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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87화 (1,377/1,794)

템빨 69권 - 17화

새로운 기능이 추가 된 탐식의 룬.

심상을 강화하는 용도로 쓸 수 있게 됐다.

대신 룬에 각인 된 힘을 자원으로 소모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생각보다 큰 페널티는 아니다.

룬에 깃든 힘이라고 해서 무조건 특출한 위용을 자랑하는 건 아니니까.

초창기에 얻은 힘이나 하위 대악마를 잡고 얻은 힘은 가치가 적은 경우가 있었다.

안 그래도 룬의 용량이 가득 찰수록 힘을 흡수하는 확률이 떨어지는 느낌이라, 그리드는 새로운 기능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미카엘을 잡은 직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리드가 미카엘 레이드에 성공하고 기분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가 룬의 새로운 기능에 있었다.

하지만.

‘이게 옳은가?’

그리드는 점차 의심을 품었다. 심상 강화를 섣불리 시도하지 않고 망설였다.

브라함의 심상세계를 체험하고 하야테의 심상을 엿봤던 경험이 경종을 울린 까닭이다.

지식으로 쌓아올린 브라함의 심상과 무한한 검기가 펼쳐졌던 하야테의 심상...

그들의 심상은 그들의 본질에 닿아있었다.

그리고 그리드의 본질은 대장장이다.

물론 ‘탐욕’ 또한 그리드를 대표하는 성격이다. 타인의 힘을 흡수하며 성장해온 탐식의 룬이 그리드의 심상의 재료가 되는 것도 어색하진 않다.

‘...그래도 굳이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룬보단 대장장이가 맞지 않나 싶은데.’

대장장이로 성장했고, 성장했기에 룬을 얻지 않았나.

그리드가 탐욕을 충족해올 수 있던 근원에는 대장장이의 능력이 있었다.

‘이거... 생각할수록 지뢰 같다.’

룬으로 편하게 심상을 강화하는 순간 근원이 약해질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든다.

물론 억측이긴 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직감’에 불과한 추측이니. 함정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었다.

‘최근의 삶을 돌이켜보자.’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그간의 노고들을 너무 큰 행운으로 보답 받았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

잠시 불행이라는 개념을 잊었을 정도로.

이게 정녕 그리드라는 인물의 삶인가?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리드의 삶엔 늘 행운과 불운이 공존했다. 당장의 결과만 놓고 보면 행운의 총량이 훨씬 더 높았지만, 최초의 행운을 거머쥐기까진 누구보다 운이 없고 불행했었다.

최근 거머쥔 행운의 반동으로 불쑥 불행이 덮쳐 와도 이상하지 않단 의미다.

‘그리고 대부분의 불행은 내가 방심했을 때 찾아왔다.’

그리드는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영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며, 영리하지 못했기에 방심하고 서두르다가 코가 납작해진 경험을 몇 번이나 해왔다.

하여.

‘룬을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심상을 강화하는 일은...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미룬다.’

그리드는 선택했다.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을 미련 없이 뿌리쳤다.

‘어차피 지금의 내 심상도 꽤 강해.’

아이템에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게 얼마나 강력한 권능인지 미카엘을 레이드하며 체험했다.

물론 아이템 없이도 압도적으로 강하거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심상 따위 쉽게 무력화시키는 적을 만나게 될 가능성을 좌시할 순 없고, 그러므로 심상이 어서 강화됐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심상은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떠밀리듯 급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리드는 뚜렷한 심상 없이도 강적들과 싸우고 이겨왔다. 이제 와서 갑자기 조급해하는 것도 웃겼다.

어서 새로운 시스템을 체험해 보라는 듯이 점멸하며 시선을 끄는 심상 강화 기능을 외면한 그리드가 미카엘의 힘을 확인했다.

<미카엘의 힘>

무기에 강력한 신성력을 덧씌워 강화합니다.

총 3회의 강화가 가능하며, 강화할 때마다 무기 공격력이 20퍼센트 상승하고 공격 거리가 2배 증가합니다.

매 공격 시 신성력의 잔재를 퍼뜨립니다. 잔재에 닿은 대상에게 무기 공격력에 비례하는 고정 피해를 입힙니다.

신성력 소모:초당 5,000

강화 지속 시간:1분

재사용 대기 시간:3시간

★사용자에게 신성력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다른 자원을 소모합니다. 단, 강화 시 상승하는 무기 공격력이 15퍼센트로 감소합니다.

‘다시 봐도 대박이군.’

그리드에겐 신성력이 없다. 미카엘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무기 데미지가 총 60퍼센트가 아닌 45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리드의 무기가 특출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만큼 더욱 아쉽게 다가오는 페널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신성력이 덧씌워질 때마다 부피를 키웠던 미카엘의 성검.

그리드의 신검과 맞부딪쳐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버텼던 그것의 가장 큰 강점은 무기 자체의 위력이 아니라 공간을 지배하는 능력에 있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족히 8미터의 거리를 점거하고, 그 배에 해당하는 범위에 신성력의 입자를 퍼뜨려 대상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던.

만약 그리드의 생명력과 방어력이 신화 클래스로 전직하기 전의 수준이었다면 그 빛의 세례에 넝마가 됐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성검을 피해봤자 주변에 퍼진 입자들이 폭발하며 그리드를 폭격했으니.

그리드가 미카엘의 힘을 고평가하는 부분은 바로 그 폭격이었다.

특히 그리드의 공격속도는 삼위일체를 이루지 못한 미카엘보다 빨랐다. 미카엘의 힘을 미카엘보다 파괴적으로 쓸 자신이 있었다.

‘물론 미카엘처럼 힘의 잔재를 섬세하게 컨트롤하거나 다양한 기능을 유도할 순 없지만... 이걸로도 충분하다.’

미카엘은 신성력의 잔재를 창칼로, 폭탄으로, 또는 힐로 응용했다. 룬에 귀속 된 미카엘의 힘은 지원하지 않는 기능이었다. 아쉽지만 미련을 가져봤자 무의미했다.

★룬에 각인된 힘을 자원으로 소모하여 심상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드가 미카엘의 힘을 살펴보는 동안 룬의 설명이 점멸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대놓고 유혹하는 꼴이었다.

신성력이 없는 까닭에 생긴 페널티를 지적하며, 미카엘의 힘을 차라리 재료로 써서 심상을 강화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게 훨씬 더 빨리 강해지는 지름길이라는 듯이.

덕분에 그리드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봐도 함정이 맞나본데.’

S.A그룹이 얼마나 음흉한지 잊어선 안 된다.

화전양면전술의 대가라고 할까.

겉으로는 테마곡을 만들어주니 뭐니 하면서 방심을 유도하고 바로 뒤통수 때려도 이상하지 않다. 가장 경계해야 할 시기였다.

“탐식의 룬 개방.”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터로 나온 그리드가 염룡검을 꺼냈다. 그리고 갓 핸드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하스터를 시야에 둔 채 미카엘의 힘을 전개했다.

쿠오오오!!

염룡검에 주황색 마나가 덧씌워진다. 마나를 활용한 무기 강화. 흔히 오러라고 부르는 개념인데 그리드의 색으로 물들었다.

움찔.

막대한 기운을 느낀 하스터가 질색하며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는 염룡검을 2차 강화시키고 있었다. 오러 위에 붉은 기운이 덧씌워지더니 이내 섞이며 부피를 키웠다. 이번엔 마나가 아닌 혈기가 둘러진 것이다.

[2개의 자원을 중첩시켜 미카엘의 힘의 위력이 증폭됩니다. 무기 데미지가 추가로 10퍼센트 상승합니다.]

“...!”

숨겨진 기능이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신성력이 없어서 발생한 페널티가 대폭 감소됐다.

게다가 강화 유지에 소모되는 자원이 ‘마나’라 부담이 적었다.

콰지직!!

짙은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염룡검을 3차 강화시켰다.

주황색 오러와 붉은 혈류가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염룡검의 주변으로 적자색의 기운이 전광처럼 튀어 올랐다.

투기가 형상화한 것이다.

[3개의 자원을 중첩시켜 미카엘의 힘의 위력이 증폭됩니다. 무기 데미지가 추가로 20퍼센트 상승합니다.]

“허...”

그리드가 미카엘의 힘으로 상승시킨 무기 데미지가 총 75퍼센트가 됐다.

신성력이 없는 페널티를 극복한 것으로 모자라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킨 셈이었다.

무엇보다 멋져서 좋았다.

“그리드...?”

그리드의 입 꼬리가 연신 씰룩이는 반면 하스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갓 핸드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모습을 본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과연 전설적인 프로게이머 출신답게 감이 좋았다.

“한 방만요. 피해도 되고 막아도 됩니다.”

콰아아아앙!!

그리드가 검을 휘둘렀다.

하스터와 그의 거리는 대략 8미터가 떨어져있었는데 오러, 혈기, 투기에 휘감긴 검신이 아슬아슬하게 거기까지 뻗쳐나갔다.

“미친!!”

저거, 아까 교황청에서 미카엘이라는 천사가 쓰던 기술 아닌가?

생중계로 시청해서 똑똑히 기억한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하스터가 급히 허리를 뒤로 젖혔다.

하얗게 질린 하스터의 얼굴 가죽이 푸들푸들 물결쳤다. 풍압이 스친 여파다.

날카로운 오러와 끈적거리는 열기를 내뿜는 혈기, 거기에 투기의 압박감이 더해지자 공기를 베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

간신히 공격을 피한 하스터였지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뚜렷한 부채꼴 형태로 남은 거대한 검광.

그 잔광의 일부로부터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청각을 활용하는 능력이 최고 수준인 하스터는 그것이 무엇의 전조인지 단숨에 깨달았다.

‘폭발...!’

황급히 몸을 날리며 칠악성의 힘을 작동시킨다. 방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직 쿨타임에 걸려있었다. 갓 핸드와 싸울 때 소모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지축을 울리는 폭발이 발생했다.

오러는 노을이 번지듯 아름답게, 혈기는 만개한 백일홍처럼 화려하게, 투기는 벼락처럼 날카롭게 비산하며 하스터를 덮쳤다.

추락하는 여객기에 실린 몸이 저럴까.

연쇄하는 폭발에 휩쓸려 격하게 흔들린 하스터의 신영이 멀찍이 날아가 뒹군다.

[생명력이 최소치가 되어 대련 모드가 종료됩니다.]

“...”

이게 수련용 허수아비의 심정일까.

떠오르는 알림창 너머의 하늘을 멍하니 올려본 하스터가 서러움을 삼켰다.

하긴, 나만 그리드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받는 건 염치없는 일이다.

갓 핸드를 빌리고 아이템을 구매하며 도움을 받는 대신 이렇게 샌드백으로나마 도움을 주는 게 맞다.

이성적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하스터였다.

하지만 왠지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편 그리드는 웃고 있었다.

★룬에 각인된 힘을 자원으로 소모하여 심상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룬의 정보창을 닫았음에도, 새로운 기능 설명이 멋대로 다시 떠올라 점멸한다.

[당신의 심상을 강화하시겠습니까? 지금 강화 시, 플레이어 최초로 심상 강화 시스템을 개방시킨 특전으로 대성공 확률이 생깁니다.]

한 술 더 떠서 선택지까지 발생했다.

유혹하는 수준을 넘어서 재촉하는 기세다.

이쯤 되자 그리드는 확신했다.

‘이거 백퍼센트 지뢰다.’

경험이라는 건 허투루 쌓이는 게 아니다.

뒤통수가 사늘해진 그리드가 NO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떠있는 룬의 정보창을 쓰레기 버리듯 접어서 치워버렸다. ‘무조건 대성공’도 아니고 대성공 할 ‘확률’이 생겼다는 알림창의 치졸한 생색을 비웃으면서였다.

그러자.

[플레이어 최초의 심상 강화 기회를 거부하였습니다.]

[신화 포식자들이 당신에게 흥미를 품습니다.]

[‘무후총의 망령’은 편한 길을 외면하고 시련을 찾는 구도자의 정신력에 경의를 표하는 눈치입니다.]

[아직 불완전한 당신의 심기체가 약간의 균형을 찾습니다.]

“음...”

전혀 예상치 못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때로는 돌아갈 필요가 있다더니, 과연 괜히 있는 격언이 아니었다.

흡족한 표정으로 미카엘의 힘을 거둔 그리드가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뭐였지 결국.”

진짜로 한 대 때려 보려고 나왔던 건가?

그 외엔 아무 용건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샌드백 아니, 하스터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전 폭발의 여파로 엉망이 된 공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객으로 지내며 적잖은 크기의 공터를 빌려 쓰는 신세였으니 뒷정리 정도는 자신이 해야 옳다는 생각이었다. 그에게도 염치라는 게 있었다.

넋을 잃은 하스터가 뒷정리에 집중하는 그때였다.

파스슥.

대장간 뒤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하스터의 발달한 청각에 어렴풋이 스쳤다. 보통 사람의 청각으론 결코 포착할 수 없을 희미한 소리였다. 설령 들었어도 흔한 바람소리로 치부했을 터다.

하스터 또한 대수롭지 않은 소음으로 인식했다.

다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그래서 소리의 정체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착지할 때 난 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경악했다.

전신 근육이 정밀하게 발달한 극한의 신체.

하늘에서 떨어진 중년인은 얼굴만 보면 마른 듯했지만 체격이 무척 훌륭했다. 거기에 검까지 패용하고 있는지라 몸무게가 족히 100킬로그램은 나가보였다.

한데 거의 소리도 없이 땅에 떨어졌다고?

경계하는 하스터를 정체불명의 손님이 거슴츠레 노려봤다.

“이젠 하다하다 청소부까지 내 기척을 읽는 건가. 보면 볼수록 정신 나간 나라구만.”

나중엔 이 나라가 탑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도... 아니, 너무 나갔나.

영문 모를 혼잣말을 지껄이며 대장간으로 들어가는 사내의 정체는 검성 비반이었다.

그는 하야테의 선물을 들고 온 참이다.

망자 언어 해독본.

하야테는 탑의 정상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절대자답게 그리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

그나마 샌드백보단 청소부 취급이 낫다...

또 다시 홀로 남겨진 하스터가 자신의 신세를 애써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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