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9권 - 10화
미풍에 실려 온 꽃가루가 창틀에 녹색의 흔적을 남긴다. 봄이었다.
차가운 겨울에 시달리고 있는 중부와 달리 남부의 계절은 포근했다.
골목 어귀마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화단에 물을 주며 담소를 나누는 부인들의 표정은 평온했고 집과 집 사이에 걸린 빨랫줄에선 세탁물이 마르고 있어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마을의 풍경은 특별할 거 없이 평범했다.
찬연한 달이 검게 물든 하늘에서 존재감을 발하기 전까지,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의심도 품지 못했다.
키야아아아악!!
“씨, 씨발, 이게 뭐야!!”
“히이익!!”
공을 차달라고 부탁했던 소년들과 꽃반지를 자랑하던 소녀들, 부친의 일을 돕던 청년들과 자신은 아직 현역이라며 너털웃음 치던 중년들,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부인들과 깐깐한 태도로 일거리를 적선하던 촌장에 이르기까지.
낮에 보았을 때는 지극히 평범했던 마을의 주민들이 갑자기 괴물로 변해버렸다.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람 좋은 얼굴로 식사 챙겼냐고 묻던 여관 주인이 등에 식칼을 쑤셔왔다.
내일도 의뢰 받으려면 과음하지 말라고 당부하던 촌장이 여관 입구에 불을 붙였다.
눈은 붉게 충혈 되고 피부는 보라색으로 물든 채였다.
마을 사람들의 정체는 소문으로 듣던 마인(魔人)이었다.
“뭐야 염병!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었나?”
수프를 먹다가 식칼에 등을 찔린 무도가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몇 개 지역에서 이름을 날린 실력자답게 물 흐르듯 반격했다. 여관 주인의 면상에 궁극기를 때려 박았다.
웍을 들고 달려드는 부인을 벤 검사가 대꾸했다.
“우리가 방심한 게 아니다. 이들에겐 마인의 특성이 전혀 없었어.”
여관 주인의 딸과 아들에게 허벅지를 찔리고 쓰러진 마법사가 실소했다.
“맙소사. 마인들에게 학습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이 새끼들... 정체를 숨기는데 점점 더 능숙해지고 있는 거야.”
“캐비어!!”
“남 이름 부를 시간에 뒤나 확인... 컥!”
“끄아아악!!”
하나의 파티가 전멸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분이었다.
300레벨 초중반의 플레이어 8명으로 구성 된 중견 파티였음에도 그랬다.
마인들의 습격이 워낙 기습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여관 주인 부부가 좀비처럼 일어서는 광경을 흑백 시야에 담으면서, 그들은 저마다 다른 위치에 저장해놓았던 부활 포인트에서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중 몇 명이 절망했다.
짧으면 몇 달, 길면 몇 년 동안 거점으로 삼고 활동했던 마을과 도시의 주민들 역시 마인으로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런 미친...”
“말도 안 돼! 내가 이 도시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이 사람들이랑 몇 번의 밤을 함께 보냈는데! 이 사람들은 원래 마인이 아니었다고!! 악! 으아아악!!”
대륙 각지에서 혼란이 가속됐다.
족히 수백 개의 마을과 도시의 백성들이 마인화(魔人化) 되었다는 속보가 쏟아졌다.
그들에게 희생당한 플레이어의 숫자가 고작 며칠 만에 수천 단위에서 수만 단위로 널뛰었다. 마인과 플레이어의 격전 과정에서 폐허가 된 마을과 도시의 숫자가 수십 개였다.
다크엘프가 준동하기도 했다.
세계수의 엘프들이 다짜고짜 타락한 것이 아니다.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여성 엘프들과 척을 지고 세계수를 떠났다고 알려진 남성 엘프들.
그들이 어딘가에서 마기에 침식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칼날처럼 벼린 살의를 품은 채였다.
세계수의 숲의 외곽을 지키던 제국의 군대가 놈들의 침략을 받고 전멸했다는 소식이 템빨국에 들려왔을 무렵엔 이미 바사라가 새로운 병력을 급파한 상태였다.
대응이 몹시 신속했지만 라우엘의 표정은 어두웠다.
“제국은 마인 사냥을 위해 다수의 병력을 분산시킨 상태입니다. 사실상 내란을 겪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죠. 세계수에 보낼 수 있는 원군도 한정되어 있을 겁니다.”
마인화 된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 국가가 바로 제국이다.
땅덩어리가 워낙 크고 사람이 많아서 생긴 문제였다.
제국엔 셀 수 없이 많은 마을이 존재했는데 그 전부를 관리하진 못했다. 화전민이나 범죄자들이 외딴 곳에 무허가로 세운 마을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관리하는 건 천하의 제국이라도 불가능했다.
주기적인 정찰과 감시를 통해 하나의 마을을 발견하고 수습한다고 해봤자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선 새로운 마을이 건설되고 있었으니 끝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무허가 마을의 주민들이 마인화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만큼 야탄교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는 것이다.
“즉시 추가 병력을 보내야합니다. 세계수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갈 경우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소수정예를 파견하고자 합니다.”
“사자를 보내자는 건가?”
“예, 부디 허가를.”
한쪽 무릎을 꿇은 라우엘이 고개를 조아렸다.
주홍색 아우라를 몸에 두른 그리드를 마주보고 있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고절한 멋을 느꼈다. 묵색의 탐욕과 조화를 이루는 색감이 표출하는 격조에 압도되었다.
처음 봤을 땐 완전히 매료되어 넋을 잃었고, 두 번째 봤을 땐 부러워서 반쯤 돌아버리기도 했었다.
스킨 제작자 기프트에게 제발 저런 느낌을 구현해 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귓속말을 보내 보챘을 정도다.
기프트가 S.A그룹의 의뢰를 받아 당분간 ‘구세하’라는 거장의 삶에 집중하게 된 데에는 라우엘의 지분이 크다는 게 중론이었다.
“브라함하고 네펠리나를 보내자. 그 둘이 제일 한가하니까.”
피아로와 메르세데스는 농부와 기사이기에 앞서 사령관이었다. 전략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고 군대 육성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사리엘은 아스가르드의 주목을 받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리드 없이 템빨국 밖으로 나갔다간 표적이 될 위험이 있다.
지크프렉터는... 뭔가를 믿고 맡기기엔 상태가 너무 나쁘다.
“전력상으론 충분하겠지만... 좀 불안하군요.”
그리드는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인원을 분배했지만 라우엘의 반응이 미묘했다.
“그 둘만 갔다간 분위기에 휩쓸려서 세계수를 불태운다거나 하지 않을까요?”
“...”
브라함은 지공이되 감정적이고 네펠리나는 용족이되 어리다.
게다가 둘이 궁합이 썩 좋은 것도 아니다. 서로 묘하게 경쟁의식이 있어서 분위기에 휩쓸리기 딱 좋은 조합이었다.
브라함의 지난 트롤링들을 떠올려본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결국 메르세데스를 보내야 하나?”
“그분도 좀... 가끔 앞뒤 분간 못할 때가 있어서...”
“...”
그리드가 새삼 실감했다.
자신의 사자들.
하나 같이 능력이 출중하고 잠재력은 더욱 훌륭하지만 성격이 괴팍한 구석들이 있다.
단독 임무를 맡기는 게 꺼려질 지경이니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싶었다.
‘물론 점점 바뀌어가는 중이긴 하지만... 일곱 번째 사자는 애초부터 평범한 사람을 뽑아야겠어.’
마음속으로 다짐한 그리드가 다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럼 피아로?”
“네, 피아로 공과 아스모펠 공을 주축으로 삼아 전대 적기사단원들을 파견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인마대전 전에 다시 예전처럼 합을 맞춰보기도 해야죠. 게다가 피아로 공의 안주인 되시는 분이 엘프족인 만큼 임무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남다를 테고요.”
“그렇게 해.”
일곱 번째 사자는 꼭 정상인으로 뽑겠다...
그리드가 재차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세이렌으로부터 급보입니다.”
전령이 찾아왔다.
“대량의 해양생물이 마물로 변해 세이렌을 공격 중이라고 합니다.”
“해양생물? 크라겐 같은 괴물들을 말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는 그리드에게 전령이 설명했다.
“그것이... 평범한 물고기 중에서도 마물로 변한 개체가 꽤 많다고 합니다.”
라우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부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생기겠군요. 해안 근처 영토의 경계를 강화해야겠습니다. 세이렌의 요청 사항은 뭡니까?”
“5천의 정예병단을 원하고 있습니다.”
“흠...”
지금의 템빨국에게 5천의 병력은 적은 숫자였다. 당장에라도 정예만 골라서 차출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수중 전투’가 가능한 인원을 뽑는 건 별개의 문제다.
세이렌과 동맹을 맺은 지도 어연 20여년.
물속에서 호흡하는 수단이야 차고 넘칠 정도로 마련했지만, 호흡이 가능하다고 해서 물속에서 잘 싸운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이렌 내부에서는 수압이 발생하지 않지만 세이렌까지 이동하는 과정이 문제다.’
세이렌은 공격 받는 중이라고 했다.
포위당한 상태일 확률이 높다. 그 포위망을 뚫고 세이렌에 진입하기 위해선 수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거나 수중 전투를 경험해본 전력이 필요했다.
‘몇 년 전부터 솔져 님이 해군을 육성하곤 있지만 실전 경험은 전무. 툰 님을 비롯해서 초창기 단원들을 함께 파견하는 수밖에.’
사실 브라함을 보내는 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일 것이다.
하지만 세이렌이 요구하는 원군은 5천이다.
브라함을 보내기엔 너무 과했다. 그의 가치는 고작 5천의 병력이 아니라 5만, 50만의 병력과도 맞먹는 수준이니.
인계와 지옥의 경계가 차츰 허물어지면서 대륙 각지에서 온갖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지금, 사자급 전력을 아무데나 투입하는 건 지양해야했다.
“지옥 탐사에 참가하지 않았거나 낙오 된 단원들을 중심으로 원군을 꾸리겠습니다.”
“병사는 몇이나 보내게?”
“저쪽에서 5천을 요구했으니 최소 5천 이상을 보내겠습니다. 이참에 실전 경험도 쌓을 겸 해군 병력 전부를 파견할까 싶습니다.”
“솔져 그 양반, 전에 코크로 섬에서 보니까 엄청 심심한 눈치던데 잘 됐네.”
툰을 포함한 단원들을 보내는 이상 굳이 5천을 보낼 필요는 없다. 2천으로 줄여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동맹의 요청은 되도록 수용해주는 편이 좋다. 무조건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야 더 큰 신뢰를 쌓고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빨골2도 추가시키자.”
“템빨골을요...?”
“빨골2가 리치로 전직하고 나서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거든. 어디까지 가능한지 실험을 해봐야겠어.”
“전하가 곁에 없어도 소환이 유지된다는 말씀입니까?”
“응, 생명력이 바닥나서 죽거나 내가 따로 역소환하지 않는 이상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데.”
네크로맨서들이 들으면 기겁할 내용이다.
템빨골은 전 3위 대악마가 친히 만든 존재답게 특별한 구석이 많았다. 기적으로 취급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세이렌에서도 과연 소환이 유지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니까 확인해보려는 거다.
라우엘이 걱정했다.
“템빨골이 전하 없이 혼자서 활약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만약 세이렌에서 약한 모습이라도 보였다간 전하의 체면이 떨어질 텐데요.”
템빨골2의 무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리치는 스켈레톤의 정점 중 하나이기에. 더군다나 템빨골2는 지난 며칠 동안 그리드가 직접 만든 아이템을 완벽하게 무장했다.
다만 라우엘이 걱정하는 건 템빨골2의 인공지능이었다.
과연 주인의 명령 없이도 최선의 판단과 행동이 가능할까?
라우엘은 그리드의 권속이 외부 활동 중에 못난 꼴을 보이는 걸 원치 않았다.
특히 수인족은 문화와 정서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템빨신교의 전파가 늦는 편이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부족했다.
그리드가 열심히 망치질 중인 템빨골2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빨골아. 믿어도 되냐?”
[예... 주인님의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망치를 내려놓은 템빨골2가 부복하며 대답했다. 긴 말 따위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결과로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전해졌다.
새카만 마력을 퍼뜨리며 안광을 빛내는 녀석의 모습이 라우엘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크윽...! 폭풍 같은 마력의 기세에 흑염룡이 반응을...!”
“이제 그만 가라.”
라우엘의 왼쪽 팔에서 검붉은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하자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냉큼 손을 휘저었다. 대화가 삼천포로 빠지기 전에 자리를 파하려는 것이다.
사자들의 장비를 개변해야하는 등, 그리드는 무척 바빴다. 일거리가 여전히 차고 넘쳤다.
그때였다.
[연합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집니다.]
[연합군 병사들의 스태미나와 능력치가 40퍼센트 하락합니다.]
“...?”
별 거지 같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갑자기 발생한 사태인지라 그리드는 당황하는 반면 라우엘은 곧바로 사태 파악에 나섰다.
잠시 후.
“삼신교에서 선동을 시작했다는군요.”
정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구긴 라우엘이 설명했다.
“템빨국과 템빨신교에서 신의 상징물들을 훼손시킨 영향으로 마인이 발생한 거라는 거짓 주장을 펼치고 있답니다.”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국에 왜 굳이 반목하려 드는 거지?”
“마인과 다크엘프의 준동, 해양생물들과 일부 몬스터들의 마물화... 어수선한 시국을 기회로 여긴 걸 테죠. 불안을 품는 사람이 많을수록 종교의 입김이 세지는 법이니까요. 작금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삼신교 뿐이라며, 교인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우리를 걸고넘어지게 된 모양입니다.”
“연합군 병사들이 동요할 정도면 여론은 이미 삼신교에게 기울었나?”
마침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베카 여신을 향한 사람들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도미니언 신을 향한 사람들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쥬다르 신을 향한 사람들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다. 홀로 오롯이 존재하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은 불가해한 일을 겪을수록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찾게 되며, 힘든 상황에 처할수록 신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종교가 그들을 입맛대로 다루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이비가 괜히 득세하는 게 아니지.”
“전하?”
“교황을 만나야겠다.”
라우엘과 대화하는 내내 작업을 쉬지 않던 그리드가 처음으로 망치를 내려놓았다.
라우엘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대장간 밖 공터에서 갓 핸드와 대련 중이던 하스터 또한 흠칫 놀랐다.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갓 핸드들이 살기를 품은 까닭이다.