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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86화 (1,376/1,794)

템빨 69권 - 16화

플레이어들이 그리드를 비롯한 랭커들을 좋아하고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얻는 게 많기 때문이다.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기반 지식이 없으면 재능이 무용해지는 법.

역사적인 천재들조차 타인이 쌓아놓은 지식을 토대로 삼아 그 너머를 보고 지식을 발전시키지 않았나.

계승되는 지식이 존재하기에 천재들의 재능이 더욱 더 빛나는 것이다.

플레이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플레이어 입장에선 그리드와 크라우젤 등의 선구자들이 살아있는 교본과도 같았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고 배우며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발전시켜왔다.

레쉬도 그중 하나다.

쩌어엉!!

‘기억에 있는 패턴이여서 다행이다.’

다크엘프의 저격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은신 마법과 추적 마법을 덧씌운 화살을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거리에서부터 쏘아 백발백중에 가까운 적중률을 자랑했다.

하지만 다행히 레쉬는 화살을 쳐 내는데 성공했다.

국대전에서 봤던 지슈카의 PvP를 떠올린 덕분이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화살이 갖는 약점과 그를 공략했던 하이랭커들의 전투를 참고해서 아슬아슬하게나마 저격을 수포로 돌렸다. 빛나는 재능의 발현이었다.

“으악!!”

“커헉...!”

평범한 병사들의 사정은 레쉬와 달리 처참했다.

화살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급소에 적중당해 잿빛으로 산화했다.

화살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 문제였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도무지 병사들이 대응할 수준이 아니었다.

‘제길!’

세계수의 숲 초입.

쉬지 않고 달려와 숲에 도착한 레쉬와 기사들은 숲에 갑자기 퍼진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을 감지하고 병력을 정지시켰다. 매복이 있음을 간파하고 대비하여 대열을 다시 짜려고 했었다.

하지만 적들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거리에서 화살 세례를 날려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후퇴! 전열이 버티는 동안 뒤로 물러나라!!”

레쉬.

한때 듀란달 황자의 기사였던 그는 듀란달이 바사라와 화해한 뒤 소속을 적기사단으로 옮겼다.

비록 적기사단의 위명이 예전만 못하다고 하나 플레이어 최초로 대륙 최고의 기사단에 합류한 것이다.

한때 큰 화제가 되어서 집중 조명되었고, 뛰어난 실력이 알려져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명성을 허투루 얻은 게 아니라는 듯이 그는 활약했다.

무기를 검에서 창으로 스왑, 화살 비를 최대한 차단하는 한편 병사들을 통솔하여 방패병을 제외한 전 병력을 저격 사정거리 바깥까지 후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쿠우우웅!!

다크엘프들은 예상했다는 듯이 대응했다.

활 쏘기를 멈추고 방패병들의 머리 위로 대단위 마법을 떨어뜨렸다.

레쉬는 당황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궁수와 마법사가 이런 식의 콤비네이션을 이루는 건 비교적 흔했으니까. 특히 최고의 궁사와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는 템빨단에서 많이 보여준 전략이다.

레쉬는 예측했고, 대응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갑주 개방.”

바사라 황제의 적기(赤氣)와 연동 된 레드 아머가 울부짖는다. 불꽃처럼 피어오른 붉은 기운이 구형의 성벽을 이루어 마법 폭격을 막아냈다.

적기는 물질에 개입하고 통제하는 힘이며, 사용자의 특성에 따라서 기능에 차별성이 생긴다.

레쉬의 레드 아머는 강력한 디스펠 효과와 물리방어력을 겸비했다. 그가 기사로 활동하며 지켜온 목숨들이 반영된 듯했다.

“지금 돌입한다!”

레쉬가 선두에 섰고 병사들이 빠르게 열과 오를 맞췄다.

쐐기대형을 갖춘 과감한 돌격의 이면에는 다른 적기사들의 활약이 있었다.

레쉬가 병사들을 이끌고 다크엘프들의 폭격을 견디는 동안 그의 선배들이 숲으로 침투한 것이다.

콰아앙!!

숲이 진동하며 폭음이 연쇄되고 있었다.

‘좋아...! 아니?’

적의 공세가 약해진 틈을 노려 병사들과 함께 숲에 진입한 레쉬가 석상처럼 굳었다.

한참 난전 중일 거라고 예상했던 숲속 상황이 이미 정리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6번 기사와 11번, 15번 기사. 그리고 수십 명의 흑기사들.

그들이 전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검은 정령들이 그들의 몸을 좀먹는 중이었다.

다크엘프.

엘프의 유연한 근육과 궁술을 고스란히 계승하였으면서 마기에 타락한 정령을 부리는 이종족.

한때 엘프였던 그들은 엘프와 달리 숲의 가호를 받지 못했지만 정령과 연동하여 폭발적인 마력을 전개하고 육체를 강화할 수 있다.

상정한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전투에 특화된 엘프라고 봄이 옳았다.

“레...쉬 경... 병력을 이끌고 퇴각해라.”

정령들을 떨쳐내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6번 기사가 명령했다.

레쉬는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제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솔로 넘버 나이트가 오늘따라 초라하게 보였다. 하지만 고결함은 건재하여 숭고하게 느껴졌다.

바사라 황제가 재편한 적기사단은 리미트 공작이 이끌던 적기사단과 결이 달랐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사도를 따랐다. 심지어 황제의 명령보다 기사도를 우선시했다.

황제가 원해서였다.

바사라 황제가 생각하는 기사란, 필요에 따라 써먹는 칼 따위가 아니었다.

제국이, 혹은 황제가 잘못 된 길에 들어서지 않게끔 경계하고 이끌어 줄 감시자이자 조언자였다.

그 영향인지 당대의 적기사단은 역사상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았다. 선발의 최우선 기준이 무력이 아니므로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고결하고 숭고했다. 타인이 함부로 폄하하고 조롱할 대상이 아니었다.

“적기사도 별거 없구나. 세월이 무심하여 제국도 예전만 못하다더니 낭설이 아니라 사실이었어.”

“콧대 높은 여자들이 우리를 척지고 기껏 택한 게 저런 무능한 인간 수컷이란 말인가.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거목 위에 올라선 다크엘프들이 붉은 안광을 번들거리며 조소한다.

분노를 삼킨 레쉬가 그들에게 물었다.

“세계수는 이미 점령한 건가?”

어차피 곧 죽을 놈의 질문이다.

어깨를 으쓱인 다크엘프들이 저승길 선물이라는 듯이 대답해주었다.

“우리의 복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역시...’

바사라 황제는 유능하다. 뻔히 질 싸움을 하지 않는다. 불리한 싸움은 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싸움이든 제국이 우위에 설 수 있게끔 전력을 배치한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제국 각지에서 출몰한 마인들 탓에 병력에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엘프들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고 전쟁에서 승리할 정도의 지원군을 파견했다.

여기서 문제는 지원군이 엘프들과 합류할 것을 전제로 삼았다는 점이다.

다크엘프들은 세계수의 숲을 ‘기습’했다. 엘프들이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세계수까지 진격할 거라고 보았다. 설마 기습의 이점을 버리면서까지 대기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기 힘들었다.

‘각개격파를 당하게 될 줄이야. 엘프들이 눈치껏 합류해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설령 이곳의 이변을 눈치 챘을지언정 섣불리 세계수의 곁을 떠나지 못하리라.

엘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세계수를 지키는 것이니까.

“...아무래도 명령은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레쉬가 6번 기사의 곁으로 섰다.

고목 위에 올라있는 수백 명 다크엘프들의 시선을 받으며 창을 내려놓고 검과 방패를 꺼냈다.

“제가 버티는 동안 포일 경께서 병력을 이끌고 퇴각해주십시오.”

희생하려는 이유는 네 가지다.

첫째, 레쉬의 레드 아머는 적의 공세를 무력화시키는데 특화되어 있다. 단순히 버티면서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라면 6번 기사와 비교해도 효율이 나쁘지 않다.

둘째, 플레이어인 레쉬는 죽어도 다시 부활하지만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은 아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끝이다.

셋째, 목숨을 한 번 버리는 대가로 솔로 넘버 나이트와 병력을 살릴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큰 이득이다. 황제가 직접 공을 치하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히든 보상이 기다릴지 몰랐다.

넷째, 다 떠나서 레쉬는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다.

“어서요.”

레쉬가 6번 기사 포일의 거구를 밀치며 재촉했다.

하지만 포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경에게 있어서 죽음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경을 희생시킨다면 난 뭐가 되지? 위기가 올 때마다 선임의 소임을 외면하고 매번 경에게 의지할까?”

“지금 그런 답답한 말을 하실 때가 아니...”

“아주 지랄들을 하는구나.”

레쉬와 포일의 대화가 뚝 끊겼다.

잠자코 지켜보는가 싶던 다크엘프들이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특히 머리에 왕관을 쓴 금색 이름의 다크엘프는 대놓고 박장대소 했다.

“너희가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어차피 너희는 여기서 전부 죽을 진데, 모르는가.”

콰드득!

다크엘프 왕의 주변으로 한기가 피어오르며 숲이 얼기 시작했다.

레쉬와 포일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웠다.

차원이 다른 강자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위축되는 그들의 주변으로 병사들이 몰려와 대열을 갖췄다. 마치 보호하는 듯한 진영이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병사들을 살리려고 했던 두 기사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의였다.

병사들의 결사를 느낀 레쉬와 포일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포일이 외쳤다.

비록 이곳이 우리의 무덤이 될지라도 한 명의 적이라도 더 길동무로 삼자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콧방귀 뀐 다크엘프 왕이 얼음의 해일을 일으켰다.

기껏 분기충천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위축되었다.

고목보다 높이 솟아오른 얼음의 해일이 시야를 뒤덮으며 덮쳐오자 절망하며 전의를 상실했다.

‘초네임드...’

레쉬 또한 허무한 최후를 직감하는 그때였다.

“훌륭했다.”

미처 좌절감을 느끼기도 전에, 낯선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금발이 나부낀다.

붉은 꽃잎이 번진다.

레쉬와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은 분명한 꽃향기를 맡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급기야 하늘마저 뒤덮은 얼음의 해일을 마주보고 선 금발의 사내가 검을 뽑고 휘두르는 동작을 보지 못해서, 다만 사내의 뒷모습이 멈춰있다고 느꼈다.

쩌저저저저저저정!!

시간의 흐름을 다시 자각한 것은, 뒤늦게 번쩍인 낙뢰 같은 검광이 해일을 반으로 가른 후였다.

“그대들은 필시 훌륭한 기사가 되겠지.”

대견하다는 듯이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사내.

어딘지 슬픈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을 레쉬와 기사들이 알아보았다.

“아스모펠 님...!”

쿠르르르릉!!

갈라진 해일의 파편들이 지상에 맥없이 쏟아지며 지진을 일으킨다.

거세게 흔들리는 거목 위 다크엘프들이 뭐라뭐라 소리치며 아스모펠에게 마법과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마법도, 화살도 아스모펠에게 닿지 못했다.

한 발 늦게 도착한 역사상 최고의 적기사들이 모든 공세를 검으로, 창으로, 방패로 무력화시킨 까닭이다.

동료들과 함께하는 아스모펠은, 늘 무적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조국에 승리를 안겼었다.

본래라면 두 번 다시 되찾지 못할 영광이었다.

“부단장 저 새끼가 예전부터 빠르긴 겁나 빠르다니까.”

하지만 아스모펠은 기어코 영광을 되찾았다.

감히 염치없이 스스로 원했던 결과가 아니다.

단지 동료들이 기회를 줬을 뿐이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조금이라도 더 속죄하라며.

“알겠지만, 용서한 건 아니다. 용서해서도 안 되는 거고.”

싱클레드가 으르렁거리며 아스모펠을 지나쳤다. 그의 신영은 어느새 거목 위에 떨어져 적진 한가운데에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날카로운 기파를 발산하며 다크엘프들의 유연하고 질긴 근육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아멜다와 켄트릭은 말없이 아스모펠을 지나쳤다.

단테는 아스모펠의 떨리는 어깨를 살짝 쥐어준 후 지나쳤다.

아스모펠의 곁에 나란히 선 피아로가 숲의 지형을 바꿔 거목들을 모조리 뒤로 눕혔다. 적들이 엄폐물을 활용하지 못하게 강제했다. 아멜다와 켄트릭, 그리고 단테가 학살을 개시했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제국이 무슨 수로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는지, 그 편린을 엿본 기사들과 병사들이 전율했다.

‘그리드님이 저들을 회유하지 못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테지.’

본래 유령으로 떠돌았을 제국의 망령들이다.

그리드는 무슨 수로 저들을 품었을까.

그건 단지 권력과 무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터다.

그리드의 위대한 행보를 새삼 실감한 레쉬가 힘찬 기합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아스모펠을 표적으로 삼은 다크엘프 왕의 얼음송곳들을 차단하여 아스모펠을 보필했다.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하는 전쟁은, 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었다.

***

그리드도 사람이다. 매사에 빈틈없이 열심이라지만, 그건 피로를 몰라서가 아니라 정신력으로 버티는 개념에 불과했다. 그에게도 가끔씩은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미카엘을 토벌하고 돌아와 또 곧장 대장일 중인 지금이 그랬다.

‘다시 확인하자.’

오토 제작으로 만든 아이템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들여서 수작업으로 만든 아이템과 비교해서 상위 옵션이 귀속 될 확률이 낮았다. 등급 판정에서도 불리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리드는 적어도 기사들에겐 직접 아이템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템빨국의 기사가 어디 보통 실력인가.

선임기사 로이먼을 예로 들자면, 타국 어디에 내놔도 ‘제일검’을 논하기에 충분한 실력자다. 피아로와 아스모펠 밑에서 꾸준히 수학한 그녀는 이미 몇 년 전에 검호의 칭호를 얻었다.

그녀의 재능이 동기들 중에서도 유독 뛰어난 편이긴 하지만, 그녀를 제외하더라도 템빨국 기사들의 수준은 매우 훌륭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상위 서른 명을 뽑으면 템빨까지 감안해서 제국의 적기사단과 비견될 수준이었다.

물론 전성기 시절의 적기사단에는 미치지 못한다.

황금세대의 적기사단은 피아로와 아스모펠, 윈프레드, 싱클레드, 단테 같은 걸출한 천재들이 득실거렸었고,

마지막 전성기였다고 평가받는 그 다음 세대의 적기사단엔 메르세데스라는 괴물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으니.

어찌됐든, 그리드는 기사들이 쓸 무기와 갑옷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제작하는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강렬한 피로감을 느꼈다. 잠시 쉴 겸 오토 제작을 활성화시키고 탐식의 룬의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룬에 각인된 힘을 자원으로 소모하여 심상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한 줄의 설명이 추가되어 있었다.

미카엘의 힘을 흡수하면서 룬이 변화를 맞이했다.

화신의 폭풍이 간접적으로 구현했던 템빨신의 심상.

브라함의 심상이나 하야테의 심상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그것을 성장시킬 수단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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