시간을 기다리며 버티는 수준에 불과했다.

미카엘의 힘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풀렸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

단조질에 열중하던 그리드가 자신의 발달한 감각에 놀랐다.

불타는 백린목의 향기 사이로 섞여 들어온 희미한 왁스 냄새를 맡으면서였다.

‘...왁스?’

암모니아 냄새도 코끝을 스쳤다. 대장간에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비록 미약하지만 악취로 분류하는 게 옳았다.

스륵.

그리드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중년인이 대장간에 들어서고 있었다.

사선으로 솟은 두꺼운 눈썹과 강인한 눈빛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팔뚝의 날렵한 근육을 보면 청춘을 자처해도 좋을 듯하나, 사실 그는 족히 수백 년을 살아온 노인이다.

“비반 님!”

탑의 결사들은 그리드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왔다.

1좌 하야테는 광룡철과 네펠리나의 존재를 묵인해줬고 무한의 검기와 드래곤의 비늘을 선물로 줬다. 3좌 라드볼프는 마장기 제작법과 월야철을 내어줬다. 여러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비반은 무패왕의 검술을 손봐줬다. 용단을 선물하고 메르세데스와 피아로에게까지 무쌍심법을 전수(?)해주는 등 그리드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잘 오셨습니다. 오래간만에 뵈니 기쁘네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활짝 웃은 그리드가 망치를 내려놓고 비반을 맞이했다.

“하하, 잘 지냈나.”

비반 또한 밝게 웃어주었다. 그의 성정을 아는 사람이 봤으면 기겁할 모습이다.

무쌍류의 창시자인 비반의 성정은 무쌍검법의 기세처럼 고고하되 난폭하며 무쌍심법의 흐름처럼 종잡기 어렵기로 유명했으니.

비반이 타인에게 친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자신보다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던 후인 뮐러에게도 존중과 찬사를 보냈을 뿐, 이토록 정답고 알뜰한 태도는 보여준 적이 없을 정도다.

“작품의 수준이 한층 더 훌륭해졌군. 그간 쉬지 않고 정진해왔음을 알겠어.”

대장간에 진열된 무구들을 살펴본 비반이 높이 평가했다. ‘대장장이 그리드’를 진심으로 칭찬해주었다.

“그러는 비반 님도...”

왁스 냄새와 암모니아 냄새가 체취로 밴 것을 보아 요즘도 탑의 정화에 애쓰시는 모양입니다. 책임을 다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호의와 칭찬에 보은하고자 자신 역시 떠오르는 감상을 읊으려던 그리드가 흠칫 놀라며 입을 닫았다.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에 급히 다른 말을 찾아보지만 늦었다.

“음...?”

그리드가 말을 하다 말고 미묘한 표정을 짓자 비반이 수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그리드가 얼버무렸다.

“...제가 나름 성장하긴 했나봅니다. 일전에 비반 님을 뵈었을 땐 단순히 대단하신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래간만에 다시 뵈니 존경심마저 드는군요. 인외의 경지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

그리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비반의 낯빛이 차츰 변했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눈매가 굳었고 눈빛은 차가워졌다.

뭔가 실수했나? 염려하며 입을 다무는 그에게 참다못한 비반이 말했다.

“내 자네가 신세대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어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못 참겠군. 뮐러만 해도 말일세. 내 흔적만 발견해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다네. 위대한 선인을 깊이 공경했단 말일세. 내 젊었을 적에야 훨씬 더 심했지.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신 선인의 그림자만 봐도 감읍하며 절을 올렸었네. 한데 자네는 내게 이제야 간신히 존경심을 품었다고? 허허, 이건 안목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예절의 문제가 아닐까 싶네만.”

“...”

“내 면전에 대놓고 이제야 존경심이 생긴다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어이쿠, 이제라도 존경해줘서 고맙다고 감사해야 하나? 안 그래도 나이가 많아서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할 판국인데 불쾌한 속내를 숨기려다가 주화입마에라도 빠지면? 막말로 내가 홧병이 나서 골로 가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

대체 왜 온 걸까.

반가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리드였다.

비반이 어서 용건이나 밝히길 바랐다.

그 심중을 헤아리지 못할 비반이 아니었다.

“어른이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겐가? 까마득한 후배인 자네가 더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내 친히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줬을 진데 그마저도 곡해하여 고깝게 받아들이면 내 자네가 무서워서 뭔 말을 하겠나? 그냥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으면 되겠나?”

“...죄송합니다.”

비반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그리드가 긴 말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럴 땐 순순히 사과하는 게 신상에 좋다는 사실을 일전에 학습했다. 억울하답시고, 혹은 옳은 말 한답시고 한 마디라도 반박했다간 100마디를 더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드가 사과하자 그제야 좀 진정한 비반이 에잉, 요즘 신세대들은... 하며 혀를 찼다.

“이만하겠네. 분하고 슬프지만 어른인 내가 이해하고 너그럽게 넘어가야지 어쩌겠나. 내 자네를 보아하니 무력적인 측면에서도 조금이나마 성장한 듯한데, 작은 성취에 들뜬 나머지 말실수한 거라고 이해하겠네.”

비반은 오성(悟性)이 다소 부족하다.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관조하는 것과 별개로 타인을 제대로 관조하지 못한다.

탑의 말석이라서가 아니다. 타고난 성정이 폭급하다는 게 문제였다. 천재의 괴팍한 면모가 도드라지게 나타난 증세일 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비반은 대상을 레벨로 평가한다. 액면 그대로 봤다.

썩 나쁜 방법은 아니다. 레벨이 즉 실력인 건 사실이니.

다만 상대가 그리드라는 게 문제였다.

그리드를 평가할 땐 레벨로 평가해선 안 된다. 격을 논해야했다.

하지만 비반은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일전에도 그랬다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음에도 또 같은 과오를 범했다.

변하지 않으니 매번 탑의 정화에 힘써온 것이기도 하다.

비반이 항상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를 수습하느라 탑을 청소해준 덕분에 지혜의 탑은 수백 년 동안 청결할 수 있었다.

“작은 성취라고요.”

그리드가 다소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비반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참지 못했다.

플레이어 최초의 신화 클래스 전직.

자신 역시 탑의 결사들과 마찬가지로 인외의 경지에 올랐건만 비반이 그것을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자 흥미가 생겼다. 어떤 근거로 저평가를 하는 건지 궁금했다. 호승심이 샘솟으며 정신적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드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을 발전시켜온 원동력, ‘꺾이지 않는 의지’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비롯된단 사실을.

그래, 요즈음 너무 편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조금 거만해진 듯하다. 하물며 미카엘을 레이드하는데 성공하자 급격히 느슨해졌다. 갈 길이 먼데도 주제 파악 못하고 강제 로그아웃 시간이나 셈했을 정도다.

“어떤 근거로 저의 성취를 낮다고 평가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호오...?”

여태까진 그리드에게 존경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서운해서 입을 비죽 내밀고 있던 비반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무패왕의 검술을 손봐주고 인생의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여태껏 큰 호의를 보내줬건만, 그 호의를 잊은 후배가 괘씸했는데 갑자기 다시 예뻐 보였다.

그도 그럴게.

무쌍류를 창안한 검성(劍聖)으로 뮐러의 존경마저 받았던 자신에게 호승심을 보이는 사람은 실로 오랜만에 본 까닭이다. 탑의 결사답게 만난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 거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요즘 아이들은 패기를 잃었다고 생각해왔는데.”

서늘하게 식었던 눈동자에 다시금 빛이 깃든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이었다. 의지만으로 대상을 벤다는 심검(心檢)의 산물이기도 한 그것이 그리드를 꿰뚫는다.

“인신이라 그런가. 과연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르구만. 그래, 나의 평가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게지? 그럼 어디, 몸으로 직접 확인해 보겠나?”

비반이 질문하는 순간.

[지혜의 탑의 9좌 ‘비반’과의 호감도가 최대치입니다.]

[히든 퀘스트 ★옛 검성과의 대결★이 발생합니다!]

그리드의 시야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옛 검성과의 대결>

난이도:SSS+

무쌍검법의 창시자이자 지혜의 탑의 결사인 검성 비반이 당신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합니다.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므로 죽이진 않을 겁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대결에서 승리 혹은 패배

패배 시 보상:전투 내용에 따라서 다름

승리 시 보상:석삭룡의 엄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퀘스트였다.

결과가 무엇이든 보상이 발생하는 퀘스트.

심지어 최고 난이도다.

누구나 꿈꿀만한 히든 퀘스트였다.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드가 대답했다.

비반은 그 태도가 무척 흡족했다.

자고로 검사란 이래야지.

생각하며 앞장서는 그의 머릿속에서 본래 용건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이 지금 왜 이곳에 와있는 건지조차 그는 잊었다.

일시적인 기억상실에 가까운 기행으로, 검술 외길의 인생이 무슨 수로 가능했는지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

검성 비반은, 이제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긴 세월 동안 검술만을 추구하고 연마해온 괴물이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아남아서도 정진하였으므로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뮐러의 전성기를 초월했다.

굳이 논하자면, 역대 최강의 검성은 뮐러가 아닌 비반이라고 해야 옳았다.

다만 비반은 세상에서 잊힌 존재인지라 역사가 바뀔 일은 없다.

크라우젤이 뮐러를 초월하지 않는 이상 역대 최강의 검성이란 타이틀은 영원히 뮐러의 것일 거다.

그에 대해서 비반은 서운하지 않았다.

만약 뮐러가 살아있었다면 여전히 그가 역대 최강이었을 테니까.

다만 나는 살아남았기에 넘어섰을 뿐이다...

비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 실력은 차치하고 여전히 뮐러를 최고의 검사로 존중했다.

“청소부는 치우지.”

공터에 자리 잡은 비반이 저쪽에 멀뚱멀뚱 서있는 하스터를 가리켰다.

“청소부...? 아, 네.”

갑자기 왜 자기소개를... 당황하다가 하스터를 발견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스터에게 잠시 물러나 달라고 부탁했다.

‘도대체 누구지?’

하스터는 갑자기 나타난 중년인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발달한 청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겠답시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법도 쓰지 않았다.

그게 예의였으니 당연했다.

“선수를 양보하겠네. 들어오시게.”

그리드에게 턱짓하는 비반의 기도가 여태까지완 전혀 달랐다. 과거에 대련했을 때와 비교해도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이것이 진짜 검성...’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그리드가 모든 버프 스킬을 작동시키고 룬의 힘까지 개방시켰다.

비반이 양보해준 선공의 기회를 전력으로 활용할 각오였다.

“...!?”

비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밤의 어둠을 물들이기 시작한 주황빛이 대장간에서 흘러나온 조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챈 직후였다.

꽈차아앙!!

검집에 걸쳐두었던 왼손마저 급히 출수한 비반이 그리드의 검무를 아슬아슬하게 흘려냈다.

유능제강의 수법이었다.

지혜의 탑의 결사.

무려 드래곤과 대적해온 비반이 전력을 쓰고도 힘에서 밀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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