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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83화 (1,373/1,794)

템빨 69권 - 14화

“...?”

시청자들이 문득 의문을 품었다. 중계방송이 렉이 걸린 건가 싶었다.

고요하다. 화면 끄트머리에 보이는 중계진이 침묵했다. 목석처럼 굳어서 가만히 있었다. 전 세계, 모든 방송 채널의 시청자들이 공통적으로 목격 중인 광경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청자들이 이내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신의 손이 키보드 위에 멈춰있는 게 아닌가.

현대인답게 키보드재간이 훌륭해서 ‘키보드 워리어’라고 불려왔건만, 무색하게도 자판의 비명이 멎었다.

현실의 적막에 호응하듯 채팅창이 고요했다.

화면 속 중계진과 마찬가지로, 시청자들의 몸과 머리 또한 잠시 굳었던 것이다.

부르르, 뒤늦게 엄습해온 전율이 사람들의 척추를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 마약보다 더 큰 괘감이었다.

미카엘.

잘린 목을 붙이고 스스로가 천사임을 밝힌 그가 성검을 휘두른 순간 중계진과 시청자의 반응은 대동소이했었다.

강대한 신성력을 응축시켜 부피를 키운 성검의 기세가 말 그대로 종말을 예고하지 않던가.

성검이 공간을 가를 때마다 번져나가는 빛의 입자가 창칼처럼 뻗어지고 마법처럼 폭발하는 광경을 통해서, 사람들은 여태껏 몰랐던 초월성을 엿봤다.

천사는 플레이어가 잡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런 결론을 초장부터 내렸다.

일격으로 수백 가지의 공세를 내뿜는 미카엘의 초월적인 무력이 자연히 유도시킨 결론이었다.

사람들은 그리드가 위기를 겪을 거라고 추측했다.

한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혀 다른 결과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드는 신이야.

-그리드는 신이야. 그리드는 신이야. 그리드는 신이야. 그리드는 신이야.

한참을 멈춰있던 채팅창이 빠르게 갱신되기 시작했다.

현실의 적막도 깨졌다.

정신을 차린 중계진이 뒤늦게 흥분해서 소리쳤고 전 세계 언론사에선 속보를 쏟아냈다.

***

성녀 루비.

그리드의 호출을 받은 그녀가 교황청에 도착한 건 화신의 폭풍이 발생하기 전이었다.

정확히는 그리드가 루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서 그녀가 도착하기 전까지 화신의 폭풍을 아꼈다.

‘저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미카엘을 소멸시킨 보상으로 그리드가 획득한 레벨은 무려 18개.

463이었던 레벨이 단숨에 성장해서 481이 됐다.

본래라면 얻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경험치다.

미카엘은 약화된 상태였던 만큼 주는 보상도 한정적이어야 옳았다.

하지만 성녀 루비가 미카엘을 완전히 소멸시켜버렸다.

세계관에서 퇴장하게 된 미카엘은 자신을 매개로 발생할 예정이었던 온갖 퀘스트와 에피소드를 소실했다. 그 잠재적 보상들이 경험치로 치환되어 그리드에게 부여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리드에겐 깨달음 효과가 있다. 루비가 파티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덕분에 대량의 경험치를 독식하고 18개의 레벨이 오른 그리드였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루비의 성장은 중요하다. 쩔을 받아도 부족할 판국에 경험치를 거저먹을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다니.

책망하는 그리드의 시선을 읽은 루비가 귓속말을 보내왔다.

-이젠 나 혼자서도 잘 클 수 있거든?

사실이었다.

사악한 존재를 높은 확률로 일격에 해치우는 턴 언데드와 광역 퍼센트 힐을 활용하는 루비의 사냥속도는 템빨단 내에서도 최상위에 속했다.

물론 공간적 제한이 있긴 했지만, 루비는 굳이 오빠의 희생 없이도 스스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허황된 자신감 따위가 아니라 입증된 사실이다. 근래 지옥에서 직접 확인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난 네 오빠라는 사실을 명심해. 신세 진다는 생각 같은 거 추호도 하지 말라고.

통찰력을 토대로 루비의 성장을 읽고 빈말이 아님을 간파한 그리드였다. 하지만 노파심에 몇 마디를 덧붙이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의 인벤토리에는 <미카엘의 성검>과 고리, 깃털, 그리고 각종 보석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중 고리와 깃털은 대천사 라구엘을 죽이고 얻었던 아이템들과 닮아 보였지만 전혀 달랐다. 이름부터 차이가 있다.

<천사의 고리>

등급:신화

천사의 머리 위에 떠오른 채 광채를 발하던 고리입니다. 지금은 빛을 잃었고 용도를 알 수 없지만 대단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게:0

<천사의 깃털>

등급:신화

천사의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입니다. 무슨 수를 써도 더럽힐 수 없을 것처럼 하얗고 깨끗합니다. 아직 용도는 모르지만 대단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게:0

이게 라구엘이 드롭한 고리와 깃털의 정보이고,

<학살의 고리>

등급:신화

제3위 대천사 미카엘의 신성력에 공명하여 진화해온 광원의 고리입니다. 빛은 건재하나 용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단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게:0

<학살의 날개의 깃털>

등급:신화

제3위 대천사 미카엘의 의지에 공명하여 진화해온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입니다. 아직 용도는 모르지만 대단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게:0

이건 미카엘이 드롭한 고리와 깃털의 정보이다.

미카엘은 라구엘과 달리 영혼이 소멸하며 자신의 모든 걸 잃었다.

그런 논리에서 ‘진짜’ 고리와 깃털을 드롭한 듯했다.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는 아이템입니다!]

알림창과 함께, 미카엘의 고리와 깃털의 정보가 갱신된다.

<학살의 고리>

등급:신화

제3위 대천사 미카엘의 신성력에 공명하여 진화해온 광원의 고리입니다. 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집행을 행사할 수 있게끔 특화된 신성력을 생성합니다. 미카엘이 소멸하였으므로 다른 천사에게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습니다.

무게:0

<학살의 날개의 깃털>

등급:신화

제3위 대천사 미카엘의 의지에 공명하여 진화해온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입니다. 집행 대상에게 가까워질수록 가속합니다. 미카엘이 소멸하였으므로 다른 천사에게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습니다.

무게:0

‘이거...’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소유권을 양도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 고리와 깃털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다.

천사의 고리와 깃털을 꺼낸 그리드가 그것을 각각 학살의 고리와 깃털에 겹쳐보았다.

[<학살의 고리>를 강화하시겠습니까?]

[<학살의 깃털>을 강화하시겠습니까?]

질문을 던지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천사의 고리와 깃털의 정보가 갱신됐다. ‘알 수 없던’ 용도가 ‘고리와 깃털을 강화하는데 사용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사리엘에게 강력한 성장 수단이 생겼다.’

고리와 깃털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할지 알게 된 그리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하나의 대천사를 소멸시킬 때마다 업그레이드 될 사리엘의 고리와 날개를 떠올리자 전율이 몸을 감쌌다.

‘이 검도 사리엘에게 주는 게 좋겠군.’

등급만 신화일뿐, 디바인 스톤을 추출하는 재료에 그쳤던 라구엘의 창과 비교해서 미카엘의 성검은 훌륭한 무기였다. 천사가 쓴다는 가정 하에 그리드의 신검과 비견됐다.

“저기... 오빠?”

“...응, 말하렴.”

성검의 정보를 확인한 뒤 룬의 상태를 점검하던 그리드가 인자한 미소를 그렸다. 팔뚝엔 오소소 소름이 돋은 채였다. 너무 기쁜 나머지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수백 대의 카메라를 뒤늦게 의식하며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

오빠의 어울리지 않는 말투에 당황하는 루비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오빠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하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저기, 나 신앙의 대상이 됐다는데... 이거 혹시...”

“...”

귀에 입을 바짝 붙이고 속삭이는 루비.

그리드는 동생이 왜 굳이 물리적인 귓속말을 보내는 건지, 그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레베카교 교인들이 두 사람에게 밀려오는 중이었다.

숫자가 족히 수만인지라 장벽이 다가오는 듯한 압박감이 있었다.

그들에게 떠밀린 루비가 그리드에게 바짝 붙어 선 형국이었다.

남매를 빼곡히 둘러싼 교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하늘에 떠있는 달조차 매번 다른 감상을 주는 법이다.

어떤 날은 찬연하여 성스럽고, 어떤 날은 둥그래서 정겹고, 또 어떨 때는 붉어서 불길하고...

인간이란,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것을 느낀다.

교인들이 본 미카엘의 모습은 기껏 다시 움텄던 여신을 향한 믿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성서를 통해서 접했던, 혹은 바라고 상상했던 천사의 모습은 한없이 고결하고 성스러운 존재였다.

칼에 베일 때마다 피와 장기를 쏟아내면서도 평온한 얼굴로 재생을 반복하는 괴이한 실체와 어울리지 않았다. 여신을 섬기는 교인들을 거리낌 없이 학살하려했던 악마 같은 태도와는 더욱 더 거리가 멀었다.

최후의 순간에 자폭한 미카엘의 선택이 교인들의 신앙에 빗금을 그은 것이다.

미카엘이 죽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볼 뿐인 레베카 여신의 뜻 모를 방관은 금 간 신앙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교인들은 지난 삶을 돌이켜보았다.

교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우리를 도와주었는가.

악마들이 침공할 때마다 누가 우리를, 인류를 구원했던가.

여신은 아니었다.

깨진 신앙에서 새로운 신앙이 탄생했다.

자신의 입장에선 배신자나 다름없을 교인들의 목숨을 보호한 템빨신과 그의 동생 루비.

그들이야말로 교인들이 꿈꾸고 바라온 신이었다.

[대가 없는 선의로 인류를 이끌어온 성녀의 전설이 시작됩니다.]

[순수한 악과 필요에 의한 선을 단죄해온 그녀의 업적은 숭배되어 마땅한 것입니다.]

[레베카 여신을 섬겨온 이들 중 상당수가 템빨신과 성녀를 새로운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앗...”

루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갑작스런 변화와 함께 강요되는 무거운 책임을 오빠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엔 아직 그녀의 그릇이 완성되지 못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동생의 작은 손을 그리드가 꼭 붙잡아주었다.

“괜찮아.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야.”

루비는 그리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한 아이였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지녔고 심지가 곧다.

Satisfy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성녀로 선택 받은 아이 아닌가.

이후 단 한 번도 엇나감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때때론 오히려 오빠를 이끌어주기도 했다. 루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그리드는 그녀에게 자주 의지해왔다. 그녀에겐 사람들을 책임지고 이끌 자격이 충분했다.

‘가끔 벅차할 땐 내가 도와주면 된다.’

삼신교를 해산시켜야 옳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망설였던 이유는 이 세상에서 ‘힐러’가 멸종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성녀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탄생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사라진다.

이미 체험하지 않았나.

신자는 섬기는 신의 영향을 받는다.

템빨신교의 교인들이 검무를 습득하고 구사하듯, 루비신교(?)의 교인들은 힐과 버프를 습득하고 구사하게 될 것이다.

‘루비신교... 이름 참 구리군.’

기뻐하면서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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